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퀄도 프리퀄도 아니다. 2022년 7월에 개봉했던 <외계+인> 1부의 다음 행보는 1월10일 개봉할 <외계+인> 2부다. 387일이란 한국영화 사상 최장 프로덕션을 거쳤다거나 내로라하는 배우들이 집합했다는 표면적 사실을 제외하고도 <외계+인> 시리즈의 몸집은 2부가 필요했을 만큼 거대하다. <타짜> <도둑들> <전우치>를 연출한 최동훈 감독의 첫 연작으로서 리드미컬한 코미디, 자유분방한 캐릭터 서사, 능청맞은 액션 활극과 같은 그의 장기를 모조리 모아서 시간을 초월하는 동서양 혼합 판타지라는 외양에 집어넣었다. 내용, 형식, 시공간적 배경, 그리고 영화의 색다른 제작·공개 방식까지 <외계+인>의 새로운 시도는 한국영화계의 새로운 해석을 요구했다. 이에 김소희 영화평론가는 <외계+인> 1부와 2부를 본편과 속편이 아닌 “상호 보완의 관계”로 분석했다. 단지 1부에서 이어지는 이야기가 아닌 1부와 함께 교차하는 이야기로서 “선형적 시간의 틀을 깨트리는 교란점”을 발생시켰고, 나아가 영화 보기의 적극적인 방식을 유도한 것이다. 영화 속 신검의 기능이, 이것을 누가 쓰는지에 달려 있듯 <외계+인> 2부를 보는 일 역시 누구의 시점인지에 따라 달라질 수 있었다.
둘로 나뉜 초유의 영화. <외계+인> 2부가 공개됐다. 1부가 손익분기점에 한참 못 미치는 154만여 관객을 모은 데 그친 지금, ‘마침내 모든 비밀이 밝혀진다’는 흔한 홍보문구가 다른 의미로 눈에 밟힌다. 궁금증이나 기대가 크지 않은 상황에서 예정된 마술쇼의 막이 올랐고, 관객은 다시 마술에 대한 사랑을 회복할 수 있을까. 뚜껑을 열고 보니 영화가 마련한 카드는 돌아선 관객을 되돌릴 만한 휘황한 반전이 아니라 그러거나 말거나 예정된 길을 향해가는 뚝심이다. <외계+인> 2부가 예상보다 비장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외계 세력에 맞서 세상을 구한다는 사뭇 진지한 목적에 있는 것이 아니라 1부의 흥행 실패가 부여한 예상외의 아우라 때문이다.
영화가 1, 2부로 나뉜 이유는 본편과 속편이 아니라 상호보완 관계이기 때문이다. 2부의 시점은 1부의 시점 이후의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생략됐던 다른 시점에서 파생하는 동시적 이야기이기도 하다. 수상한 이웃이었던 민개인(이하늬)의 시점과 새롭게 부상한 인물인 능파(진선규)가 각각 현대와 고려를 보는 주요 시점을 추가하며 이미 드러난 사실을 다른 각도에서 마주하게 한다. 그 과정에서 스친 인물이나 상황이 확대되며 이미 안다고 생각했던 세부를 돋보기로 들여다보는 재미를 준다. 1부에서 관객은 새로운 캐릭터와 상황들을 주입받았다면, 2부에서는 1부에서 쥔 패를 바탕으로 기억을 더듬는, 적극적인 관람이 요구된다. (물론 영화는 1부를 보지 않은 관객 역시 무리 없이 따라갈 수 있을 정도로 이야기를 친절히 반복한다.) 무륵(류준열)을 비롯해 극 중 인물들이 기억을 되살리는 행위는 영화를 보며 기억을 되살려야 할 관객들 행위에 대한 앞선 모사이자 공명이다.
1부에서 몇 가지 미결된 문제가 있었다. 그 핵심에는 가드(김우빈)와 문도석(소지섭)의 생사가 명확하게 드러나지 않았다는 데 있다. 가드는 설계자와의 대결 도중 팔이 뜯겨 나갈 정도의 심각한 사고를 당했으나 완전히 소멸하지는 않았다. 문도석의 몸을 입은 설계자는 플래시백 속에서 어린 무륵을 새로운 숙주로 삼으려 했으나 결과가 명확히 드러나진 않았다. 설계자를 받아들인 인간의 파괴력은 문도석이 증명한 바 있다. 과연 무륵의 몸에 설계자가 들어온 것이 맞는지, 그렇다면 설계자의 운반체가 된 인간이 그 파괴력을 다스릴 수 있을지가 2부에서 주목할 요소다.
액션과 비액션
신검에는 두 가지 쓰임이 있다. 외계 죄수의 탈옥을 실행하는 도구이거나 시간을 오가는 도구다. 신검은 누구에 의해 쓰이는가가 중요한 물건이며, 쓰이기보다는 쓰이지 않도록 관리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에 따라 주요 액션 시퀀스 역시 액션과 반액션, 즉 창과 방패의 대결로 표현된다. 이안(김태리)이 현상금을 노리며 접근한 자객의 칼에 맞서 칼집으로 싸우는 시퀀스가 대표적이다. 자객이 칼집에서 칼을 뽑으려 하자, 이안은 뽑지 못하게 제어하는 방식으로 대응한다. 크게 보면 흡사 자객이 자기 칼조차 뽑지 못해 전전긍긍하는 모양새다. 칼이 칼집에 들어갔다가 나오기를 반복하는 액션은 눈속임 마술처럼 관객의 혼을 빼놓는다. 칼을 휘두르는 것보다 칼을 칼집에서 꺼내기까지의 과정을 무한 재생하는 방식은 그 자체로 경제적이면서도 재미와 사유를 동시에 챙긴다.
무륵 안에 요괴가 들어갔을 확률이 높다는 것을 알게 된 두 신선 흑설(염정아)과 청운(조우진)이 무륵을 죽일지 살릴지를 두고 한참 고민하는 모습에도 액션보다 큰 액션에 관한 생각을 보여준다. 죽이자고 결심한 뒤에도 ‘나는 폭력은 싫다’며 서로 미루거나 맨정신으로는 안된다며 곯아떨어질 때까지 술을 마시는 등 액션에 대한 무한한 지연을 표시한다. 두 신선은 하나의 몸에서 필연적으로 생겨나는 두 마음을 형상화한 존재처럼 보인다. 둘은 실행과 비실행 사이의 시간을 수다로 메우며, 칼의 시간을 말의 시간으로 표출하고 해소한다.
1부의 액션에서 외계 죄수의 촉수가 상징적으로 보여주듯 손을 뻗어 누군가를 공격하는 동작에 포커스가 맞춰졌다면, 2부에서는 가드의 손이 그랬듯 액션을 제지하는 반액션으로서의 손의 동작에 좀더 주목하게 된다. 행위 속에 반성을 집어넣는 경향은 최근 한국영화에서 발견되는 경향이기도 한데, <외계+인>에서는 인간의 몸속에 들어온 외계 생명체라는 설정을 통해 액션의 방향이 자기 안으로 폐쇄된 경향이 짙다는 것이 특징이다. 물론 인간의 몸을 조종하는 원인은 내부에만 있지 않다. 고려는 부적이나 도술로 누군가를 움직이지 못하게 마비시키거나 제멋대로 움직이게 만들 수 있는 시대로 묘사된다. 1부의 도술은 주로 마비시키는 데 목적을 두었다면, 2부에는 반대로 통제되지 않은 움직임을 풀어헤치는 데 초점을 둔다.
도술에 의한 액션은 현대에 이르러 기계에 의한 액션으로 풀이된다. 이안과 무륵을 따라 시간의 막을 통과한 흑설과 청운이 불시착한 곳은 공교롭게도 서울의 헬스장이다. 이들은 러닝머신에 달린 모니터 속 뉴스 화면에서 요괴를 발견하고는 이를 처치하기 위해 스스로 러닝머신에 오른다. 엉겁결에 멈출 수 없는 자신과 싸움을 시작한 두 신선의 모습은 주제의 요약이자 자기 패러디다. 자기와의 싸움에 몰두하는 현대의 인간들은 적어도 이론상으로는 불분명한 허깨비와의 싸움에 더 공감하기 마련이다.
복제와 아바타
모니터를 부수면 기계 부품이 나올 뿐 그 속에는 아무것도 없다. 요괴를 내포하고 있지만, 요괴는 아닌 기계는 영화가 인간을 보는 관점을 드러낸다. “내 안에 요괴가 있으면 나는 뭐지?”라는 무륵의 질문에 이안은 “너는 그냥 너야”라고 말해준다. 외계 생명체는 특수한 조건을 제외하고 평소에는 존재를 드러내지 않고 인간 속에 숨어 산다. 그 인간이 악하거나 선하기에 선택되는 것도 아니다. 인간은 넓은 관점에서 보면 인간성을 운반하는 하나의 운반체일 뿐이다.자문하는 인간의 반대편에는 복제 기술이 있다. 복제는 흑설과 청운이 소유한 부적의 신묘한 기술 중 하나다. 복제 역시 그 자체로 좋거나 나쁜 것일 수는 없고, 신검처럼 누구의 손에 쥐어지는가에 따라 달라지는 기술이다. 영화 속에서는 복제가 인간을 대체하는 것일 수는 없지만, 누군가를 기억하는 기술일 수 있다고 설득한다. 외계 생명체에 의해 잠식된 상황에 맞선 인간의 반격은 끊임없이 기억을 되살리는 데 있다. 기억을 봉인하는 하나의 방편에는 사진이 있다. 어린 이안은 아빠라고 믿고 자란 가드와 함께 찍은 사진을 간직한다. 이 사진을 바라보는 시선에는 그리움이나 애틋함의 감정이 없다. 다만 사진은 무언가를 기억한다. 영화는 불확실한 감정보다 기억 기술에 더 많은 기대를 건다.
외계 존재는 많은 크리처가 그렇듯 인간의 방만과 이기심에 의해 파생된 재난의 형상화가 아니라 원인 없는 결과이자, 생존하고자 하는 욕망 에너지에 가깝다. 영화가 확장된 자신과의 싸움처럼 보이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욕망은 인간을 도구로 썼지만, 반대로 허깨비처럼 보이는 인간을 움직이게 하는 도구는 욕망이기도 하다. 그 에너지가 바깥에서 비롯되었든 안에서 비롯되었든 크게 상관없다. 가드의 잔존 에너지는 급속도로 줄어드는 한이 있어도 완전한 0에 도달하지는 않았다. 시간을 쪼개는 와중에 영화가 남긴 것은 소멸할 수 없는 잔존 에너지다.
영화의 시간술
고려 말과 현재를 오가는 타임라인을 들여다보면 선형적 시간의 틀을 깨뜨리는 교란점이 발견된다. 가드와 썬더(김우빈)가 1380년에 갓난아기였던 이안을 632년 후인 2012년으로 데려온다. 그로부터 10년 뒤인 2022년 초등학생이 된 이안과 다시 고려 시대로 돌아가는데, 계산상 고려 시대 역시 현재와 동일하게 시간이 흘렀을 거라고 추정되지만, 하늘이 열린 광경이 관측된 것은 고려의 현재인 그로부터 불과 1년 뒤인 1381년이다. 고려 시대를 기준으로 보면 1380년에 갓난아기였던 이안이 1년 만에 초등학생으로 성장한 셈이 된다.
“시간은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동시에 존재해.” 썬더가 말한 시간론을 중심으로 돌아보면 가드와 썬더의 타임머신은 어느 시간대든 파고들 수 있다. 현재의 시간에서 10년이 지났다고 해서 10년 이후의 과거를 방문할 필요는 없다. 1381년은 물론 더 먼 과거와 접속하는 것도 가능하다. 영화의 시간 설정은 현재의 시간에 맞춰 과거의 시간이 나란히 흐르고 있을 것이라는 습관적인 사고의 틀을 깰 것을 요청한다.
한편 이러한 설명도 가능하다. 과거와 미래 사이, 시간의 상대성을 10년이 흐를 동안 1년이 흐르는 상이한 타임라인으로 표시된다. 미래가 그리는 현대사회가 모든 것이 바쁘게 돌아가는 속도전으로 요약된다면, 과거의 시간은 오늘날에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슬로모션이다. 1부에서 10년, 630년처럼 시간을 점프하는 보폭이 컸다면, 2부에서의 시간은 하바 폭발을 앞두고 분초를 다투는 상황으로 타이트하게 축약된다. 현대의 긴박한 호흡은 시간의 길이가 무한정 늘어나는 고려를 무대로 이완되며 호흡을 가다듬고 충분한 준비 태세를 갖춘다.
<외계+인>에는 고려로 돌아간 이안이 성인으로 성장하기까지의 시간이 생략되어 있다. 비슷한 또래인 무륵의 성장 역시 마찬가지다. 그러다 성장에 관한 인식 역시 시간이 선형적으로 흐른다고 인식한 결과임을 깨닫게 된다. 성장은 차라리 흑설의 거울을 통과하는 과정과 흡사할 것이다. 거울을 통과한 사물이 증폭되듯, 시간의 막을 통과한 인간은 다른 존재로 점프한다. 영화의 시간술은 인간은 시간의 결과물이자 이미 하나의 세계임을 인식시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