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킹메이커>란 제목으로 개봉됐던 영화 두편이 있다. 하나는 조지 클루니 감독, 주연의 2011년 미국영화이고 다른 하나는 변성현 감독, 고 이선균 주연의 2021년 한국영화다. 이들 모두, 대통령이 되고자 하는 자와 그 뒤에서 그를 대통령으로 만들려 하는 자의 이야기를 다룬다. 정치의 흑막이 중심이 된다는 점에서 같지만, 한 <킹메이커>(2011)는 현실 정치의 승리를 위해선 이상적 정치의 패배가 필요하다는 점에 주목하는 반면, 다른 <킹메이커>(2021)는 현실 정치의 패배를 통해 이상적 정치의 가능성과 여운을 남긴다.
나는 인구에 회자되는 고 김대중 전 대통령의 명언, “서생적 문제의식과 상인의 현실감각”만큼 현대 한국 정치, 아니 시대와 국가를 넘은 모든 정치의 본질을 꿰뚫는 말도 없다고 생각한다. 굳이 이 말에 빠진 것을 더하자면 ‘민중의 바람’이다. 이 바람은 흔히 ‘바램’으로 적히는 소망을 의미하기도 하고, 그런 소망이 뭉쳐 움직이는 강력한 역사적 흐름을 뜻하기도 한다. 서생적 문제의식과 상인의 현실감각 사이를 도도히 흐르는 강물 같은 이 바람. 좋은 정치는 의식과 감각이라는 양안 사이에 돛단배를 띄워, 바람의 힘으로 강물과 함께 흐르는 정치라고 믿는다.
그런 의미에서 조지 클루니의 <킹메이커>는 서생의 문제의식에서 시작해서 ‘상인’도 아닌 장돌뱅이의 감각으로 끝났지만, 변성현의 <킹메이커는> 바람 앞에 멈춰 선 서생과 상인을 바라본다. 그 눈길의 끝에는 한국 현대 정치의 역사가 있다. 변성현 감독은 영화의 결말을 영화 안에서 맺지 않고 실제 발생한 한국 정치사로 하여금 발언하게 한다.
예측 불가한 방향으로
김대중 이후의 한국 정치는 과연 얼마나 서생의 문제의식을 발전시키며 상인의 현실감각을 접목시켰을까? 철마다 불어왔던 민중의 바람 앞에서 어떤 돛단배를 띄워 어떤 방향으로 흘러왔을까? 노무현, 이명박, 박근혜, 문재인 그리고 윤석열을 ‘킹’으로 만든 상인들은 넘쳐났고 정치공학적으로만 보자면 그 상인들의 현실감각은 때로 무서울 정도로 현실적이었다. 어떤 상인은 민중의 바람을 정면으로 받아내는 돛을 올리기도 했지만 대개는 그 강한 힘에 돛대가 꺾였다. 어떤 상인은 기묘한 기술을 발휘하여 민중의 바람을 비껴 받는 돛대를 고안해서 강물의 흐름과는 다른 방향으로 배를 움직이다가 암초에 걸려 좌초하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상인들의 현실감각은 넘쳐났지만 그에 비해 서생의 문제의식은 초라했거나 너무 큰 꿈으로 기울곤 했다. 그러다 보니 상인의 현실감각을 압도하는 민중의 바람이 점점 거세진다. 상인들이 올린 돛대가 어설픈 기술로 비껴가지 못하도록, 너나 할 것 없이 한마음으로 바람을 키우고 있어서다.
대통령직선제를 채택한 국가인 만큼 우리나라에서 부는 민중의 바람은 대개 대통령선거에 몰린다. 국회의원 총선거는 대통령선거를 통해 이미 방향이 정해진 바람이 돛단배를 조금 더 세게 밀어붙이거나 방향을 틀게 만드는 중간 국면에 가까울 뿐이다. 그런데 이번 4·10 국회의원 총선거는 조금 판이 다르다. 2년 전 대선에서 불었던 바람이 특정 방향으로 기운 것이었다기보다는, 제각각 다른 마음에서 발원한 동풍과 서풍이 서로 강하게 맞부딪쳐 난기류를 일으켰기 때문이다. 그 와중에도 조금이나마 강했던 바람의 방향으로 돛단배가 띄워졌다. 그런데 그 배가 영 시원치가 않다. 동풍이 가리켰던 방향대로 가는 것도 아니고 서풍이 견제하는 방향과 만나 진로를 조금이나마 틀어가려고도 하지 않는다. 그냥 제멋대로 간다. 동풍이든 서풍이든 어이가 없어 하는 낌새가 강하게 읽힌다. 그래서 바람의 방향이 바뀌었다. 동풍이랄 것도 없고 서풍이랄 것도 없다. 이 바람이 향하는 곳은 오직 하나다. 제 멋대로 가는 돛단배.
4월, 민중의 바람은 어디로?
조슈아 마이클 스턴 감독, 케빈 코스트너 주연의 2008년 미국영화 <스윙보트>는 편서풍과 편동풍이 늘 부는 미국 정치판에서, 4년마다 혹은 8년마다 마치 바람의 방향이 바뀌는 듯한 ‘효과’를 만들어내는 이른바 중도층이나 무당층에 대한 이야기를 다룬다. 비록 웃지 못할 이유로 그 단 하나의 ‘정치 무관심자’의 선택에 의해 권력의 방향이 결정되는 코미디를 그렸지만, 집토끼를 무시하고 산토끼를 잡으러 뛰어다니는 미국 정치의 역학을 잘 보여준다. 미국과는 여러모로 사정이 꽤 다른 한국 정치를 진단하고 전망할 때, 이 ‘과대평가된’ 한표의 의미에 대해 ‘과몰입’하는 비평도 종종 나온다. 편서풍과 편동풍이 팽팽하게 맞설 땐 이런 한표가 대세를 결정짓는 일이 발생하는 법이기는 하니까.
그러나 2024년 총선을 앞둔 한국 정치에서는 ‘중도파와 무당층의 환심을 사는’ 상인들의 기술이 먹히지 않는다. 마치 고결한 판관이라도 된 양 한쪽 바람의 손을 들어주는 존재로서가 아니라, 도무지 말을 들어먹지 않는 눈앞의 돛단배를 멈춰 세우거나, 적어도 압도적인 바람의 힘으로 방향을 틀게 하지 않으면 안되겠다는 데 동의한 마음으로 뭉쳐가고 있기 때문이다. 이걸 기존의 편서풍이나 편동풍의 관점에서 해석하면 안된다. 그들은 어느 한쪽의 바람에 합류한 것이 아니라, 아직 구체적인 방향이 결정되지 않은 새로운, 아주 강력한 바람을 만들어내는 데 동참하고 있어서이다.
이 바람을 읽을 때에는 구체적인 방향보다는 전체적인 힘을 가늠하는 것이 중요하다. 어느 방향이 되었건 지금의 배가 제멋대로 움직이는 일을 묵과할 수 없으며, 다음 배가 띄워질 때까지 기다리지 않겠다는 의지로 뭉치고 있는 바람인까닭이다. 그 기세 앞에서 상인의 현실감각은 의미를 잃어버렸고, 서생의 문제의식은 쪼그라들어 있다. 상인의 기술을 압도하겠다고 마음먹은 바람 ‘이후’를 감당하는 건 결국 서생의 문제의식일 수밖에 없기에, 2017년 그 바람이 불 때보다도 더 치밀하고 겸손하고 절박한 마음으로 문제의식을 정련해가는 서생이 필요해질 때가 조만간 올 것이다.
2011년 영화 <킹메이커>의 원래 제목은 “3월 중순”(The Ides of March)이다. 셰익스피어의 희곡 <줄리어스 시저>에서 카이사르에게 3월15일을 조심하라고 말한 대목에서 따온 것이다. 지금 대한민국에서는 4월 중순을 향한 민중의 바람이 분다. 누군가는 배반을 할 것이고, 누군가는 죽음과도 같은 고통을 경험하게 될지도 모른다. 누군가에게는 불길한 경고이지만, 또 누군가에게는 길하고 흥할 예언일 수도 있다. 각자의 주관 속 길흉화복은 당대의 역사가 결정한다. 부디 겸허하고 슬기로울지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