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올라, 담레이, 하이쿠이, 이른바 ‘트리플 태풍’이 몰려오면서, 아직 비가 쏟아지진 않지만 흐리고 후텁지근한 2023년 8월29일. 서울 중구의 남산 드라마센터 내 차려진 <무성영화> 2회차 현장은 덥고 습했다. 20여명의 스탭이 <나이트호크>에 영감을 받은, 통유리된 창문 하나 없는 식당으로 꾸며진 세트에서 카메라와 붐 마이크를 들고 촬영에 집중하고 있었다. 어니스트 헤밍웨이 단편소설 <살인자들>의 “이전에 술집이었던 곳을 식당으로 개조”했다는 문장에서 착안해 화가 에드워드 호퍼가 그린 이미지를 이명세 감독이 영화로 옮겨왔다. 천장엔 만국기가 걸려 있고 벽면은 샛노랗게 칠해진 화려한 세트의 복병은 통유리였다. 자칫 유리에 실루엣이 반사될 수 있어 이명세 감독이 기합 같은 “액션!”을 외치면 20명이 일제히 바 아래로 몸을 감추고 숨을 죽여야 했다. 이명세 감독도 카메라 옆에 바짝 붙어 있다가 바 아래로 몸을 숨기고 있었다. 거리를 두고 모니터와 무전기를 이용해 배우들에게 주문하는 디지털 시대 연출자들과 다르게 이명세 감독은 필름 시절 몸에 밴 대로 늘 카메라 가까이였다.
이명세 감독이 단편 <그대 없이는 못 살아> 이후 약 6년 만에 연출하는 <무성영화>는 옴니버스영화 <더 킬러스>(가제)의 일환이다. 이명세 감독이 총괄 크리에이터를 맡고 장항준, 김종관, 노덕, 조성환, 윤유경 감독이 참여해 각자 다양한 상상력을 펼쳤다. 청부살인업자가 타깃을 없애기 위해 한 식당을 찾는 소설 <살인자들>을 근간에 두되 6명의 감독이 시나리오를 따로 집필했다. 다만 작품마다 배우 심은경이 등장해 유기적인 흐름이 생겨나도록 조율하는 과정이 있었다.
“노덕 감독의 <업자들> 촬영은 이미 마쳤어요.” 단발머리에 신발 끈을 질끈 묶은 심은경이 말했다. <무성영화>에서 그가 맡은 역은 식당 종업원 ‘선샤인’으로, 예사롭지 않은 물방울무늬 셔츠에 파란 치마를 입고 은빛 운동화를 신었다. “선샤인은 반항기가 있는 캐릭터고, 쉽게 굴하지 않고 겁도 없어요”라고 그는 소개했다. 선샤인과 함께 일하는 식당 주인 ‘스마일’은 하와이안 셔츠에 흰 줄무늬 바지를 입고 뿔테 안경을 낀 배우 고창석이 연기했다. “순박한 캐릭터예요. 감독님께 여쭤보니 ‘웃지 않아서 스마일이라고 이름 지었다’고 하더라고요.” 스마일이란 이름의 아이러니는 주방장 ‘보이스’에게도 이어진다. 배우 김금순이 연기한 보이스는 “말을 할 수 있지만 말 대신 쉬운 손짓으로 의사를 표현하는 인물”이다. 각자 개성 넘치는 의상을 입었지만 나란히 서 있는 모습이 그럴싸하게 어울리는 세 캐릭터는 이날 식당을 찾아온 킬러들에게 각기 다른 반응을 보였다.
킬러 ‘종세’와 ‘도석’은 배우 곽민규와 이재균이 맡았다. 곽민규의 설명에 따르면 “초반에 위협적으로 보이는 두 킬러는 극이 진행될수록 ‘덤 앤 더머’처럼 변하는” 인물들로, 특히 종세는 “초반에는 여유롭고 우아하게 행동하지만 극 후반부로 갈수록 평정심을 잃는다”. 함께 킬러로 분한 이재균은 자신의 캐릭터를 “지루한 걸 참지 못하는 다혈질”이라고 묘사했다. 웨스턴 사나이처럼 징이 달린 부츠를 화려하게 신은 도석과 회색 페도라를 쓴 침착하지만 서늘한 종세가 등장하면서 이날 촬영한 <무성영화>의 45신과 46신의 혼란이 시작됐다.
배우처럼 감독처럼
망치로 위협하는 장면을 직접 시연하는 이명세 감독. 촬영 들어가기 전에도 이명세 감독은 리허설을 여러 번 진행하며 작품에 대해 세심하게 설명했다. 심은경은 “감독님이 벽을 쉽게 허물었어요. 백지상태로 행동 리허설, 대사 리딩에 참여하면 감독님이 장면 하나하나를 디테일하게 설명하셨어요”라고 회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