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2]
[인터뷰] 매 순간 절실하게, ‘빅슬립’ 김영성
2023-12-21
글 : 정재현
사진 : 오계옥

<빅슬립>을 본 이라면 누구든 기영을 연기한 배우 김영성을 이야기한다. 여유나 선의 없이도 스스로를 챙기되 타인을 돌볼 줄 아는 남자. 거칠고 무심하지만 자기와 닮은 소년 길호(최준우)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는 남자. 가까이하고 싶진 않지만 저 사람의 속사정은 궁금하게 만드는 남자. 김영성은 <빅슬립>의 기영을 정의할 수 있는 무수한 문장을 세심한 연기만으로 만들어낸다. 스크린 밖 관객에게 기영의 쿰쿰한 체취가 맡아질 정도로 맹렬한 연기를 펼쳤던 김영성은, 언제 내가 영화 속 그 남자였냐는 듯 소담하고 나직한 목소리로 십수년 배우의 삶을 조심스레 되짚어갔다.

- 줄곧 연극 무대에 서다 2014년부터 영화 연기를 시작했다. 무대에서 매체로 넘어온 계기가 있나.

= 언젠가 한국영화아카데미 출신 영화감독이 내 연극을 보러 왔다. 그리고 내게 “아카데미로 오디션을 보러 오라”고 제의했다. 그때만 해도 연극밖에 몰라서 ‘아카데미’로 오라는 말을 듣자마자 “아니 무슨 학원으로 오디션을 보러 오라고 해?”라고 대꾸했다. 그랬더니 친한 동생이 “이 형 미쳤네, 거기 봉준호가 나온 곳이야”라며 오디션을 무조건 보라고 했다. 사실 처음엔 매체 연기에 큰 재미를 못 느꼈다. 무얼 제대로 펼쳐 보인 것 같지도 않은데 ‘컷, 오케이’로 끝나는 느낌이었다. 그런데 편집을 통해 완성된 영화를 볼 때 박동하는 마음이, 연극 시작 전 설렘과 맞먹더라. 그렇게 영화에 정을 붙여 지금까지 왔다.

- 기영은 늘 찌푸린 미간과 주머니에 손을 넣은 구부정한 자세로 화면에 자리한다. 처음부터 캐릭터의 고정된 태(態)를 설정해두었나.

= <빅슬립> 촬영 전 한달간 감독님과 연습실을 빌려 함께 기영을 만들어갔다. 누가 내 이름을 부를 때 그냥 돌아볼 수도 있지만 (직접 영화 속 표정을 지어 보이며) 과잉할 정도로 무언가에 집중하고 몰입하려는 기영만의 숨은 노력이 얼굴에 드러나길 바랐다. 무뚝뚝하고 소통에 서툰 남자지만, 누군가의 이야기를 들을 때만큼은 진심을 보이고 싶은 것이다. 구부정한 자세는 초은 역의 이랑서 배우와 대본 리딩을 할 때 탄생했다. 아담하고 밝은 초은 옆에 크고 이상한 사람이 서 있으면 그림이 재밌을 것 같았다. 그때 구체화해둔 자세를 끝까지 유지해갔다.

- 작품을 연출한 김태훈 감독은 캐스팅이 확정된 뒤 기영에게 김영성이 스며들어 변한 부분이 있다고 전했다. 창작자가 배우 고유의 특성을 반영해 배역을 수정하는 일은 배우에게 더없는 특권인 동시에 부담일 수도 있다.

= 기영의 집 세트에 실제 내 어린 시절 사진을 붙이고 보는데, 어릴 적 엄마로부터 받은 사랑이 계속 떠올랐다. 처음 감독님이 생각하신 기영은 거친 남자였다. 그런데 내가 엄마로부터 받은 사랑을 프리즘 삼아 배우 김영성과 캐릭터 기영 사이에 투과하니, 나도 모르게 따뜻한 억양이 나왔다. 다행히 감독님이 나로 인해 기영의 진의가 훼손되기보다 다채로워질 수 있다고 말씀해주셨다. 감독님은 나를 믿고 매 연습 전 기영의 대사를 만들어 오라고도 부탁하셨다. 기영엔 내가 많이 녹아 있을 수밖에 없다.

- 기영과 길호는 소통할 줄 모르는 남자들이다. 둘은 ‘이게 대화인가?’ 싶을 정도로 공감, 경청 등 소통의 대원칙이 결여된 말하기를 구사한다. 하지만 정작 둘은 무리 없이 대화하는 걸 보아, 기영은 지금 당장 길호에겐 말이 통하지 않는다는 걸 은연중 알고 있는 사람 같기도 하다.

= 처음 대본을 읽을 때 다 큰 어른인 기영이 길호와 똑같은 화법을 쓰고 있어 놀랐다. 감독님은 기영이 나이만 들었을 뿐 성장하지 못하고 어린 시절에 멈춰 있는 사람이길 원하셨다. 그래서 실제로 “네가 중2라고 생각하고 연기해봐”라는 디렉션도 주셨다. 최준우 배우와 대사 연습을 할 때도 중학생들이 말도 안 되는 대화를 하듯 서로의 말을 끊으며 대사를 주고받는 시간도 거쳤다.

- <빅슬립>에서의 호연으로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올해의 배우상을 수상한 것을 시작으로 많은 이들이 김영성의 연기를 이야기한다. 훌륭한 연기는 치열한 촬영 현장과 무관할 수 없다.

= 좋은 배우가 되기 위한 태도를 <빅슬립>으로부터 배웠다. 모두가 절실한 마음으로 무언가를 만들면, 구성원 각자에게 좋은 칼날이 벼려진다는 것을 <빅슬립> 촬영 현장에서 목격했다. 지치지 않는 뜨거운 마음으로 노력하는 감독님을 보며 큰 감화를 받았는데, <빅슬립>의 조명감독은 내게 “배우님이 열심히 하는 모습을 보며 내 안일한 태도를 돌아본다”는 말을 전해줬다. 열정과 최선을 지닌 채 현장에 존재하면 작품의 성패와 관계없이 곁을 지키는 사람들에게 좋은 배우, 좋은 사람이 될 수 있더라.

- <빅슬립>의 기영으로 사는 동안 배운 점이 있다면.

= 기영으로부터 어른의 마음을 배웠다. 거친 말들이 난무하는 세상에서도 기영이 길호를 바라보던 시선으로 세상을 살아간다면 좋은 어른이 될 수 있을 거란 희망을 품어본다. 편의점 종업원 아르바이트를 오래 하며 정말 별별 손님을 다 상대했다. 만취한 채로 편의점에 들어와 곧 토할 것 같은 사람을 보면, 솔직히 ‘토만 여기서 안 했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즉각 들지 않나. 그런데 한번은 ‘저이가 오늘 속상한 일이 있었나 보다’라고 바라봐줄 수도 있다. 한번이라도 따뜻한 시선으로 고역을 겪는 상대를 응시하고자 노력한다면 좀더 좋은 어른이 될 수 있다고 믿는다.

내 인생의 명장면 - <빅슬립>에서 기영이 처음 등장하는 순간

“<빅슬립>은 김영성의 배우 생활에 신호탄이 된 영화다. 그래서 첫 장면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촬영 당시에도 관객들에게 익숙지 않은 배우 김영성의 얼굴을 처음 소개하는 순간이라는 생각이 드니 설렜던 기억이 난다. ‘내가 이걸 원했지, 떨리지만 한 판 제대로 즐겨보자’는 카타르시스도 일었다. 인간 김영성에게 명장면은 우리 쌍둥이들이 처음 나를 아빠라고 부른 순간이다. 그날, 이제 나도 아이들의 아빠로서 어른이 되어야겠다고 마음을 가다듬었다. 아직 아이들이 <빅슬립>을 보기엔 많이 어리다. 아이들이 영화를 볼 수 있는 나이가 되면 함께 <빅슬립>을 보며 아빠의 젊은 시절을 선물해주고 싶다.”

필모그래피

2022 <범죄도시2> 2022 <빅슬립> 2021 <발상의 순환> 2020 <낙원의 밤> 2020 <검객> 2020 <유체이탈자> 2019 <비스트> 2017 <하루> 2017 <결혼기념일> 2016 <피사체> 2015 <선물> 2015 <추안치앙난즈> 2014 <마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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