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네21 리뷰]
[리뷰]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 통제 불가능한 자연의 폭력성이 파괴적 개발주의와 충돌할 때
2024-03-27
글 : 임수연

숲을 가로지르는 등하굣길에 새로운 나무 이름을 익힐 수 있고, 이따금 들리는 사냥꾼의 총소리에도 놀라지 않는, 아직 자연과 가까운 어느 작은 산골 마을. 도시에서 온 연예 기획사 직원들이 5월 착공 예정인 글램핑장 설명회를 열어 지역 주민들과 만난다. 산이 곧 삶의 터전인 사람들의 반응은 냉담하다. 이들은 회사 두달 매출과 맞먹는 중소기업 코로나19 보조금 때문에 급조한 프로젝트를 추진 중인 상황이었고, 그 속셈이 마을 주민들에게도 빤히 보이기 때문이다. 정화조 위치를 바꾸지 않으면 이곳의 지하수로 살아가는 주민들에게 큰 피해가 올 것이며 사람들이 피운 모닥불 등을 이유로 대형 산불 위험이 커질 수 있다는 문제 또한 설명회에서 제기된다. 특히 마을에 대한 애정이 남다른 타쿠미(오미카 히토시)의 반발이 매섭다. 지역 주민들의 시선에서 시작된 영화는 상사의 지시를 따라야 하는 일개 연예 기획사 직원일 뿐인 타카하시(고사카 류지)와 마유즈미(시부타니 아야카)의 시점에서 이 사안을 한번 더 들여다본다. 이들은 연예인 매니지먼트 일을 하다가 갑자기 글램핑장 주민 설명회를 도맡아야 하는 상황이 당황스럽지만 적당히 주민과 소통했다는 증거를 만들고 그들의 불만을 누그러뜨리라는 대표의 지시를 따를 수밖에 없다. 그리고 마을의 핵심 인물인 타쿠미에게 산불 방지를 위한 24시간 관리인 혹은 어드바이저 역할을 제안하고자 찾아간다. 그러던 와중, 타쿠미의 딸 하나(니시카와 료)가 갑작스럽게 산속에서 실종된다.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드라이브 마이 카>의 이시바시 에이코 음악감독의 라이브 퍼포먼스 영상으로 기획됐다가 극영화로 발전됐다. 원래 음악 위주의 무성영화 형태로 고려됐던 작품인 만큼 하마구치 류스케의 전작에서 ‘긴 대화’가 차지했던 비중과 기능이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에서는 적용되지 않는다. 대신 발화와 침묵, 자연과 도시, 영상과 소리의 관계를 통해 추진을 얻는다. 산업자본주의가 초래한 환경오염을 ‘악’으로 상정하는 프로파간다 내지는 생태주의 드라마로 읽힐 소지가 다분했던 영화는 과감하게 다른 길을 걷는다. 글램핑장 조성 예정지는 낯선 사람을 보면 피해다니는 사슴이 종종 출몰하는 곳이며, 혼자 산을 떠돌며 새의 깃털에 집착하는 하나의 모습은 위태롭다. 자연에는 선악이 없고 인간이 완벽히 통제할 수 없다. 이러한 자연의 속성이 품은 폭력이 파괴적 개발주의와 충돌할 때 인간과 자연의 공생 가능성을 향한 질문은 보다 본질적으로, 회의적인 차원으로 치닫는다. 이시바시 에이코의 라이브 콘서트를 위해 대사를 빼고 무성 영상으로 따로 편집한 버전 <Gift> 역시 공개를 앞두고 있다. 타쿠미를 연기한 오미카 히토시는 <우연과 상상>의 스탭 중 한명으로,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 로케이션 헌팅 당시 운전을 맡아 동행했을 때 배우로서의 가능성을 인정받아 캐스팅됐다.

“상류에서 한 일은 반드시 하류에 영향을 줍니다. 상류에 사는 사람에겐 의무가 있습니다. 눈앞의 돈벌이에 급급해 더러운 물을 전부 하류에 흘려보내서는 안됩니다.”

글램핑장 설명회에서 제기된 한 주민의 일침.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은 “장기적으로 어떤 일을 초래할지 예상하지 않고 단기적 이익을 좇는 전형적인 패턴이 문제다. 이런 행위가 반복되면서 환경 파괴가 일어나고, 인간의 신체와 정신 또한 파괴된다”고 일갈했다.

CHECK POINT

<심도> 감독 하마구치 류스케, 2010

하마구치 류스케가 만든 가장 이상한 영화. 한국영화아카데미와 도쿄예술대학 영상대학원 합작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제작된 작품이다. 당시 대학 워크숍을 통해 자신만의 연출 철학과 협업 방식을 고민해나간 그의 치기 어린 과도기를 읽어낼 수 있다.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긴 대화 시퀀스 등으로 정리되던 하마구치식 영화 노선 대신 새로운 실험을 선택한 작품이지만 이를 과거보다 매끈하고 성공적으로 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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