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F 버튼을 누른 줄 알았다. <기생수: 더 그레이> 속 강우(구교환)는 느릿하거나 진중한 기생생물(혹은 인간)들보다 두배는 빠르게 움직이고 거의 세배 빠르게 말한다. 시공간을 빨리 감으며 이야기의 속도를 가속하는 강우는 배우 구교환을 만나며 더욱 생동한다. 강우는 늘 도망자였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속사포의 삶을 살았다. 하지만 기생생물 하이디에 절반이 잠식된 수인(전소니)과 엉겁결에 여정을 함께하면서 강우는 전과 다른 마음으로 내처 달리기 시작한다. 수인을 구하기 위해, 세상을 구하기 위해. 그리고 어쩌면 자신을 구하기 위해.
- <반도> <괴이>에 이어 연상호 감독이 쓴 작품에 합류했다. 연상호 감독의 이야기에 계속 마음이 가는 이유는.
= 연상호 감독님의 작품을 하면 그저 재밌다. 친구와 농담을 나누며 공방 조형 실습을 하는 기분이다. 공방이라기엔 늘 규모가 크지만(웃음) 함께 작품을 만들어나갈 때 배우로서 경직되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가 현장에서 함께 보낸 즐거운 시간만큼 관객이나 시청자들도 작품을 보고 즐거웠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든다. 알려졌다시피 감독님은 애니메이션에 창작의 기원을 두신 분이고, 나는 애니메이션 마니아다. 또 내가 최근 피규어에 관심을 두기 시작한 뉴비라 감독님과 피규어 제품에 관한 이야기를 나눈다. 밸런스가 잘 맞는다. 그러면서 감독님과 자연스럽게 작품 이야기를 하게 된다. 감독님과 이야길 나누다 이번 작품에 캐스팅된 이유를 듣게 됐다. <기생수: 더 그레이>의 그림체가 나와 맞아서이다. 감독님이 나를 총애한다기보다는 배우가 지닌 분위기에 따라 캐스팅을 진행하신다고 생각한다.
- 오리지널 만화를 좋아했다고 들었다.
= 내 세대 사람 중 좋아하지 않은 이가 있을까. 만화를 볼 당시 기생생물이 외치는 “우리는 하나다”라는 대사가 마음에 남았다. <기생수: 더 그레이>의 코어 또한 단결 정신이다. 우리는 서로 연결될 수밖에 없고 벗어나려 해도 다시 함께일 수밖에 없는 오리지널 만화의 정수가 이번 <기생수: 더 그레이>에도 그대로 유지돼 좋았다.
- <반도> <모가디슈> <길복순> 등 근래 매 작품에서 액션 연기를 선보이는 중이다. <기생수: 더 그레이>에서도 다양한 액션 시퀀스를 소화하는데.
= 액션이 끝날 때마다 강우가 보이는 마지막 터치가 있다. 강우가 자기 매력에 깊이 빠져 있기 때문에 나올 수 있는 행동을 취향껏 가미했다. 2화 초반의 오토바이 액션 시퀀스가 특히 그렇다. 오토바이에서 내려 상대 조직원에게 강타를 날린 후 다시 오토바이에 올라타는 사이에 사소한 동작 하나를 채운다. 그냥 때리고만 가면 쑥스럽지 않나. 강우는 굳이 오토바이에서 내려 누군가를 해치웠으니 성공의 세리머니라도 한번 보여줘야 하는 성격인 거다.
- 강우는 끝의 끝까지 저항하다 생각을 포기하고 수인과의 여정에 합류한다. 강우를 연기할 때 “상황이 강우를 돌파하도록 만들기 때문에 이에 함몰되지 않도록 저항 정신을 더했다”라고 전한 바 있다.
= 연상호 감독님과 류용재 작가님이 강우를 도망가지 못하게 했다. 우선 강우는 본 게 너~무 많다. 자기가 보고 들은 걸 수인에게도 이야기해주고 최준경 팀장(이정현)한테도 전해야 한다. 오죽하면 내가 “이걸 언제까지 설명해야 돼”라는 대사를 했겠나. 그런데 끝없이 대사를 해야 하는 게 도망칠 수도 없고 도망쳐도 잡히는 강우의 상황과 맞아떨어진다. 강우는 수인과 함께하기 전까진 도망치듯 인생을 살았다. 그래서 그를 더욱 도망 마니아로 만들어간 부분이 있다. 비겁함도 용감함도 중간이 없는 강우는 극이 진행되면서 덜 도망치는 법을 배워간다. 마지막 화에서 강우는 마음으로 내심 아끼던 캐릭터의 죽음을 보며 눈물 흘리다가도 슬퍼할 새 없이 다른 이를 구한다. 바쁘다 바빠! 어떻게 보면 강우는 <기생수: 더 그레이>의 수비형 미드필더다. 사실 딱딱할 수 있는 작품 속 정보를 말로 재밌게 전달하는 역할이 취향에도 맞다. <D. P.> 시리즈의 한호열이 대표적이다. 나 없으면 안 돌아간다. (웃음) 정보성 대사를 최대한 시청자들과 즐기며 나누길 희망한다.
- 말이 많은 강우를 보다 보면 어디까지 이 캐릭터를 믿어야 하는지 의구심이 든다. 하지만 문어체로 말하는 기생생물이나 처음부터 끝까지 진지한 준경 사이에서 내내 편하게 구어체로 말하는 강우가 점차 미덥게 느껴진다. 강우를 통한 이야기의 완급 조절을 염두에 둔 채 연기했나.
= 말의 리듬을 따로 염두에 두고 대사를 뱉진 않았다. 강우는 헐렁한 남자라 발성 혹은 말의 리듬이 묵직할 것 같지 않았다. 강우에게 묵직한 것은 오직 수염뿐이다. 내가 목소리를 갈아 끼울 순 없지만 말의 리듬감은 바꿀 수 있었다. 헐렁한 놈을 만들기 위해 리듬을 만들긴 했다.
- <기생수: 더 그레이>의 세계관은 모두가 서로에게 반말을 하는데 아무도 개의치 않는 세상이기도 하다.
= 넷플릭스는 글로벌 OTT기 때문에 존비 문화가 없는 세계화의 물결에 우리가 동참해야 한다. (얼마간 정적) 농담… 이다. 시나리오에서부터 존댓말이 따로 없었다. <기생수: 더 그레이>의 세계관에선 자연스럽고 당연한 일이었다.
- 강우는 왜 끝까지 수인을 지켰다고 보나.
= 수인만큼 강우도 기댈 곳이 없는 사람이다. 강우는 아마 수인에게서 자기 가족의 모습을 봤을 터다. 그래서 수인에게 아주 직접적인 대사를 날린다. “나랑 같이 도망치자!” 강우는 누구보다 애착하는 대상과 떨어지길 꺼리는 남자다. 내가 멜로를 연기할 때도 이런 대사를 해본 적 없는데!
- 강우는 수인과 하이디 중 누굴 더 믿었을까.
= 둘 다. 하지만 하이디의 무공을 믿고 수인의 심성을 믿는 등 분리하진 않았을 것 같다. 강우는 수인에겐 하이디의 메시지를, 하이디에겐 수인의 메시지를 전한다. 어디서 들은 이야길 누군가에게 말할 때 단순히 말을 전하려다 메시지에 영향을 받아 내가 변화를 겪을 때가 있지 않나. 강우도 여러 말을 전하다 더는 도망치지 않고 사람들과 함께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