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리포트]
[obituary] 한국적 리얼리즘의 거목, 별이 되다, ‘용호대련’ ‘피막’ 이두용 감독 부고
2024-01-26
글 : 이지현 (영화평론가)
사진 : 오계옥

2024년 1월19일, 폐암 투병 중이던 이두용 감독이 82살로 세상을 떠났다. 빈틈없는 균형감을 지닌 그의 필모그래피, 60여편에 달하는 빼곡한 영화의 목록을 되돌아보고자 한다. 근대 한국영화사에서 이두용의 위상은 한마디로 이형적이었다. 이를테면 <용호대련>(1974)의 대중적인 성공 이후에도 그는 액션영화에만 머물지 않았고, <피막>(1980)과 같은 시대극으로 세계에서 인정받았지만 그는 새로운 성향의 리얼리즘 드라마를 향해 곧장 이동했다. 1970년대부터 1990년대까지 시대적 요구와 한계를 가로지르며 이두용은 쉴 새 없이 달렸다. 냉소적이고도 명민했던 그의 낭만성, 대중과 시스템 사이에서 고민하던 이두용의 작품 세계를 생각한다.

1941년 서울 태생, 이두용은 고교 졸업 후 1960년대에 연출부 일을 시작하며 영화계에 첫발을 들였다. 이후 동국대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오랜 도제식 수업을 거쳐 마침내 데뷔작 <잃어버린 면사포>(1970)를 완성했다. 이 영화는 스승이나 다름없던 정소영 감독의 색채를 그대로 이어받은 신파적 성향의 드라마로, 이후에 그는 조금씩 자신의 톤을 찾아갔다.

새 시대를 연 창작자

초기의 멜로드라마적 성향에서 태권도 무협영화로 탈바꿈한 것은 시대적 영향이 컸다. 당시는 이소룡 등 중화권 액션 스타들의 활약이 유행하던 시기로 이두용은 재미교포 한용철을 주인공으로 기용해 만주 웨스턴의 분위기를 띠는 새로운 액션영화들을 선보였다. 이때 만든 영화가 <용호대련>을 비롯한 <죽엄의 다리>(1974)와 <돌아온 외다리>(1974) 등 스피디한 템포의 액션영화들이다. 훗날 해외영화제의 회고전에 참석한 감독은 “돈이 필요했는데 그게 당시의 대세였다. 그래야 나중에 제작진에도 자신감을 주고 내가 정말 좋아하는 영화를 만들 수 있을 거라 스스로 다짐하기도 했다”고 설명한 적 있다. 척박한 상황에서도 장인적인 영감이 창작의 동력이 됐다.

사실 이두용의 영화는 장르가 무엇이든 승자의 쾌감보다는 낙오자들을 둘러싼 비정감에 좀더 무게를 둔다. 영화감독 박찬욱이 언급하면서 더 유명해진 <최후의 증인>(1980)도 마찬가지다. 강한 액션의 움직임, 거기에 미스터리한 사건의 과정이 더해지며 드라마는 클라이맥스로 치닫는다. 여기에 검열에 의해 잘려나간 한 시간여의 원본 필름 사건이 그를 자극했다. 참고로 <최후의 증인>의 원본은 오랜 기간 사라졌다가 2006년 158분의 네거티브필름이 발견되면서 2016년 4K 화질로 복원되었다. 아무튼 <최후의 증인>이 편집되면서 그는 시대극 <피막>의 방향으로 눈을 돌렸고, 이 작품이 1981년 베니스국제영화제에서 특별상을 수상하면서 그에게 새 시대가 열렸다. 이후 1984년 칸영화제가 그의 신작 <여인잔혹사 물레야 물레야>(1983)를 한국영화 최초로 ‘주목할 만한 시선’ 부문에 초대하면서 그의 예술성은 세계적으로 인정받는다.

현실 속에서 꽃피운 예술

분명히 1980년대는 이두용의 전성기였다. 당대에 완성된 시대극은 이국적이거나 토속적인 분위기에 한정되지 않았다. 단지 민족 지향적인 관점에만 매몰되지도 않았다. ‘한’이나 ‘무속’과 같은 지역적인 관습을 그는 보편적인 투쟁의 요소로 활용했다. 무당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이유에 대해 감독은 “샤먼만이 한 클래스에서 다른 클래스로 쉽게 이동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경계의 인물들이 시스템의 여백을 겨냥한다는 이러한 설정은 이후 여러 작품에서 다시금 드러난다. 왕이나 벼슬아치가 아닌 내시를 주인공으로 내세우는 영화 <내시>(1986)가 그렇고, 대기업 입사를 포기하고 순경이 되기를 택하는 주인공의 이야기 <경찰관>(1979)도 마찬가지로 살필 수 있다. 삶과 죽음의 간극, 인간과 신의 연결고리, 성별의 미묘한 차이들, 계급간의 격차가 향후 그의 영화가 보이는 진정한 주제로 자리 잡는다.

그리고 약간의 미스터리함과 부도덕의 사실성이 1980년대 후반의 작품들에서 감지된다. <장남>(1985)과 <청송으로 가는 길>(1990)이 대표적이다. 언뜻 이들 작품은 전개 과정에서 장르적 보편성을 따르는 듯 보이지만, 세부적인 내러티브는 상상 이상으로 그로테스크하다. 특히 결말 부분이 그렇다. <장남>의 전개에 관해 감독은 “한국에는 사회보장 혜택이 없었고, 장남이 자신의 책임을 다하지 않으면 부모는 노년기에 매우 궁핍해졌다”는 대답과 함께 영화의 마지막이 시스템의 허점을 통해 강조된다는 점을 밝힌 바 있다. 돌이켜보면 <장남>의 마지막 이미지는 그 자체로 쇠퇴와 연결된다. 배우 신성일이 연기하는 주인공은 그토록 회피하려던 어머니의 최후와 마주치고 울부짖는다. 아파트 고층에서 끈에 묶여 내려오는 고인의 관, 비록 인물의 잘못은 아니지만 사회는 그를 끝까지 추궁할 것이다. <청송으로 가는 길>의 마지막 장면도 상황은 다르지 않다. 그토록 닿지 않으려 했던 청송교도소에 주인공은 소원처럼 도달하지 못한다. 대신 조금 더 따스한 군산교도소 한편에서 두루마리 휴지를 옆에 두고 그는 세상을 떠난다. 역설적이게도 존재의 파토스가 희극이 되어서 영화의 마지막과 만난다. 우여곡절의 시간이 지났지만 그 누구도 상황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했다. 우리 모두는 숙명을 그저 말없이 받아들일 따름이다.

아무리 환상적이거나 토속적인 소재를 다루더라도 이두용의 영화는 불가능한 가설을 내세우지 않는다. 이것은 그가 선보인 사실주의 드라마의 한계일 수도 있지만, 동시에 장점으로 작동한다. 소설이 아니라 영화만이 닿을 수 있는 시대적인 공기가 스크린의 너머에서 감지된다. 우리 사회의 저속함, 마침내 구체화되는 경계 속의 인물들이 거울에서 제각각의 움직임을 보인다. 그렇게 관객의 머릿속에서 지워졌던 망각이 되살아난다. 우리는 무엇을 할 것인가, 혹은 그저 바라만 보기로 하고 멈출 것인가. 그의 데카당스가 지향하는 종말의 순간은 끝까지 순종적이지 않다. 신비화의 해체를 통해 마주하는 운명의 본질, 이러한 기질은 한국적 리얼리즘의 뿌리가 되어 스크린에 박힌다. 그가 봉인한 영화의 초연한 운명을 떠올린다. 우리 시대에도 여전히 유령이 되어 떠도는 영화 속의 인물들, 아마도 그들은 계속해서 한을 노래할 것이다. 건조하게 그리고 어울리지 않게 담대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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