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네21 리뷰]
[리뷰] ‘아녜스 V에 의한 제인 B’, 아녜스와 제인, 두 예술가의 삶과 영화에 대한 사유
2024-01-31
글 : 박정원 (영화평론가)

지난해 여름 별세한 시대의 아이콘 제인 버킨의 삶과 업을 다루는 영화라는 점에서 <아녜스 V에 의한 제인 B>를 선택한 이에겐 예상과 다소 다른 결과물이 펼쳐질지도 모른다. 제인 버킨의 생과 커리어를 연대기적으로 훑는 아카이브 푸티지나 관계자들의 정갈한 인터뷰 등은 찾아보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영화의 진정한 매력은 영화가 상투적이고 심심한 전기 다큐멘터리가 아니라, 감독의 무궁한 상상력과 배우의 무진한 가능성이 만난 협업의 결과인 동시에, 다큐멘터리와 픽션의 경계에 서 있는 독특한 자화상이라는 점에서 비롯된다.“촬영되는 거, 본인에 대해 말하는 거 좋아해요?”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해요.” (중략) “이 영화 할 거죠?” “네, 대장님!” 60대의 감독 아녜스 바르다는 40살 생일을 앞두고 알 수 없는 불안감에 휩싸인 배우 제인 버킨을 마주한다. 그들은 진솔한 담소를 나누고, 바르다의 질문과 버킨의 대답이 이어진다. 버킨의 삶, 감정, 기억, 생각이 그의 독백, (대개 명화) 패러디 그리고 즉흥적 역할극을 통해 모종의 농담 혹은 몽상처럼 펼쳐진다. 영화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진다. 배우, 가수, 모델, 예술가들의 뮤즈, 세 아이의 엄마, 그리고 여성인 제인 버킨은 과연 누구인가? 영화라는 매체는 그것을 어떻게 보여줄 수 있는가?

영화는 감독과 배우 사이를 잇는 카메라로 배우의 무대 뒤편 맨얼굴을 억지로 들여다보려는 대신 겹겹이 이어지는 즉흥적 역할극의 연쇄를 통해 배우로서 카메라에 찍힌다는 것의 의미와 스타로서 대중에게 회자되는 이미지의 허구적 속성을 드러낸다. 버킨은 세르주 갱스부르, 장피에르 레오와 역할연기를 하다가 대뜸 무성영화 시대의 코미디 듀오를 패러디하고, 스페인 무희, 신화 속 아리아드네, 타잔의 파트너 제인, 서부극 속 칼라미티 제인, 화형 당하는 잔다르크가 된다. 이같은 허구성의 환상은 역설적으로 제인 버킨이라는 영원한 미지의 인물에게 다가가는 예기치 못한 통로가 되고, 관객은 그같은 통로를 통해 ‘아녜스에 의한 제인’을 만나는 동시에 ‘제인에 의한 아녜스’ 또한 발견하게 된다. “아녜스와의 작업에서 중요한 건 카메라 뒤의 시선이고, 붓을 들고 있는 사람이죠.” 영화 초반부 제인의 말이 예견하듯 한편의 영화 안에 궁극적으로 두 여성 예술가의 초상이 담겨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이 영화를 만들던 시기, 바르다와 버킨은 버킨의 아이디어를 바탕으로 40살을 앞둔 여성과 14살 소년의 관계를 그린 영화 <아무도 모르게>도 제작했는데, 영화의 일부 장면이 <아녜스 V에 의한 제인 B>에 삽입되며 메타 영화로서의 존재감을 드러내기도 한다. 버킨의 둘째 딸이자 배우 겸 가수인 샤를로트 갱스부르가 <아무도 모르게>에서도 제인의 딸로 등장하며, 아녜스 바르다의 아들 마티외 드미가 주인공 소년을 연기한다.

"꽃을 많이 받아도 많이 외로울 수 있죠, 무덤처럼.”

가족들과 친구들에게 꽃을 많이 받냐는 아녜스 바르다의 질문에 대한 제인 버킨의 대답. 흰 꽃을 좋아해 백합을 많이 받는다는 말을 덧붙이는 버킨의 표정은 이후 “투명한 사람으로 찍혔으면 해요.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보통 사람처럼 말이죠”라는 솔직한 고백을 내뱉는 순간의 표정과 공명한다.

CHECK POINT

<누구의 딸도 아닌 해원> 감독 홍상수, 2012

한국을 배경으로 제인 버킨을 만나보고 싶다면 그가 카메오로 출연한 <누구의 딸도 아닌 해원>이 유일한 선택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비록 짧은 순간 등장했다 사라지지만 그가 영화에 남기고 간 흔적은 꿈결처럼 아름답다. 제인의 딸 샤를로트 갱스부르의 연출 데뷔작 <샤를로트에 의한 제인>(2021)의 국내 개봉을 기다리며, ‘모녀’의 어떤 풍경을 감각하는 시간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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