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체> 속 내내 초조한 모습의 과학자들과 잔뜩 찌푸린 미간을 한 형사를 생각했다면 오산이다. 이들의 본체는 한없이 사랑스럽고 친근하며 가끔 짓궂을 정도로 장난스럽다. 시리즈가 공개된 지난 3월21일, <삼체>의 주연배우 6인과 두명씩 마주 앉아 나눈 이야기를 전한다.
춥고 고된 촬영이었다
처음으로 대형 시리즈의 주연을 맡은 제스 홍에게 <삼체>는 “손수 키운 아기” 같은 작품이었다. 그녀는 VR 게임 속 세계를 그대로 재현한 세트장의 규모를 회상하며 이 야심찬 프로젝트에 임한 소감을 전했다. “어떤 날은 촬영장 바닥이 온통 모래벌판이고, 그다음 날에는 갑자기 성 반쪽이 들어섰다. 이 정도 규모의 VFX를 도입한 촬영은 처음 경험했다. VFX팀이 시뮬레이션을 이용해 가상공간 속 인물의 동선을 설명해줘서 큰 도움이 되었다.”
대학을 갓 졸업한 진 쳉에게 TV시리즈 데뷔작은 “부끄러움”으로 다가왔다. “연극무대에서는 그때그때 관객의 반응을 알 수 있지만 시리즈는 공개되는 순간 모든 시청자에게 노출되는 기분이다.” 그녀의 수줍음은 겸손의 다른 이름이었다. 문혁으로 파괴된 인간 예원제의 비애를 체화한 비결을 물었을 때도 “청궈샹 감독의 디렉션에 그대로 따랐을 뿐”이라고 제작진에 공을 돌렸다. 강렬한 존재감으로 1960년대 중국의 황량한 긴장감을 조성한 진 쳉은 “배우로서 자아를 완전히 비우고 그 자리에 캐릭터를 채워넣는” 작업을 추구한다. “무척 춥고 고된 촬영이었다. 생각을 비우고 그저 주어진 일에 몰두하는 것은 스트레스를 덜어내는 나만의 방식이기도 하다.”
제스 홍의 표현에 의하면 진 청과 예원제는 시공간적으로 온전히 분리된 인물들이지만 동시에 “근본적으로 닮은” 과학자들이다. “그들을 둘러싼 정반대의 상황이 그들에게 상반된 방향성을 추구하게 한다.” 다행히 두 캐릭터의 본체들은 카메라 뒤에서 만나 끈끈한 인연을 이어나가고 있다 한다. “제스와 함께 촬영장 밖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며 많은 도움을 받았다. 코로나19 팬데믹 중이어서 쉽지는 않았지만 제스의 촬영 회차를 참관할 기회도 있었다. 텅 빈 블루스크린을 향해 열연하고 있더라. (웃음)”(진 쳉)
우주적 규모의 역경에 대처하는 성숙한 자세
잭과 윌은 ‘옥스퍼드 파이브’ 중에서도 도드라지게 대조되는 한쌍이다. 존 브래들리는 그 원인으로 잭의 “냉소주의와 의심”을 꼽았다. “잭은 그 어떤 상황도 당연하게 받아들이지 않는다. 언제나 질문하고 의심하는 태도는 자신의 주관을 지키는 굳건한 방어기제로서 작동한다.” 그 기저에는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을 지금 당장 즐겁게 소비하고자” 하는 의식이 존재한다. “그는 사업가로서 벌어들인 부를 친구들과의 행복을 위해 기꺼이 나누고자 한다. 길어봤자 80년 인생에서 최선의 쾌락을 누리는 것이다. 그 안에도 뛰어난 통찰이 담겨 있다.”
언제나 걱정 없이 자신만만한 잭과 달리 알렉스 샤프가 연기한 윌은 “인류가 처한 실존적 위협을 개인의 차원에서도 온몸으로 받아내는” 병약한 인물이다. “최종본에서는 편집됐지만 술집에서 5명이 대화하는 1화 속 장면에서 잭이 윌에게 ‘미래를 위해 헌신하는 너의 일이 가치 있다’고 말한다. 한편으로 윌은 자존감이 낮은 사람으로 보이지만, 반대로 자신을 객관적으로 받아들이는 용기로 해석할 수도 있다. 이런 겸손과 너그러움은 우주적 규모의 역경에 대처하는 인간의 성숙한 자세일지도 모른다.”
두 사람이 나란히 앉아 대화하는 2화의 장면에서는 친구를 진심으로 위하는 잭의 진중한 면모가 드러난다. “잭의 평소 태도와는 상반되는 반응이기에 효과가 더 크다고 생각한다. 서로가 절실히 필요하다는 둘 사이의 깊은 유대감이 드러나는 장면이었다.”(존 브래들리) 알렉스 샤프는 “두 사람이 깊이 교감하는 거의 유일한 장면인 만큼 완벽을 기하기 위해 추가 테이크를 요청하기도 했다”고 밝혔다. 두 캐릭터의 헌신이 지탱한 ‘옥스퍼드 파이브’의 굳건한 우정은 프레임 바깥에서도 변함없었다. “언론용 모범 답안처럼 들리겠지만 우리 배우들은 진심으로 서로를 아끼고 사랑한다. 모든 촬영 현장이 그렇지는 못하기에 더욱 특별했다.”(알렉스 샤프)
대사를 통해 깨닫는 것들
“전략가”라 설명한 형사 다 시의 명석함을 떠올리게 하는 베네딕트 웡은 <삼체>의 각본을 처음 접했을 때의 인상을 치즈에 비유했다. “스위스 치즈같이 숭숭 구멍이 뚫려 있던 이야기가 진행됨에 따라 점차 채워지며 완전한 체다치즈가 된다.” “프로듀서들이 나의 위키백과 내용을 베껴다가 다 시의 전사를 만들었다”며 웃은 그는 “자료조사 중 실제 정보국 요원을 만났다. 임무를 위한 그의 헌신에 경외심을 느꼈다”고 인물 해석 비화를 밝혔다. “다 시도 일에 치여 좋은 아버지 역할을 하지 못하는 인물이다. 오기와 진 등에게 보여주는 일정량의 인간적 공감 또한 그의 직업이 허락하는 범위 내에서만 작동할 뿐이다.”
리엄 커닝엄이 연기한 토머스 웨이드는 수단을 가리지 않고 동물적인 관성으로 목적을 향해 돌진하는 지휘관이다. 캐릭터를 대하는 배우의 연기관도 동일했다. “매우 본능적인” 연기자로 스스로를 규정한 그는 “대사를 직접 입에 담을 때 비로소 그 의도를 온전히 체감한다”고 밝혔다. “주어진 일에 온전히 몰두하기에 다른 모든 것을 포기할 수밖에 없지만 결국 토머스의 일에는 그만한 적임자가 없지 않나. 전문 직업인에게는 가장 효율적인 태도이지 않을까.”
안하무인의 성격 탓인지, 직업적 영역의 괴리 탓인지, 다 시와 토머스는 과학자들의 세계 속에서 돌출된 이질적 존재다. 리엄 커닝엄은 두 인물을 “도구를 찾는 사람들”이라 설명한다. “과학자들과 우리는 바라보는 방향이 다르다. 우리는 그저 위협을 해결할 도구를 찾아 적재적소에 배치하려 한다. 과학자들 또한 그 도구의 일종이다.” 윤리와 대의 사이에서 번민하는 과학자들을 다그치며 다 시와 토머스도 남몰래 흔들리지는 않았을지 문득 궁금해졌다. 두 사람은 입을 모아 아니라고 답한다. “차 안에 소변용 페트병까지 구비한 사람이다. 흔들릴 시간 자체가 없다.”(베네딕트 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