나쁜 너
최은수/한국/2022년/23분/본선 단편경쟁
사랑의 작대기가 엇갈린다. 남고생 주영(김정식)은 연상의 수림(문인옥)을 좋아한다. 그러나 수림은 성준(서동근)과 만난다. 한편 주영의 동급생 은호(김다빈)는 주영에게 고백한다. 주영은 수림을 향한 자신의 마음, 자신을 향한 은호의 마음 사이에서 갈팡질팡한다. 수림은 그런 주영의 마음을 알면서도 모른 척하는 ‘나쁜 너’처럼 보인다.
젊은 네 남녀의 애정이 얽히고설켜 조금의 낯간지러움을 일으키는 정석의 청춘 로맨스다. 정석이란 말은 어느 정도의 투박함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어른 같은 연상을 좋아하는 남자애의 취향도 그렇고, 그런 남자애가 좋아하는 연상의 누나가 꼭 담배를 피우고 있는 이미지에서도 기시감이 느껴진다. 대신 <나쁜 너>는 모두가 아는 사랑 이야기를 최대한 산뜻하고 비정하게, 잘 연출한다. 마음이 들고 나가는 자연 빛의 비유, 장소의 높낮이를 이용한 심적 거리감의 직조, 무리하지 않고 새어나가게 만드는 감정의 절제가 영리하고 단단하다. 대번에 눈에 띄기 위해 자극적인 주제와 이미지, 복잡한 서사를 남용하는 단편영화들 사이에서 <나쁜 너>가 유독 예뻐 보이는 이유다.
러브 데스 도그
권동현, 권세정/한국/2023년/19분/새로운선택
1914년 일본의 인류학자 도리이 류조는 조선인들의 신체를 조사하고 기록했다. 일본인과 조선인의 신체적 기원이 유사함을 밝혀 일제의 내선일체 사상을 강화하기 위해서였다. 이 조사를 조선의 관습, 유물, 역사 등에도 똑같이 적용했고, 그것들을 하나하나 사진으로 남겨 사료로 삼았다. 나아가 1937년, 모리 다메조는 조선의 진돗개가 일본의 아키타견과 같은 뿌리임을 주장하며 도리이 류조의 논리를 이어받았다.
여기까진 뚜렷한 역사의 기술이다. 그러나 <러브 데스 도그>는 조금 시선을 확장해 기록 매체의 권력을 탐구하기 시작한다. 자막을 통해 서술된 “이들의 사진은 인간과 동물 그리고 사물을 동등하게 다루는 듯 보인다. 동등하게 낮은 곳에 위치시킨다”라는 어구로부터다. 별것 아닌 듯한 카메라의 앵글, 일련의 사진에서 파생되는 일종의 연결 몽타주가 정치적 압제를 내재했다는 생각이다. 더하여 영화는 일제가 조선의 개에게 꼭 명찰을 달게 했거나 필요시 무차별적으로 죽여 가죽을 벗겼음을 밝힌다. 특정 존재 혹은 특정 이미지에 인위적인 의미를 귀속시키는 행위가 얼마나 폭력적인지와 공명하며 영화의 사유를 확대한다.
양해의 닭다리
김달리/한국/2023년/17분/새로운선택
양해(임유빈)는 킥보드를 타고 음식 배달을 다닌다. 룸메이트에게 월세를 내지 못할 정도로 주머니 사정은 좋지 않다. 그럼에도 억척같이 배달 일을 하고, 룸메이트의 우유나 배달하는 음식에 손을 대면서까지 근근이 하루를 버틴다. 이처럼 열심히 사는 듯한 양해지만, 사실 과거엔 삶을 포기하려 한 적이 있다. 예전에 알던 지아(김나현)를 마주치게 되면서 그 아픈 기억이 솟아난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4:3쯤의 좁은 화면비다. 혼자 넘어지고, 욕하고, 끙끙대는 양해의 행동과 표정이 좁은 프레임을 가득 채우며 러닝타임의 절반가량을 이끈다. 주인공 한 사람의 삶에 겸손히 집중하는 동시에 그가 느끼는 고립감을 효과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이는 곧 좁은 프레임에 나란히 선 두 사람의 투숏이 펼쳐질 때의 감흥을 배가하기도 한다. 짧은 시간 내에 주인공의 현재와 과거를 다루고, 죄와 벌에 관한 윤리적 문제까지 호기롭게 곁들인다. 많은 바를 다루려다 보니 얼핏 욕심인가 싶은 순간들이 생기지만, 그럼에도 과해 보이지 않게 화면을 꾸리는 연출력의 균형감이 안정적이다.
서울독립영화제 기획전
독립영화 아카이브전: 한국 독립애니메이션, 시대의 소묘
올해 서독제의 ‘독립영화 아카이브전’은 80~90년대의 한국 독립 필름 애니메이션을 조명한다. 2D애니메이션 이전에 셀애니메이션으로 제작된 6개의 작품을 소개한다. 실사영화보다 먼저 디지털로 전환된 애니메이션 분야에선 더더욱 희귀한 사례들이다. 먼저 ‘반쪽이’란 필명으로 알려진 최정현 작가의 <방충망> <상흔> <그날이 오면>이 눈에 띈다. 사회적 운동으로서의 예술 활동이 융성했던 1980년대 대학가에서 학내 열사의 죽음, 민중의 저항과 열망을 그렸던 작품들이다. 위 세 작품은 제작된 지 30여년 만에 최초로 극장 상영된다. 그리고 90년대 독립애니메이션 운동의 발화점이었던 이용배 감독의 1991년작 <와불>, 제1회 서울단편영화제에서 우수작품상을 받았던 김현주 감독의 1994년작 <오래된 꿈>, 애니메이션 제작사 ‘연필로 명상하기’의 시작점이 된 안재훈, 한혜진 감독의 1998년작 <히치콕의 어떤 하루>가 프로그램을 채운다. 한국영상자료원과의 공동 주최로 진행되는 독립영화 아카이브전은 올해 여섯 번째 기획전까지 22편의 작품을 복원했고 43편의 작품을 상영하고 있다.
해외초청 프로그램 - 우리가 사랑한 21세기 시네아스트
최근 홍콩, 일본, 대만 등의 아시아 권역 영화를 주로 소개했던 서독제의 해외초청 프로그램이 새로운 시도에 접어들었다. 일반 관객들의 설문을 바탕으로 동시대의 시네아스트 11인을 고른 후, 그중 5인의 작품을 상영하는 방식을 택한 것이다. 그렇게 선정된 작품은 하마구치 류스케의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 왕빙의 <청춘(봄)>, 리산드로 알론조의 <유레카>, 알리체 로르바허의 <키메라>, 페드로 코스타의 <비탈리나 바렐라>다. 추가로 서독제가 주목하는 두 아시아 신진감독의 영화를 더했다. 올해 칸영화제에서 황금카메라상을 받고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상영한 팜 티엔 안 감독의 <노란 누에고치 껍데기 속>, 올해 베니스국제영화제에 초청됐던 총 킷 옹 감독의 <오월의 눈>이다. 이로써 총 7편의 작품이 관객을 찾는다. 한편 본 해외초청 프로그램은 영화 커뮤니티 MMZ와 함께 기획하고 진행했다. 서독제는 “관객이야말로 지금의 전면적인 위기에 맞설 수 있는 유일한 우리의 무기”라고 믿는다며 관객 커뮤니티와의 협업 배경을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