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윤현 감독이 12년 만에 돌아왔다. 설레는 이름으로 관객을 찾은 그의 작품 <당신이 잠든 사이>가 로맨스 스릴러라는 점은 사실 놀라운 일은 아니다. PC통신 시절의 애틋함으로 극장가의 주목을 받은 <접속>, 한 여자를 둘러싼 연쇄살인의 실마리를 아슬아슬하게 풀어가는 <텔미썸딩>, 100억원대 마약 탈취 사건의 진의를 좇는 <썸> 등을 거쳐온 그는 로맨스와 스릴러 사이의 교집합을 부지런히 키워왔기 때문이다. 사고로 선택적 기억상실에 빠진 덕희(추자현)는 언젠가부터 사랑하는 남편 준석(이무생)의 낯선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속도위반 통지서, 카드대금 연체, 호텔 결제 내역까지 불길한 추측을 더하는 증거들이 잇따르고, 작은 퍼즐 조각을 맞춰나가는 동안 덕희의 위태로운 의심과 추궁은 멈추기 어렵다. 오랜만에 관객 곁으로 돌아온 장윤현 감독을 만나 지난 시간을 조금씩 더듬어나갔다.
- 2012년 <가비> 이후 12년 만의 복귀다. <당신이 잠든 사이>여야만 했던 이유가 있나.
= 영화 제작을 하다보면 작품이 지닌 운명 같은 걸 자주 느낀다. 내가 하고 싶다는 마음만으로 하기 어렵다. 2012년 <가비>를 제작하고 중국에서 활동한 뒤에 국내에서 다시 영화를 만들려는 시도를 해봤지만 잘 풀리지 않았다. 때마침 코로나19까지 터지면서 상황은 악화됐다. 그때 무척 절실했다. 영화를 만들지 않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영화를 하지 못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무엇이라도 시작하고 싶었다. 그래서 작은 규모라도 이전에 독립영화로 고군분투하던 초심으로 작업하고 싶어서 출발했다. 영화를 만들 수만 있다면 예산과 규모는 더이상 중요하지않았다.
- <당신이 잠든 사이>는 원래 중국에서 제작하기 위해 받았던 시나리오였다고.
= 당시 입봉작이 없던 조성환 작가는 여러 가지 이유로 작품 제작이 밀렸다. 중국에서 제작이 아쉽게 불발되고 한국에 돌아온 이후에도 이 작품이 계속 생각나더라. 그래서 그때의 시나리오를 가지고 10년이 지난 지금에 맞춰 각색했다. 원래 버전은 중국 관객을 대상으로 쓰여졌기 때문에 인물의 감정 중심으로 펼쳐진 면이 있었다. 조금 더 직접적이랄까. 그래서 그것들을 지금 한국 관객의 취향에 맞춰 은유적으로 바꾸고 미스터리 부분을 강화했다. 현재 기술이나 환경 등에 맞게 변형한 것들도 있다.
- 시나리오가 영화로 제작되기에 충분한 가치가 있다는 것은 어떤 점에서 느꼈나.
= 해리성 기억상실이라는 포인트가 다른 기억상실과 다르게 느껴졌다. 사고 당사자가 고통을 감내하기 어려워 자의적으로 그러나 무의식적으로 기억을 지워버린다는 설정이 이야기 소재로서 매력적이었다. 어떻게 보면 자신의 트라우마와 정면 대결을 피하는 길이기도 하지만 자신이 그것을 이겨낼 수 있을 때까지 잠시 시간을 갖겠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기억을 찾고 트라우마를 이겨내는 과정에 누군가의 도움을 요구하면서 결국 사람으로 상처를 치유하는 과정이 좋았다. 실제로 현실 세계에 신체적인 고통만큼이나 정신적 고통을 호소하는 사람들이 많지 않나. 그런 사람들에게 용기를 주고 싶은 동시대성도 반영하고자 했다.
스릴러를 만드는 동력
- 영화는 덕희나 준석에게 관객과 일치하는 시점을 주지 않는다. 덕희나 준석의 관점 모두 정보 공백이 있다. 스릴러라는 장르상 이 빈칸이 중요한 장치지만 동시에 관객에게 정보를 계속 줘야 한다는 점에서 고민이 많았을 것 같다.
= 사실 이 부분은 <텔미썸딩>을 했던 경험이 많이 반영됐다. <텔미썸딩>도 여자주인공 수연(심은하)에게 잔인하고 긴 고통의 시간을 주면서 관객의 능동적인 상상력을 자극한다. 범인을 찾는 미션이 무척 중요하지만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범인이 누구인지 헷갈리게 하기 위해 단서를 지우는 방법을 많이 썼다. 당시 한국 극장가는 스포일러에 대해 크게 민감하지 않은 분위기였는데도 진범이 누구인지에 관한 논쟁이 이어지기도 했다. 상상의 공백을 적극적으로 활용했기 때문에 나올 수 있던 풍경이다. 그래서 <당신이 잠든 사이>에서도 이런 지점을 살리기 위해 앞에서는 준석의 시점으로 상황을 관망하게 하다가 중반부 이후 덕희의 시점을 따라가도록 했다. 이러한 시점 변화가 미스터리와 맞붙는 순간 관객의 호기심이 더 극대화할 거라 생각했다.
- 기억을 잃고 진실을 조금씩 알아가는 덕희의 세밀한 감정 변화와 진실을 조금씩 드러내는 준석의 태도가 무척 돋보인다. 배우 추자현과 이무생이었기 때문에 가능한 생명력이었던 것 같다.
= 처음 추자현 배우를 캐스팅했을 때 너무 큰 선물이라 생각했다. 작품 규모가 크지 않았던 만큼 기성 배우들과 함께할 수 있을 거라 생각지 못했다. 그런데 추자현 배우가 빠르게 수락해줘 놀랐고, 이후에 이무생 배우까지 긍정적인 답을 주면서 작품에 대한 희망이 생겨났다. 두 배우 모두 인물을 해석하고 접근해 나가는 방식의 밀도가 정말 높다. 사실 촬영 기간이 길지 않아 집에서 촬영하는 신을 먼저 진행해야 했다. 감정적으로 힘든 장면들까지도 순서가 뒤섞일 수밖에 없었는데 두 배우 모두 엄청난 몰입력과 집중력을 보여주었다. 모두 캐릭터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라 생각한다. 촬영하는 내내 정말 행복했다.
- <당신이 잠든 사이>는 부부 관계를 기반으로 이야기한다. 이전 작품들처럼 설레는 연애담보다는 부부의 단단한 신뢰를 중심으로 보여준다. 시간이 흐르며 맞게 된 장윤현의 변화라 할 수 있나.
= 나이가 들어서일까. (웃음) 30대 초반 때보다는 사람들과 세상에 대한 생각과 경험이 더 많아졌다. 아마도 그런 변화가 영화에 영향을 준 게 아닐까. 그전까지만 해도 사랑은 가장 가까운 타인을 만나 교감하고 소통을 쌓아가는 과정이라 생각했다. 그리고 그 뒤에 결혼이라는, 일종의 결말이 연인을 기다리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사실 결혼 안에도 무수히 많은 소통과 단절이 있다. 부부 관계가 소통의 통로가 되기도 하지만 그 자체가 단절을 만들기도 한다. 아주 깊고 내밀하고 지극히 사적인 관계를 이중적인 측면으로 바라보고 싶었다. 무엇보다 그냥 착한 사람들을 보여주고 싶었다. 우리 주변에 선한 사람들도 많지 않나. 이들이 고통스러운 상황에 직면했을 때, 어려움을 어떻게 극복해나가는지 그 선한 에너지를 잘 발휘해보고 싶었다.
다시 로맨스다
- 로맨스는 한동안 영화시장에서 많이 선택받지 못한 소재다. 그럼에도 다시 로맨스인 이유는.
= <접속> 때와 비슷하다. <접속>은 PC통신이라는 기술이 개인과 개인의 소통을 만들어주는 현상을 다룬 작품이다. PC통신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고 싶어 시작했는데 넓은 의미의 소통 과정을 보여주면서 공감대를 형성했다. <당신이 잠든 사이>도 마찬가지다. 타인과 맺게 되는 관계 안에서 서로에게 관심을 갖고 손을 내밀면서 소통을 이룬다. 어떤 관심과 용기는 사랑과 결합될 때 그 힘이 가장 커진다. 동성간의 사랑이든 친구와의 우정이든 소통으로서 사랑이 깊어진다. 그런 측면에서 이야기를 바라보고 싶었고 자연스럽게 로맨스로 가닿았다.
- 선택적 기억상실이라는 설정은 알고 보니 배다른 동생이라는 설정만큼 익숙한 나머지 경계받곤 한다. 이를 잘 풀어내기 위해 어떤 고민을 했나.
= 클리셰처럼 느껴지는 요소들이 있다. 사고, 불치병, 기억상실, 불륜 같은 것들. 하지만 이 영화에서 드러나는 기억상실은 기존 로맨스에서 다룬 것들과 다른 특징이 있다. 많은 작품에서 정해진 결말로 향하기 위한 수단으로 기억상실을 활용했다면 <당신이 잠든 사이>에서는 이 자체가 작품의 중심이다. 어릴 적 현실을 견디기가 어려워 기억을 지운 적 있는 덕희는 어른이 되어 비슷한 상황을 겪지만 이제는 자신을 보듬어주고 지켜주는 주변 사람들이 있다. 기억이 돌아오면서 극적 반전, 복수 등이 벌어지는 작품들과 다른 맥락이다.
- <접속> <텔미썸딩> <썸> <가비> 등 지난 연출작을 지나 <당신이 잠든 사이>에 이르렀다. 이번 작품에 반영된 감독의 족적과 취향이 있다면.
= 영화를 연출하면서 내가 꼭 갑작스러운 사고를 넣는다는 걸 알게 됐다. 사실 살다 보면 일상에서 사고가 빈번히 일어나진 않는다. 다만 이를 통해 사람들의 삶이 변하고 누군가에겐 터닝 포인트가 되기도 한다. 전작에서도 갑작스러운 사고에 대해 오랫동안 고민했다. 무엇보다 관객이 자신의 이야기로 받아들일 수 있도록 현실적으로 그려내는 게 중요하다. <당신이 잠든 사이>에서도 덕희와 준석에게 어떤 사고를 어떻게 줄지, 이 사고를 통해 이들의 삶이 어떻게 바뀌어나갈지 등을 고민했다. 그동안 해왔던 작품들이 오늘의 나에게 많은 도움을 줬다.
- 12년이 흐르는 동안 노동 현장으로서 촬영장도 많이 달라졌다. 체감하는 변화가 있다면.
= 주52시간 근무제로 촬영장의 시간도 한정됐다. 무척 마음에 든다. (웃음) 작품에는 스탭들의 고통이 그대로 반영된다. 한 장면을 오랜 시간 붙들고 있는 게 이해 가지 않는 건 아니지만 때에 따라 에너지 누수가 생기기 마련이다. 체력적 한계는 작업에 드러날 수밖에 없다. 그래도 이제는 그런 에너지와 시간 낭비가 생기지 않아 좋다. 마감을 마치는 것도 감독의 능력이다. 내가 계산한 시간 내에서 최대한의 욕심을 이루기 위해 적정한 타이밍을 맞출 수 있어야 한다. 그런 건강한 체계가 작품 전반에 선순환을 만든다.
조명과 엔딩곡의 비밀
다양한 스릴러 작품을 건너온 장윤현 감독이 특히 신경 쓰는 건 조명이다. <당신이 잠든 사이>도 마찬가지다. 출발부터 두 배우를 부각하는 데 집중하겠다는 방향을 잡고 덕희와 준석이 시각적으로 잘 보이도록 신경 썼다. 스릴러라고 해서 단순히 공포스럽고 위태로운 분위기의 조명만 활용할 수는 없었다. 서로를 신뢰하고 사랑하는 부부의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아날로그적 감성을 함께 담고자 했다. “너무 도회적이거나 도시적이기보다는 아날로그적 분위기가 잘 어울릴 거라 생각했다. 그래서 난색 계열의 배경과 조명을 활용했다. 인물보다 배경으로 시선이 가지 않도록 조명 기기와 카메라도 배우들 눈에 보이지 않는 위치에 뒀다.” 영화가 끝나고 엔딩크레딧이 올라가는 동안 흘러나오는 노래는 영화 분위기와 달리 경쾌하고 사랑스럽다. 언뜻 배우 이무생이 직접 녹음한 것처럼 들리지만 사실은 박지만 음악감독의 목소리. “박지만 음악감독이 제안한 곡이었는데 가사와 멜로디가 좋아서 선택하게 됐다. 그런데 스탭들 사이에서도 혼동이 있었다. 이무생 배우가 부른 것 아니냐고. (웃음) 하지만 박지만 감독이 직접 녹음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