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김미경이 첫 엄마 역을 연기한 뒤로 20여년의 시간이 흘렀다. ‘국민 친정 엄마’라는 별명을 보니 문득 질문이 생긴다. 그는 정말 한결같이 똑같은 엄마만 연기했을까? 질문을 조금 달리해보자. 김미경이 맡아온 엄마들은 정말 서민의 삶과 애환, 모성애와 헌신만을 상징할까? 콘텐츠 시장에서 여성주인공이 주목받고 여성 서사가 널리 퍼지는 가운데 김미경의 ‘엄마들’도 변했다.
❶ SBS <햇빛 쏟아지다> (2004)
<햇빛 쏟아지다>는 배우 김미경이 40대 초반에 처음으로 엄마로 분했던 작품이다. “이때만 해도 내가 이 나이에 어떻게 엄마를 하나 싶어 감독님한테 어렵다고 했다. 그런데 문득 이런 생각이 들더라. ‘내 직업은 연기자잖아. 못할 게 뭐가 있지?’ 오랫동안 연극 생활을 하면서 수많은 나를 만들어왔다. 머리를 스포츠맨 스타일로 밀고 초등학교 5학년짜리 남자아이도 돼봤고, 20대에 이미 80대 노인 역할도 해봤다. 시청자가 거부감만 없다면 도전해보고 싶었다. 그렇게 참여한 게 <햇빛 쏟아지다>다. 나도 궁금했다. 내가 어떤 모습으로 보일지. 그런데 정말 재미있었다.”
❷ KBS2 <성균관 스캔들>(2010)
김미경이 모녀 관계로 자주 합을 맞춘 건 배우 박민영이다. 2010년 <런닝, 구> 이후 <성균관 스캔들>에서 장녀 윤희로, 9년 뒤 <그녀의 사생활>에서 덕미로 다시 만났다. “우리 민영이가 아기였을 때다, 아기. 이때만 해도 딸 윤희를 성균관으로 보내는 엄마 역할이었다. 사랑하는 딸이 가족을 희생해 남자뿐인 성균관을 향하는데도 그 상황을 하염없이 바라볼 수밖에 없다. 집안의 몰락, 경제적 파탄 앞에 무기력한 엄마다. 보름달 밑에서 딸의 안녕과 안전을 비는 정도랄까. 전통적인 어머니상에 가깝다.”
❸ SBS <상속자들>(2013)
계급을 뛰어넘는 로맨스가 주요 키워드인 <상속자들>이 은상(박신혜)의 엄마에게 준 것은 언어장애와 가난이다. 어떻게 보면 그간 김미경이 맡아온 수많은 엄마들 중 가장 열악한 환경과 설정을 지녔다. 하지만 이 지리멸렬한 계급사회에서도 그는 당하고 살거나 주눅들기보다 상황을 유리하게 전환하는 능력을 발휘한다. 능청스럽게 집주인(김성령)을 회유하고 협박하는 면들이 그렇다. “아우, 너무 즐겁고 행복하게 촬영했던 작품이다. 인물 배경만 보면 다소 우울할 수 있지만 유머러스함으로 상황을 이끌어나갈 줄 아는 엄마였다. 김성령씨와 케미도 좋았고. 하지만 이게 내 결정만으로 완성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은상의 엄마를 전형적으로 그려내지 않은 대본의 힘이 컸다. 특히 청승맞지 않아 좋았다. 말을 못하기 때문에 늘 자기 생각을 수첩에 글로 써 보여줬는데, 이때 글씨를 너무 예쁘게 쓰면 퇴짜 맞았다. (웃음) 인물 설정을 세심하게 그려냈다.”
❹ SBS <괜찮아, 사랑이야>(2014)
병상에 누운 남편과 어린아이들을 두고 외도하는 엄마. <괜찮아, 사랑이야>는 다른 작품처럼 김미경을 ‘친정 엄마’로 분류하지만 동시에 개인의 욕구와 욕망을 지닌 엄마로 그려낸다. “이 작품은 엄마를 아주 솔직한 모습으로 그려냈다. 한 사람으로서 욕망을 누르거나 억지로 감추지 않고 오히려 가면을 벗겨버린 드라마였다. 아픈 남편의 병수발을 들면서 힘들어 소리도 지르고 짜증도 부린다. 이런 모습들이 사실 얼마나 현실적인가. 참지 않고 자기감정을 드러내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인간의 심리적·정신적 결핍을 다룬 만큼 엄마도 여기서 안전하게 솔직해질 수 있었다.”
❺ tvN <또! 오해영>(2016)
“정말 기존에 없던 신선한 엄마 캐릭터였다. 드라마뿐만 아니라 현실에서도 자식에게 감정을 진솔하게 드러내는 부모를 찾아보기 힘들다. 어릴 적부터 나는 자식에게 미안하다고 말하는 부모를 바라왔다. 그런데 <또! 오해영>의 황덕이가 그런 엄마였다. 정직하고 자신의 감정을 숨기지 않는. 그렇기 때문에 타인의 감정 또한 왜곡 없이 받아들인다. 속에 응어리진 게 없기 때문에 딸과 원활하게 이야기하고 소통할 수 있다. 결국 좋은 엄마란 좋은 어른이란 뜻이기도 하다.”
❻ KBS2 <고백부부>(2017)
미래에서 과거로 회귀한 진주(장나라)는 미래에 두고온 아들 서진(박아린)을 그리워한다. 그런 딸의 모습을 조용히 바라보던 엄마 은숙이 말한다. “이제 그만 네 새끼한테 돌아가. 부모 없인 살아져도 자식 없인 못 살아.” “이 장면을 찍을 때 나라와 눈만 마주쳐도 울었다. 그래서 눈을 안 보고 연기하려고 노력했다. 그 정도로 모두가 몰입한 작품이었다. 가족이 노래방에 간 신이 있는데 전부 신나게 <담다디>를 불렀다. 그런데 왈칵 눈물이 나는 거다. (웃음) 은숙은 그런 엄마다. 막연한 모성애로 자신을 희생해 딸의 행복을 바라는 게 아니라, 자식을 놓고 오기 어려웠을 딸의 마음을 알기에 자신의 슬픔을 감내한다. 오직 사랑으로 가득한 단단한 힘을 지닌 사람이다.”
❼ 영화 <82년생 김지영>(2019)
딸 지영(정유미)의 어려움을 알게 된 미숙이 말한다. “지영아, 너 얌전히 있지 마. 나대. 막~ 나대!” 지영과 미숙은 다른 시대 배경을 토대로 살아온 여성이지만, 이들의 삶은 평행선처럼 이어져 있다. “아이를 낳으면 이 세상의 모든 무례함으로부터 지켜주고 싶어진다. 날 서 있는 모든 것을 막아주고 싶은 강한 욕망이 생긴다. 미숙은 전형적인 남녀 차별이 성행하던 때에 자란 세대인데, 자신이 겪어온 그 길을 내 딸이 고스란히 걷는다고 생각하면 얼마나 끔찍하겠나. 당장 미숙이 할 수 있는 일이 없을지라도 마음의 병에 걸린 딸을 바라보며 미숙은 더이상 참지도 외면하지도 않는다. 자식을 위해 나서야 할 때를 아는 사람으로서 미숙은 좋은 엄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