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스터스 토크]
[Masters’ Talk] '드라이브 마이 카'라는 새로운 영화적 경험,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 이제훈 배우를 만나다 ②
2024-01-05
글 : 배동미
사진 : 최성열

“확신이 있었냐고 묻는다면 없었습니다”

이제훈 <드라이브 마이 카>에는 가후쿠의 이야기가 있고, 또 오토와 가후쿠가 만드는 ‘칠성장어’ 이야기와 가후쿠가 하고 있는 연극 안톤 체호프의 <바냐 아저씨>가 담겨 있습니다. 글을 쓸 때 이야기의 레이어들이 잘 융화될 수 있을까, 라는 확신이 있으셨나요. 어려운 작업이겠지만 이야기들이 유기적으로 움직이면서도 여러 해석으로 이어져 놀라웠거든요.

하마구치 류스케 확신이 있었냐고 묻는다면 없었습니다. (웃음) 이 영화는 <드라이브 마이 카>라는 원작 단편소설을 바탕으로 합니다. 무라카미 하루키 작가가 쓴 <여자 없는 남자들>이란 단편소설집이 원작인데, 거기에 가장 먼저 실린 단편 <드라이브 마이 카>만 읽고 상당히 재밌어서 언젠가 영화화될지 모르겠다고 생각했어요. <여자 없는 남자들>은 단편 하나하나의 이야기는 다르지만 공통 테마를 다루고 있습니다. 또 주인공들의 감정에 어떤 변화가 일어납니다. <여자 없는 남자들> 속 요소를 잘 융합할 수 있다면 단편 <드라이브 마이카>만으론 말할 수 없는 주인공의 감정 해방, 혹은 회복까지 그릴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다만 인용되는 연극 <바냐 아저씨>와 어떻게 엮을지 전혀 모르겠기에 영화화를 목표로 몇번이고 다시 읽었습니다. 그러니까 가후쿠와 미사키의 관계가 바냐와 소냐의 대응으로 보이기 시작했어요. 지금으로선 그 역시 무라카미 작가가 미리 마련한 구상이라고 생각합니다. 무라카미 하루키 작가가 쓴 것을 풀어낸 결과 같아서 그렇게까지 제가 썼다는 느낌은 안 듭니다. 원작 각색은 배우가 시나리오를 보고 분석하는 것과 꽤 비슷하지 않나 생각이 듭니다. 배우가 시나리오에 이끌려서 그럴 생각이 아니었는데 행동한다든지, 여기에 이런 감정이 담겨 있구나 발견할 때가 있지 않을까 싶은데 어떤가요.

이제훈 시나리오를 보고 연기해야겠다는 마음을 먹으면 준비하죠. 대사를 외우고, 의미를 내포할 수 있는 행동이 무엇일까 고민하는데 현장에서 감독의 이야기, 환경, 그리고 상대 배우의 액션과 리액션에 따라 제가 준비한 것들이 많이 바뀌는 것 같아요. 상대방이 어떻게 받아들이고 어떻게 액션을 주는가. 그 영향으로 준비한 것이 크게 표현이 될 수 있고 아예 표현되지 않을 수 있어요. 저는 그렇게 상황에 맞춰 연기하는 배우인 것 같습니다. <드라이브 마이 카>의 경우, 배우들의 대사량이 엄청나게 많고 그걸 해내는 과정이 쉽지 않았을 텐데 여러 테이크를 갈 수밖에 없겠더라고요. 감독님의 배우 연출 스타일이 궁금합니다.

하마구치 류스케 ‘케이스 바이 케이스’가 대전제입니다만 시나리오 읽기를 합니다. 신에 나오는 배우 전원이 테이블을 둘러싸고 앉아서 시나리오를 몇번이고 읽습니다. 감정 없이 억양 없이. 그렇게 몇십번 읽는 게 일종의 소통이 돼요. 역할에 관해 토론하는 일은 거의 없습니다만 배우들에게서 언뜻 새어나오는, 말하기 어려워하는 부분이 있으면 그를 바꿔나가면서 본 촬영을 향해 나아갑니다. 그리고 어느 장면이든 10번 이상 촬영합니다. 이렇게 해석 없이 시나리오를 배우 몸에 넣은 상태에서 현장에 가면 배우들이 상대 배우와의 관계에 따라 시나리오가 어떤 의미였는지 직접 발견할 수 있습니다. 시나리오라는 건 기본적으로 굉장히 다의적이고 읽는 방법도 여러 가지죠. 그래서 몇번이고 읽음으로써 얻을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시나리오만으론 할 수 없는 풍부함을 배우가 알아차리고 연기하기 때문에 10번, 20번을 촬영해도 배우의 연기가 떨어지는 일은 없습니다. 오히려 배우가 여러 가지를 발견해나가는 모습을 보면 저도 즐거워요.

이제훈 아, 저도 감독님의 연출 세계에 함께 있는 배우가 되고 싶네요. (웃음)

하마구치 류스케 연기의 어려움에 대해 여쭤보고 싶은 게 있는데요. 영화 <박열>의 마지막 재판정 신에서 제훈씨가 길게 연설할 때 한숏은 박열(이제훈)이 판사를 정면으로 바라보는 프레임으로 찍었지만 다른 숏에서는 판사를 등지고 돌아서서 청중을 향해 발언합니다. 최소 두번 이상 연기를 해야 했고 상당히 텐션이 높은 장면이라 감정을 이어가기 어려웠을 것 같은데 힘들지는 않았나요? 그 장면을 위해 준비한 게 있었다면 듣고 싶습니다.

이제훈 그 장면은 감독님이 말씀하신 연기 연출과 맞닿아 있는 것 같아요. 저는 일본어를 할 줄 모르고 대부분의 대사가 일본어인 장면이 많아 대사를 숙지하는 과정이 엄청 길었어요. 수십번, 수백번을 읽고 들었습니다. 처음엔 감정 없이 대사를 체득해야겠다는 목표가 일차적이었어요. 그다음 상대 배우와 청중 앞에서 감정을 실어서 연기할 땐 일본어 대사 하나하나를 음미하기 쉽지 않아도 숙지하고 있기 때문에 두려움 없이 표현했어요. 굉장히 어려웠고 다시 하라면 절대로 못하겠지만(웃음) 배우가 언어의 장벽을 극복하는 방법이 아마 감독님의 배우 연출법이지 않나 생각됩니다.

하마구치 류스케 볼 때는 일본어를 못할 거라 생각지 못해서 그렇게까지 힘든 작업이었을 줄 몰랐습니다. 그렇게 준비했다면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힘드셨을 것 같네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대단한 연기였습니다!

<드라이브 마이 카>라는 새로운 영화적 경험

이제훈 가후쿠는 피해자처럼 보이지만 한편으론 아내와의 소통이 원활하지 못해 이런 결과를 안고 살아가는 것처럼 보여서 그의 아픔이 안타까웠는데요. 동시에 가후쿠는 히로시마에서 연극 <바냐 아저씨>를 준비하면서 다국적 배우들을 만납니다. 일본 배우뿐 아니라 한국, 중국 배우와 소통할 수 없는 상황에서 여러 언어로 대화하는 오디션 장면과 유나(박유림)가 수화로 연기하는 모습이 강렬하게 다가왔어요. 내용을 정확히 인지하지 못하지만 상대방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은 인상을 받았거든요. 그 찰나의 순간 제가 어떤 영화에서도 보지 못한 경험을 하니까 놀라웠어요. 어떻게 ‘다언어 연극’을 구성하셨는지 궁금했어요.

하마구치 류스케 원래 다른 작품에서 다언어 연극을 쓰려고 했습니다. 가후쿠가 어떤 연극을 할지 고민하다가 제가 가진 아이디어를 가져왔죠. 다언어 연극이 어떤 의미가 있을까 하는 건 별로 생각해본 적이 없습니다. 다만 평소 흥미가 있었어요. 어느 순간부터 영화제에 가거나 해외에 가서 말이 통하지 않지만 소통해야 할 때가 부쩍 늘었거든요. 그렇게 되니 뭐랄까요. 모국어인 일본어보다 어떤 면에서는 더 통쾌하게 소통할 수 있단 느낌을 받았어요. 예를 들어 지금 제훈씨가 한국어로 말할 때 뜻을 전혀 모르지만 무언가가 전달됩니다. ‘설마 욕을 하고 있진 않겠지?’(웃음) 그리고 제훈씨가 손을 움직이면 손이 예쁘다는 생각을 할 수밖에 없잖아요. ‘이런 감각이 재밌지 않나요?’라는 게 영화 속 다언어 연극이었습니다.

이제훈 바냐 역을 맡은 다카츠키(오카다 마사키)인가요? 그 친구가 사고를 치는 바람에 가후쿠가 바냐 역을 맡아야 하는 상황에 처합니다. 가후쿠는 아내가 오버랩되고, 자기 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느껴져 바냐 역을 피해왔습니다. 하지만 결국 연극을 위해, 고생한 단원들을 위해 바냐 역을 맡으면서 과거와 마주하는 것 같아요.

하마구치 류스케 지금 제훈씨가 말씀한 대로 받아들여질지 말지는 배우에게 달린 것 같아요. 니시지마는 전체적으로 억제된 느낌으로 연기했고 홋카이도에서 그 감정을 한번에 내보낸 뒤에야 바냐를 연기합니다. 니시지마가 가후쿠로서의 임무를 다하고 바냐로서 관객에게 비쳐지는데, 바냐가 아닌 가후쿠로 느낄 수 있게끔 만드는 건 온전히 배우 몫이었습니다. 그러나 제가 감정을 정의하고 어떠한 방식으로 연기해 달라고 부탁한 적은 한번도 없습니다. 배우가 표현하는 감정은 전부 배우 자신으로부터, 또는 상대와의 관계 속에서 나오니까요. 배우가 처음으로 시나리오의 의미에 대해 깨달은 것 같은 장면이 탄생하면 매번 놀라죠. 그 표현을 통해서 제가 놀랄 수 있다면 ‘오케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제훈 영화의 마지막 장면을 보면 미사키가 한국에 와 있습니다. 미사키가 한국 마트에서 장을 보고 차를 타는데 유나와 남편이 키우는 강아지가 함께 있고요. 그러면서 미사키가 길을 떠나는 장면으로 이야기가 마무리되는데, 이 이야기가 앞으로 어떻게 전개될지가 궁금했어요. 그러고 보니 가후쿠와 오토 사이에는 아픔이 있었잖아요. 잃어버린 딸을 늘 기억해 두 사람은 매년 기일에 절에 가 딸을 기리고. 그런데 앞서 등장한 전생에 관한 칠성장어 소녀 이야기와 미사키가 연결되면서 죽은 딸이 미사키로 환생한 것 같은 인상을 받았어요. 이야기가 희망차게 끝난다는 인상을 받았고 그래서 기분이 좋았거든요. 그런데 감독님께서는 그 시작하는 기분을 왜 한국을 무대로 표현했을까 궁금했어요.

하마구치 류스케 일단 그런 방식으로도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마지막 장면을 이해하기 어렵다고들 하실 줄 몰랐어요. 지금 말씀한 것처럼 심플하게 희망이 느껴지는 엔딩입니다. 미사키는 가후쿠가 타던 차에 타고, 거기에 강아지가 있다. 그거면 충분하지 않나 생각하며 영화를 찍었습니다. 윤수(진대연)와 유나의 강아지라고 말씀들 하시는데 사실은 다른 강아지입니다. 제훈씨 말처럼 관객에게 희망이나 해방감, 새로운 무언가 앞으로도 계속되어간다는 메시지가 전해지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그 장면을 한국에서 찍은 이유를 말씀드리면, 원래 미사키가 고향인 홋카이도로 돌아가는 시나리오가 있었어요. 하지만 같은 장소로 돌아가면 재미없을 것 같아 전혀 다른 곳을 생각했습니다. 영화를 처음 기획할 당시 가후쿠와 미사키가 만나는 히로시마 장면을 부산에서 찍으려고 했습니다. 실제로 준비한 기억도 있고요. 그래서 엔딩을 한국에서 찍으면 완전히 새로운 인생을 시작한다는 표현이 되지 않을까 했습니다.

이제훈 직접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님의 얼굴을 뵙고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이 시간이 아직도 믿기지 않고 정말 행복합니다. 앞으로도 좋은 작품으로 한국에 많이 오셨으면 좋겠고 계속 좋은 작품 많이 만들어주셨으면 좋겠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하마구치 류스케 <드라이브 마이 카>를 깊게 봐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드라이브 마이 카>를 보는 여러 가지 방식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제훈씨의 질문을 통해서 느끼셨을 거라 생각합니다. 일본에서도 개봉했던 제훈씨의 영화 <건축학개론>과 <박열>을 보고 오늘 대담에 임했는데요. <건축학개론>에서는 지금 말씀을 나눈 것처럼 섬세한 청년이란 느낌을, <박열>에서는 난폭함과 상냥함을 겸비한, 일본말로 표현하면 ‘호방뇌락’한 느낌이었습니다. 대화를 나누며 두 역할을 같은 사람이 연기했다는 게 믿을 수 없다는 느낌으로 제훈씨를 바라봤습니다. 정말이지 박열과는 다른 느낌이네요. 배우로서 제훈씨를 만날 수 있어 좋았습니다. 다음에도 작품에서 뵙길 기대하겠습니다.

이제훈 저는 오늘 성공한 ‘덕후’입니다. (일본어로) 혼토니 아리가토 고자이마스!

하마구치 류스케 (한국어로) 진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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