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장이 뜨거운 여자.” 임선우 배우는 유진을 이렇게 정의했다. 영화의 배경이 1999년에서 2000년으로 바뀌고 도영(노재원)의 공금횡령금을 대신 채운 영미(이유영)가 형을 살고 나왔을 때, 유진은 자신을 도영의 아내라 소개하며 영미 앞에 모습을 드러낸다. “과거 사진에서 알 수 있듯 유진은 본래부터 얌전히 살던 사람은 아니다. (웃음) 20살 넘어 근육병으로 장애를 갖게 됐지만, 필요할 땐 자기주장을 확실히 한다. 남편의 내연녀라 여긴 영미를 숨어서 살피는 대신 자신을 당당히 내보이며 대면하는, 용감하고 멋진 여자다.” <세기말의 사랑> 촬영에 들어가기 전 임선우에게 주어진 시간은 한달 남짓이었다. 몸을 움직일 수 없는 유진은 모든 것을 말로 처리해야 했고 그만큼 대사량도 많았다. “연기해본 적 없는 유형의 인물이지만 배우로서 욕심이 났다. 처음 시나리오를 읽었을 때 딱딱한 겉껍질로 자신을 둘러싸고 있다 시간이 갈수록 맨얼굴을 드러내는 것처럼 느껴졌다. 이러한 감정 변화의 표현에 중점을 둬야겠다고 생각했다.” 작품을 준비하며 임선애 감독의 이모도 만났다. “근육병을 앓고 계신 터라 그동안 겪어온 일들에 관해 상세히 들려주셨다. 내가 감히 상상할 수 없는 삶이었다. 그럼에도 활기가 넘치셔서 좋은 영향을 많이 받았다.” 오랜 시간 몸을 완전히 고정시킨 채 연기하느라 나중에 몸에 무리가 와 재활 치료까지 받아야 했다고. “말하기 불편한 자세였지만, 유진은 대사가 중요한 캐릭터라 심혈을 기울일 수밖에 없었다.” 공금횡령으로 형을 살게 된 도영과 화상으로 접견하는 신은 가장 공을 들였다. “이 신을 향해 달려왔다고 생각했고 그만큼 부담감도 컸다. 유진은 벽을 단단하게 두른 인물이긴 하나 모든 상황에서 그렇게 행동하진 않는다. 영미와의 관계에서도 점점 벽이 허물어지고, 도영 앞에선 아무런 방어막 없이 완전히 속마음을 꺼내 보인다. 그래서 집중력을 최대한으로 끌어올려 한 테이크로 찍었다.”
방어벽을 완전히 해제한 유진은 사랑하는 사람에게 아낌없이 자신을 내어주는 사람이다. “뭔가를 받으려는 욕구가 있었다면 그렇게 못했을 거다. 어떤 면에서 유진은 일반적으로 떠올리는 사랑의 관계를 제대로 충족시킬 수 없는 사람처럼 보일 수 있다. 하지만 본인은 남의 시선에 맞춰 스스로를 낮추지 않았던 것 같다. 자신도 나눠줄 수 있는 것이 있다고 여기는 단단한 사람이었기에 그런 사랑의 태도도 가능했던 것이다.” “적당히 연기해선 절대 표현할 수 없”었던 유진을 위해 임선우는 자신의 모든 것을 털어내야 했다고 회고한다. “촬영하면서도 내게 중요한 작품으로 남을 거라 여길 만큼 여운이 깊은 소중한 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