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그냥 나로 온 거니까.” 인터뷰가 시작되기 전 스튜디오를 살피던 배우 김미경의 혼잣말이다. 특정한 역할이나 자리, 이름표와 수식어에 종속되지 않고 그 자체로 존재하는 김미경은 어떤 모습일까. 김미경은 우리 곁에 늘 가까이 있는 배우다. 주로 주인공의 엄마로 등장해 주인공의 결핍을 보듬어주거나, 결핍으로부터 도망갈 수 있는 유일한 요새가 되어주거나, 결핍 그 자체가 되었다. 작품이 주요 메시지를 전하는 굴곡엔 늘 김미경이 있다. 하지만 대중은 김미경의 중요성을 실제 그 정도만큼 받아들이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마치 사랑하는 가족구성원이 너무 가까운 나머지 그 소중함이 무뎌지듯, 엄마 자리에 놓인 능숙한 배우를 당연하게 여겼다. 당연한 것을 당연하지 않게 바라보려면 대상을 해체해보면 된다. 엄마와 미경. 이번 인터뷰를 통해 가까이 연결돼 보이는 두 대상을 따로 떼어낸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러자 비로소 엄마의 성질로 여겨져온 것들과 거리가 먼 김미경의 원형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바이크, 번지점프, 검도, 태권도, 태껸, 스쿠버다이빙, 스카이다이빙, DJ, 드럼 연주… 그가 사랑한 강렬하고 위험한 것들에 대해 이야기 나누다 보니 그간 미디어가 김미경을 소비해온 방식에 의구심이 들기도 한다. 오랜 관성으로 인해 거칠고 아슬아슬한 것을 즐기는 중년 여성을 발견하는 데 더뎠던 게 아닐까. 김미경이 처음 엄마 역할을 수행한 건 2004년 드라마 <햇빛 쏟아지다>에서였다. 그로부터 20여년의 시간이 흐르는 동안 그는 무수히 많은 가상세계의 아들딸을 단단하게 지지하는 그늘막이 되었다. 그의 다정을 따라 대중도 간접적으로 엄마의 사랑을 경험해왔다. 하지만 그것만으론 조금 부족하다. 김미경이 말하는 취미의 가짓수만큼 우리는 더 다양한 김미경이 필요하다.
- 얼마 전 <웰컴투 삼달리>가 종영했다. 짧은 휴식을 맛보고 있는지.
= 최근 집에서 편히 누워 드라마 보며 지내고 있다. 아직 이런 인터뷰들이 남아 있어서 본격적으로 쉬진 못했지만 곧 제주도로 여행을 길게 다녀오려 한다. <웰컴투 삼달리>를 촬영하면서 제주도에서 너무 행복했다. 벌써 그 시간이 그리워져서 다시 제주에 가려 한다.
- JTBC 예능 프로그램 <짠당포>에 나와 여러 취미를 공개하며 화제가 됐다. 바이크부터 번지점프, 드럼, 검도까지…. 많은 사람들이 의외라며 놀랐는데 그 반응에는 배우 김미경이 이런 부류의 취미와 어울리지 않는다는 맥락의 메시지가 읽힌다. 이 풍경을 어떻게 바라보나.
= 주변에서 의외라는 이야기를 정말 많이 들어왔다. 아무래도 내가 지금까지 해온 역할들이 대부분 정적인 인물이라 그 밖의 이미지를 상상할 수 없던 것 같다. 그런데 오히려 그 반응에 내가 놀랐다. 김미경이란 사람이 도대체 어떤 시간과 어떤 프레임에 맞춰져 있었나 돌아보게 되더라. 나한텐 하나도 이상한 일이 아닌데. (웃음) 내겐 이 선택과 취향이 너무 자연스럽다. 강렬하고 센 것을 좋아하는 그 자체가 나다운 일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화면 속에 놓인 엄마 김미경에 머물러 있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아니다. 나는 굉장히 자유로운 사람이다.
- 그런 반응이 아쉬운가.
= 서운한 것까진 아니지만 많은 생각이 든다. 나는 내 취미 생활이 유별나게 독특하거나 특별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역할 외에도 나이 때문에 이러한 활동에 놀라는 사람들이 있다. 내 나이대에 격한 아웃도어 활동을 즐기는 걸 많이들 걱정해준다. 그런데 또 이것들이 나이와 직접적인 상관이 있냐 하면 그렇지도 않다. 그냥 그런 시선과 반응에 흔들리지 않고 나답게 살아가고 있다.
- 정확히 취미가 몇개나 될까.
= 나는 취미를 오랫동안 깊게 파고드는 편은 아니다. 살면서 해보고 싶었던 것들을 최소 한번이라도 해봐야겠다는 생각에 여러 꿈들을 시도해보고 있다. 워낙 운동을 좋아해서 태권도, 검도, 수영 등 다양한 스포츠 종목을 해왔다. 극단에 가서는 태껸도 하고. 그외에도 다양하다. 바이크도 타고 드럼도 치고 스쿠버다이빙과 스카이다이빙까지. 앞으로도 여러 가지를 해보고 싶다.
- 어려서부터 이런 취향이 두드러졌나.
= 어릴 적에는 태권도 선수가 되는 게 당연한 꿈이었다. 그런데 어머니의 결사반대로 이루지 못했다. 우리 집은 딸만 넷인데 엄마가 운동을 못한다. 천생 얌전하게 자라 ‘운동=부상’이라는 공식을 갖고 계셨다. 딸이 다쳐서 온다는 상상 자체를 힘들어하셨다. 태권도 다음으로 수영에 관심이 생겼을 때에도 마찬가지였다. 우리 어머니가 세상에서 제일 무서워하는 게 물이다. 그래서 또 수영을 제대로 해보지 못했다. 아무리 즐겁고 재미있는 걸 발견해도 딸들은 부모가 용납하는 선에서만 경험할 수 있다. 그 시절엔 그게 당연했다. 그래서 나이 들어서 소원을 하나씩 이뤄가기 시작한 것도 이젠 내가 스스로 책임질 수 있게 됐기 때문이다. 경제적 여유가 없는 청소년 시절엔 꿈도 못 꾸던 일들이다. 그래서 나이를 더 신경 쓰지 않으려 한다. 이제야 할 수 있게 됐으니까!
- 네딸 중 어머니가 가장 힘들어한 딸이었을까. (웃음)
= 맞다. 나는 완전히 엄마 통제 밖에 있었다. 맞기도 가장 많이 맞았고 혼나기도 가장 많이 혼났다. 나는 내가 왜 혼나야 하는지도 잘 몰랐다. 나는 틀리지 않았으니까.
- 취미란 잘하면 좋지만 못해도 괜찮다는 너그러움에서 즐거움이 비롯된다. 생각보다 재능이 없다는 걸 깨닫고도 재미있었던 취미는 무엇이 있나.
= 없다. (파안대소) 나는 그런 쪽으로는 아예 안 간다. 딱 보기에 내가 잘할 수 있을 것 같은 것만 한다. 예를 들어 뜨개질이나 펠트 같은 거. 손으로 조그맣고 예쁜 걸 만드는 건 꿈도 안 꾼다. 그냥 멀리서 남들이 만든 걸 보며 박수만 칠 뿐이다. 어머, 너무 예쁘다~ 하면서.
- 미지의 영역은 미지로 놔두는 편인 것 같다. 이것도 자신을 잘 알아야 가능한 일인데.
= 나는 내가 언제 무엇을 할 때 행복한지 잘 아는 사람이다. 보기만 해도 심장이 뛰고 설레고 마음에 드는 일들을 기막히게 알아차린다. 심장이 터질 것만 같고. 그러면 나는 그걸 어떻게든 해내야 한다.
수많은 ‘나’의 모습이 있다
- 스카이다이빙과 스쿠버다이빙은 자격증까지 따려 했다. 자격을 갖추는 것이 취미 생활에 왜 중요하다고 생각하나.
= 간단하다. 그래야만 그것을 할 수 있으니까. 공식적으로 인정받고 싶은 건 아니고 언제든 몸을 던질 수 있도록 나를 위해 준비하는 것이다. 어느 날 바다에 갔다가 불현듯 스쿠버다이빙을 하고 싶어지면 어쩌겠나. 해야지. 그런데 자격증이 없어서 못하면 마음이 울적해질 것 같아서 시작했다. 스카이다이빙도 타인에 몸을 의지하면 언제든 할 수 있다. 그런데 조금 더 자유롭고 능동적으로 즐기고 싶어졌다. 스스로 몸을 움직여 날면 기분이 얼마나 좋을까. 그래서 스카이다이빙 자격증도 언젠가 도전하고 싶다. 실제로 알아봤는데 준비하는 데에 돈이 엄청 많이 들더라. 그래서 작전상 후퇴했다. 무작정 달려들지 않고 현실적인 어려움도 고려하는 편이다.
- 익스트림 스포츠는 김미경에게 어떤 부류의 행복을 주나.
= 나를 자유롭게 해준다. 오롯이 나 자체로 있을 수 있게 해준다. 해방감이랄까. 나는 그게 그렇게 짜릿하다. 번지점프, 스쿠버다이빙, 캐녀닝의 공통점은 수행자가 직접 결정하고 선택한다는 점이다. 떨어질지 말지, 언제 떨어질지, 어떻게 떨어질지 온전히 그것을 하는 사람이 결정할 수 있다. 100% 나만의 의지로 할 수 있는 일이 많지 않은 세상에서 이런 점들은 매력적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다. 자의로 할 수 있는 일들이니까.
- 문득 궁금해진다. 취미를 통해 순수한 행복을 느낀 경험들이 본업에도 도움을 주는 면이 있을까.
= 글쎄… 만약 드라마에서 그런 역할로 쓰인다면 어렵지 않게 접근할 수 있는 이점이 있을 것 같다. 하지만 역할이 아주 다양하진 않았던 터라 적극적으로 연결되지는 않는다. 다만 체력적으로 도움을 많이 받는다. 어릴 적부터 운동과 무용을 해서 그런지 나도 모르게 체력이 다져졌다. 며칠 밤을 새우면 다른 배우들은 좀비가 되어서 눈에 초점이 사라지는데 나는 그보다는 상대적으로 말짱하다. 자고 일어나면 상태 회복도 빠르고. 또래 배우들에 비해 배터리가 길고 오래간다는 생각이 든다.
- ‘국민 엄마’ 이미지가 강한 김미경의 익스트림 취미들. 사실 이 둘도 충분히 병립할 수 있는 키워드다. 가족과 아이를 위해 헌신하던 전통적인 엄마들도 바이크를 몰고 스카이다이빙을 할 수 있지 않나.
= 사람들에게는 ‘보여지는 나’만 있는 게 아니다. 우리 안에는 셀 수 없이 많은 ‘나’와 감정이 있다. 내가 본 모습, 내가 아는 모습만이 그 사람일 거라고 판단하는 건 정말 무서운 일이다. 재미가 없다. 내가 그렇지 않듯 저 사람도 자기 안에 많은 모습이 있을 거란 걸 알아야 한다. 거기서 깨어나는 것에서부터 세상은 변한다. 스스로에게도 타인에게도 한계를 두지 않았으면 좋겠다. 이런 이해가 부족하기 때문에 보편적으로 떠오르는 엄마의 이미지와 역동적인 활동의 이미지가 연결이 안되는 거다.
- 처음 바이크 자격증을 따기로 결심했을 때 가족들이 응원해줬다고. 이러한 가족의 존중과 이해가 내 삶을 자유롭게 펼쳐나가는 데 어떤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나.
= 너무 고마운 일이다. 싸워서 쟁취하고 얻어내는 게 아니라 처음부터 ‘너는 이런 사람, 나는 이런 사람’ 하고 받아들여주면 서로에게 반대할 이유가 생기지 않는다. 우리 부부는 각자가 하고 싶어 하는 일을 적극적으로 응원해준다. 남편이 바이크를 타보고 너무 무서워하길래 나도 그것을 존중해줬다. 더이상 강요하지 않았다. 우리 집이 이렇다. (웃음) 이러한 환경과 분위기가 생겨나면 비교적 덜 검열하게 된다. 내가 할 수 있는 것보다 하고 싶은 것을 먼저 생각하게 되고, 하고 싶은 것을 위해 필요한 것들을 현실적으로 짚어보게 된다. 바이크 자격증을 따겠다고 결정한 것도 코로나19로 집에서 뒹굴거릴 때였다. 시간을 허투루 보내는 게 너무 싫어서 주변 여성 바이커들과 함께 근거리로 마실을 나갔다. 가수 춘자씨가 내 바이크 친구다. 그때 너무 즐거웠다. 이 즐거움을 더 보통의 나날로 늘리기 위해 자격증을 따게 된 거다. 한번에 만점을 받았다. 가족들을 포함해 나를 가로막는 게 없어 얻을 수 있었던 성과다.
정해진 한계란 없다
- 2004년 <햇빛 쏟아지다>를 기점으로 무수히 많은 엄마들을 그려왔다. 김미경이 연기하는 엄마는 어떻게 다르다고 생각하나.
= 특별히 어떤 차별점을 두려 하진 않았다. 오히려 ‘엄마’라는 자리가 지닌 보편성을 많이 생각했다. 자식을 사랑하는 어머니의 마음을 기본으로 장착하되, 그에 따라 상황과 감정을 달리 표현하려 했다. 무뚝뚝한 엄마, 상냥한 엄마, 삶에 지쳐서 조금 힘든 엄마 등 태도가 달라질 수 있지만 그 기저에 엄마의 사랑을 잊지 않으려 했다. 내가 엄마니까 가능한 일이었던 것 같다. 모든 연기는 나로부터 시작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으면 연기가 아니라 흉내가 된다.
- 그런데 아들보다는 딸의 엄마를 많이 맡아왔다. 나를 사랑만 해줄 것 같고, 내 어려움을 외면할 것 같지 않은 느낌 때문일까. 배우로서 어떤 점이 일명 ‘국민 친정 엄마’를 만들었다고 생각하나.
= 정말 독보적으로 딸들이 많았다. 중간중간 아들도 있었지만 대부분이 딸이었다. 나도 궁금하다. 어떤 점 때문에 나를 친정 엄마 자리에 배치하는 것일까. 더구나 친정 엄마라는 건 암묵적인 맥락이 있지 않나. 내 편이 되어줄 것만 같은 따뜻하고 푸근한 모습들. 그런 것들이 내게 보이나? (웃음) 실제로 SNS를 하면서 많은 관객과 시청자들로부터 연락을 받는다. ‘우리 엄마 같아요’ , ‘배우님한테 안겨보고 싶어요’ , ‘돌아가신 엄마가 생각나요’ 같은 메시지들. 그것들을 보면 진짜 안아주고 싶어진다. 딸들은 엄마의 모습과 마음을 자기도 모르게 고스란히 이어받는다. 그러니 나에게서 엄마의 따뜻함이 느껴진다면 그것은 오롯이 우리 엄마가 내게 남긴 유산일 것이다. 우리 집은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셔서 엄마 혼자 네딸을 키웠다. 그때 엄마가 우리 자매들에게 보여준 사랑과 울타리는 다른 집보다 몇배의 노력이 들었다. 그런 것들이 나에게 시나브로 영향을 주었다고 믿는다.
- 배우 김미경의 다정은 언제나 좋지만 주로 엄마로서 소비되는 게 서운하게 느껴질 때가 있다. 중년 여성배우로서 참여할 수 있는 작품의 가짓수나 이미지적 한계를 체감하나.
= 너무 많이 느낀다. 나도 배우로서 다양한 모습에 도전해보고 싶다. 어둡고 음습한 패거리의 보스도 해보고 싶고 나이에 맞지 않는 역할도 해보고 싶다. 하지만 너무 오랫동안 엄마를 해온 탓일까. 지금의 엄마 이미지가 굳어진 면도 있고, 중년에 접어든 나이 탓도 있는 것 같다. 많은 이유가 있겠지만 이런 한계로부터 벗어나 새로운 상상을 하는 게 이 시장이 지닌 과제이기도 할 것이다. 하나의 이미지로 단정짓지 않고 한 꺼풀 벗겨 그 안에 담긴 다양성과 가능성을 읽어내면 좋겠다.
- 개인적으로 꼭 보고 싶은 게 있다. 스파이가 된 김미경! 너무 궁금하다.
= 너무 좋다. 꼭 해보고 싶다. 그런데 나에게 그런 모습이 안 보이나봐!
- SNS 시대가 된 지 오래다. 타인과의 비교로 인한 낙담과 우울이 쉬워진 세상에서 어린 세대에게 이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는 방안을 조언한다면.
= 너무 쉽게 주눅 들지 않았으면 좋겠다. ‘나는 나다.’ 이 명제만 기억해도 마법의 주문이 된다. 배려가 덜해진 세상에서 남들의 시선이나 반응에 너무 무게를 둬버리면 자신의 중심축이 흔들리게 된다. 나는 가끔 사람들에게 무리 짓지 말라는 이야기를 전한다. 혼자서 목소리를 낼 수 있을 때 진짜 자신의 이야기가 되고 그로부터 힘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남들의 틈에 끼어 내는 목소리는 자신의 것이 아니다. 물론 쉽지 않다. 하지만 자신의 중심이 잘 잡혀 있어야 남들과 비교하지 않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