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쟁 영화들이 속속 면모를 드러내면서 일찌감치 그해의 복병으로 평가받았던 <추락의 해부>가 마침내 2023 칸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거머쥐었을 때, 즉각 <피아노>(제인 캠피언), <티탄>(쥘리아 뒤쿠르노), 그리고 <추락의 해부>를 연대순으로 짚어보는 이들도 적지 않았을 것이다. 2013년 <에이지 오브 패닉>으로 칸 ACID에 입성한 지 10년 만에 쥐스틴 트리에는 자국의 가장 칭송받는 레드카펫에서 역대 세 번째 여성감독의 황금종려상이라는 영예를 안았다. 학생 시위와 대통령선거 중에 찍은 단편영화들로 커리어를 시작했다는 점에서 은근한 반골 기질임을 추측하게 한 쥐스틴 트리에는 <빅토리아>(2016)와 <시빌>(2019)에서 여성 인물의 이면을 도발적으로 제시하는 데 겁 없는 만큼 세련된 감각을 구사하는 연출자라는 인상을 풍겼다. <추락의 해부>는 그런 기량이 정점에 달해 능숙한 테크니션의 기질도 엿보게 한다. 계단에서 굴러떨어지는 공으로 시작한 영화가 추락사한 남자, 휘청이는 신뢰와 고꾸라지는 감정들을 거쳐 마침내 소파 위에 잠든 개와 여자로 끝나기까지. 쥐스틴 트리에는 가족의 관계성 너머로 개인의 내부에 깊이 자리 잡은 수치심이나 좌절감, 예술가의 자기실현에 관한 문제를 법정의 양식 속에 녹여낸다. <추락의 해부>는 다가오는 3월, 이례적으로 프랑스 여성감독으로서는 처음 아카데미 시상식 감독상 후보에 올랐을 뿐 아니라 작품상, 각본상, 여우주연상, 편집상까지 총 5개 부문에 노미네이트되어 화제성을 계속 이어갈 모양새다.
남편이 죽은 후 아내가 의심받는 위치에 처하면 누아르적 긴장이 발생한다. 이때 여성은 미스터리의 영화적 현신이거나 팜므파탈로 기능하지만, 웃지 않는 독일인에 대한 편견을 제 방식대로 먹어치운 잔드라 휠러는 <추락의 해부>에서 차라리 포식자에 가깝다. 언뜻 간명하게 결백을 주장할 수 있는 순간에서조차, 유능한 작가이기도 한 이 여성은 복잡하게 진술하기를 택한다. 이해와 오해, 어떤 쪽이든 철저히 타인의 역량으로 남는다.
<추락의 해부>는 어느 오후 집 앞 눈밭에서 죽은 채로 발견된 남자의 사망 사건을 파헤치는 법정 공방을 중심에 놓고, 독일인 작가 산드라(잔드라 휠러)와 프랑스인 남편 사뮈엘(사뮈엘 테이스), 11살 아들 다니엘(밀로 마차도 그라네르)이 거쳐온 복잡다단한 인생의 더께를 들춘다. 다중 시점을 효과적으로 허용하고 때로 관객과 인물의 시차를 벌리는 속임수로 흥미진진한 트릭의 문법을 선보일 수 있는 영화 매체에서 ‘진실’은 가장 각광받는 주제다. 진실의 가변성을 부각하며 그 해답 추구의 불가능성을 말하는 영화, 진실의 다종다양함 속에서 그 불완전함을 통렬하게 꼬집는 영화, 혹은 그 모든 것들의 공존을 아름답게 찬미하는 영화들이 있다. 결론부터 끌어와 <추락의 해부>는 진실의 속성을 탐구하는 데 골몰하는 영화가 아니다. 관객을 의심하게 만들지만 카메라 뒤편의 답은 외려 견고히 설계되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 길고 지난한 드라마가 주는 감흥은 따로 있다. 긴 시간 축적되고 변주될 뿐 아니라 산재하기 마련인 개인의 역사를 특정 시점에 성급히 간추리려 할 때에 발생하는 오류에 관해 <추락의 해부>는 낱낱이 파헤친다. 다수의 제3자가 끼어들 때, 그 어떤 기억도 주인으로부터 장악될 수 없기 때문이다. 덧붙여 <추락의 해부>는 주인공을 고집 센 작가로 설정해 그가 자기 삶의 내러티브를 어떻게 정리해내는지 관객이 지켜보게 만든다. 쥐스틴 트리에는 진실이 무엇이냐고 묻는 것이 아니라, 진실을 논하기 좋아하는 시대에 모두가 얼마나 고독해질 수 있는지를 들여다보고 싶어 하는 것 같다. 마침내 자기 이야기를 모두 완성한 순간에, 개와 함께 소파에서 춥고 외롭게 잠드는 여자를 보여주는 장면은 가까스로 쟁취한 무고함이 깃털처럼 가벼워 되레 커다란 고독을 부른다는 사실을 발설한다.
복잡한 여자, 유죄
현재 일어난 일은 단 하나다. 알프스 산장의 다락층에서 남편 사뮈엘이 떨어져 죽었다는 것. 그러나 동시에 많은 사실들이 무질서하게 발굴된다. 몇 가지 중요한 사실을 여기에 다시 정리해본다. (※ 영화 관람 후 읽어주시길 바란다.) (1) 산드라는 유명 작가다. (2) 부부의 아들인 다니엘은 4살 때 오토바이에 치여 시신경을 잃었다. 이후 부부 사이에 깊은 균열이 생겼다. (3) 산드라는 이 때문에 바람을 피운 적 있으며 남편은 한때 아스피린을 과다복용해 자살을 시도했다. (4) 산드라는 양성애자다. (5) 산드라 같은 작가가 되고자 했던 사뮈엘은 자신이 포기한 소설의 일부를 산드라가 표절했다고 주장한다. (6) 불륜, 표절, 그 밖에 가족구성원으로서의 부덕에 대해 피해를 호소하는 남편과 격렬히 싸우는 산드라의 목소리가 녹취록으로 남아 있다. (7) 그 녹취록이 아들 다니엘을 포함한 여러 방청객이 보는 앞에서 모니터에 자막까지 띄운 채로 낱낱이 공개되었다. (8) 한편 산드라의 소설 속에는 남편을 죽이고 싶다고 말하는 서브 캐릭터가 나온다. 끝. 여기까지 적고 나서 문득 <추락의 해부>에서 산드라까지 죽지는 않았다는 사실에 안심해도 좋을까? 다행히 영화의 무대는 한국이 아니고 법정 안의 얼룩덜룩한 진실이 언론에 모두 새어나가지도 않았다.
쥐스틴 트리에 감독과 작가 아더 하라리가 집필과정에서부터 잔드라 휠러를 염두에 두고 쓴 <추락의 해부>는 어디까지나 산드라의 영화다. 사뮈엘의 죽음에서 ‘어떻게’를 탐구한 이들은 시신이 남긴 흔적에서 타살의 정황을 읽어내고 산드라를 용의자로 지목한다. 그러나 일단 법정에 선 이상 법의학적 증거는 극히 일부가 될 뿐이다. 이제 인생의 내러티브를 들고 싸워야 한다. 산드라를 의심가는 인물로 만드는 것은 두개의 교차하는 정체성이다. 누군가의 아내이자 어머니라는 것. 그리고 그가 대단히 강한 여성이자 유능한 예술가라는 것이다. 아니, <추락의 해부>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산드라를 종종 유해한 인간으로 보이게끔 유도한다. 쥐스틴 트리에는 무섭고 냉담한 여자가 사회적으로 손쉽게 지탄받는다는 맥락에서 그치지 않고, 동시에 그가 정말로 종종 독재자이거나 나르시시스트일 수 있었다는 층위를 더한다. 자신을 인터뷰하러 찾아온 젊은 학생 앞에서 들뜬 산드라가 상대를 묘한 곤경에 처하게 할 때, 심리적 위기를 호소하는 연약한 남편에게 조금의 위선도 보여주지 않을 때 그녀는 호감 가지 않는 인간임이 분명하다. 동시에 영화는 주관이 정립된 캐릭터가 관객에게 주는 지적 희열의 측면도 놓치지 않는다. 남편이 자신에게 말하지 않은 깊은 실패감을 저변에서 헤아리는 산드라의 작가적 본능은, 남편의 정신과 의사가 증언대에 서서 그의 인생을 정의하려 할 때 분노감과 함께 부부관계의 복잡함에 대한 지적 논쟁으로 표출된다. 단단한 갑옷을 두른 듯한 표정으로 일관하지만 바로 그 지점 때문에 취약함을 드러내는 순간에 엄청난 광휘를 내는 배우가 잔드라 휠러다. <토니 에드만>에서 아버지에 비해 무감하고 현실적인 딸을 연기하던 그가 <The Greatest Love of All>을 자신도 모르게 열창하는 대목이 명장면으로 회자된 것이 선례다. <추락의 해부>에서도 산드라는 아무렇지 않게 냉장고 문을 열다가 뒤늦게 터져나오는 눈물에 당황한 나머지, 얼굴에서 흐르는 두 줄기의 물방울을 닦아낼 여력도 없이 변호사 뱅상(스완 아를로)에게 묻는다. “파마산 치즈 줄까요?” 외부의 방아쇠를 핑계 삼아 비로소 울음을 토해내는 방어적 인간의 기질을 묘사할 때 탁월한 이 배우는, 검찰이 위시하는 문명화된 폭력의 교활함을 감당하는 여성의 재현이 감정 과잉으로 흐르지 않는 제어장치도 되어준다. 관객은 그답지 않게 흔들릴 때에 작중의 설계 이상으로 세밀히 연민하는 한편, 그가 강인함을 넘어 설득적인 표현을 구사할 때는 뒤로 물러나게 된다. <추락의 해부>의 스릴은 이 의뭉스러운 배우와 함께 타는 즐거운 시소 위에 있다.
떨어지는 것들
영화는 계단에서 굴러떨어지는 공을 비추며 시작된다. 낙하에 대한 집착은 영화 전반에 걸쳐 반복되는 모티프다. 문자 그대로 공에 이어 남자가 추락하는 외적 형상으로 드러나기도 하지만 개인의 위상이 하락하거나 신뢰가 고꾸라지고 감정이 허물어지는 내면의 운동으로도 지속된다. 이에 관한 쥐스틴 트리에의 고백이 제법 솔직하다. “시리즈 <매드맨>의 오프닝 시퀀스에서 한 남자가 계속해서 넘어지는 움직임에 매료되어 있었다.” <매드맨>의 넘어짐 이전에 <현기증>과 히치콕의 추락도 있었다. 이 몰락의 운동성에 기묘하게 사로잡힌 감독은 떨어지고 넘어지는 것의 문제를 비단 사건의 차원에만 놓지 않고, 영화의 저류에 흐르는 분위기로 놓아둔다. 달리 말해 <추락의 해부>는 대단히 기술적인 영화이기도 하다. “알고 싶은 게 뭐야?” 암전 속에서 잔드라 휠러가 질문하자 아래로 힘없이 공이 굴러 떨어져내리는 첫 장면에서 <추락의 해부>는 일찌감치 매혹한다. 검사와 변호사의 상반되는 질문을 번갈아 듣는 아들 다니엘의 얼굴을 흔들거리는 트래킹 패닝으로 오갈 때, 한밤중 산길을 내려오는 차 안에서 비로소 오열하는 산드라의 얼굴이 어둠 속에서 쉴 새 없이 덜컹거릴 때, <추락의 해부>는 무언가 중심을 잃고 넘어지거나 공중에서 흔들거리는 순간을 숏의 기운으로 포착하기 위해 애쓴다. 위태로운 인간의 장면들 가운데 정자세로 각인되는 것은 명민한 개 스눕(메시)의 절도 있는 움직임이다. 시끄러운 음악 소리에 빼꼼 반응하는 귀, 눈밭의 시체를 가장 먼저 발견하고 잽싸게 달려가는 동작, 가만히 엎드려 이후의 사태를 면밀히 지켜보는 눈동자, 모든 소동이 끝난 뒤 주인의 품에 들어와 말없이 잠드는 개는 추락도 도약도 없이 <추락의 해부>에서 제자리를 지키고 있다. 아스피린 한줌을 삼키고 기절한 뒤 구토하는 물리적으로 괴로운 연기까지 떠안아야 했던 이 보더콜리는 지난해 최고의 연기견에게 수여되는 칸영화제 팜도그상을 수상했다.
한편 감정과 신체의 차원을 아울러 이 영화에서 생의 가장 큰 시련을 맞이하는 이는 어린 다니엘이다. 좁은 법정 공간을 다종다양하게 프레이밍하는 <추락의 해부>가 노린 회심의 장면은 다니엘인지 분간이 힘들 만큼 그의 어깨와 뒤통수 뒤쪽에 바짝 붙은 카메라 너머로 문득 방청석의 아들을 바라보는 산드라를 비추는 숏이다. 다닥다닥 붙어앉은 방청객들이 시야를 가려 마치 궁지에 몰린 것처럼 보이는 산드라의 모습은 분명 아들의 시점으로 해석되고 있다. 켜켜이 드러나는 어른들의 복잡다단한 면모에 의혹, 충격, 실망을 거듭하다가 자기 개를 학대하기까지 한 다니엘은 영화 말미에 그 누구의 가르침 없이도 홀로 결정하고 깨닫는 법을 배운다. 소년은 아버지가 한때 자신에게 건넨 말이 유언이었음을, 작가의 아들답게 자기의 언어로 다시 쓴다. 침실의 암흑 속에서 모자가 끌어안는 조용한 피날레에서 상대를 품어 다독여주는 이도 삶의 한 구획을 큰 보폭으로 가로지은 11살 소년이다.
<추락의 해부>에 플래시백은 있는가?
변론 장면들에서 당시의 모습을 담은 짧은 화면이 떠오르기는 하지만 플래시백은 아니다. 카메라는 종종 바닥을 기거나 공중을 빠르게 헤쳐나가는 방식으로 상상된 진실로 향하고 있음을 알려준다. 이것은 예리한 검사와 변호사 모두 언급하는 대로, 구체적인 언어가 반복되는 사이 우리 뇌리에 박힌 어떤 장면들의 순수한 존재감, 즉 유령적인 이미지에 가깝다. 다니엘이 죽은 아버지의 유언을 복기하면서 그 순간을 떠올릴 때 틈입하는 장면도 있지만, 역시 아버지의 중요한 대사는 다니엘의 구술로 옮겨진다는 점에서 발명품이라 부르는 것이 걸맞은 이미지다. 플래시백이라 할 만한 장면은 딱 하나. 남편이 죽기 전날의 격렬한 부부 싸움 현장이다. 그외 모든 순간은 법정을 떠다니는 녹취록과 진술의 사운드, 즉 청각적 재료들에 힘입어 각자의 뇌리 속에 재구성된 것일 뿐이다. 말하자면 <추락의 해부>는 법정이 본질적으로 더이상 우리의 것이 아닌 외부자들에 의해 판단되는 진실의 장소임을 플래시백을 다루는 태도로부터 각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