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2]
[인터뷰] 서로의 마음에 기대기, <세기말의 사랑> 이유영
2024-02-01
글 : 이자연
사진 : 최성열

짝사랑에 눈이 멀어 횡령에 가담한 경리 김 과장. 세기말처럼 우울하고 칙칙한 여자. 영미를 가리키는 영화 속 말들은 채도 낮은 그림자처럼 쓸쓸하게 비친다. 하지만 영미의 진짜 성격이 드러나기 시작한 건 착해빠진 영미가 교도소에 다녀온 뒤부터다. 흑백에서 풀컬러로 화면이 전환되는 순간, 선명한 분홍색 운동화와 난색 계열의 스웨터는 관객이 이제부터 영미를 종잡을 수 없을 거라는 일종의 신호탄 역할을 한다. 사실 배우 이유영이 시나리오에서 영미를 처음 만났을 때 삶에 애면글면하는 그의 모습을 단번에 공감했던 건 아니다. “짝사랑한 남자의 와이프를 만나는데 자존심 없어 보이는 바보 같은 모습이 한편으로 답답했다. 그런데 영미는 자신이 무엇을 돌파해야 하는지 정확히 아는 인물이다.”

영미에게 삶은 가혹하다. 직계가족이 아닌 큰어머니를 그의 자식을 대신해 돌봄노동하기도 하고, 짝사랑하는 구도영 기사(노재원)의 미수금을 대리 수납하기 위해 아르바이트를 늘리기도 한다. 누구도 자신을 지켜주지 않는 세상에서 영미 자신마저 스스로를 방치한다. 하지만 그것이 곧 영미의 유약함으로 직결되지 않는 이유는 그가 조용할지언정 표현할 건 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영화에서 영미다움이 가장 잘 드러나는 장면은 사람들의 수군거림 속에 구내식당에 들어섰을 때 영미가 이를 드러내던 순간이다. 영미의 복수는 이런 식이다. 불만을 그냥 넘어가는 법은 없지만 또 그렇다고 노골적이지 않은 방법으로 감정을 드러낸다. 임선애 감독님과도 이 장면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영미 안에 놓인 대범함과 단단함, 당하고만 살지 않을 거라는 의지가 잘 드러난다.”

다소 단조로웠던 영미의 삶이 변화하기 시작한 건 독설적이고 자기방어적인 유진(임선우)을 만나면서다. 짝사랑 대상의 아내인 그는 얼굴 아래가 전부 전신마비인 장애인으로, 거동이 불편하지만 어떤 상황에도 쉽게 주눅들지 않는다. 차별에 맞서 싸우고 쉽게 화내고 툭하면 명령하고. 장애인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기존 영화에서 흔히 볼 수 없던 유진의 캐릭터 설정은 영미와 함께 박자를 맞추면서 둘의 화학작용을 끌어올린다. 유진과 영미. 전혀 달라 보이는 두 사람의 연결은 영화적으로 어떤 의미를 지닐까. “유진은 겉으로 강한 척하지만 연약하다. 유진의 진짜 마음을 알아챈 영미는 그를 향해 연민하는 감정도 들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 관계가 그렇게 단편적이지만은 않다. 두 여자는 서로에게 없는 것을 기민하게 알아차리고 서로의 결핍을 채워나간다. 경계하기 바빴던 관계가 시나브로 서로를 의지하게 되는 모습은 이 둘만이 만들어낼 수 있는 성장이다.”

관련 영화

관련 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