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계+인> 2부를 비평한 듀나의 문장을 차용하고 싶다. “최동훈의 SF영화 <외계+인> 2부작에서 내가 가장 싫었던 게 뭐였는지 말해볼까. 바로 외계인의 촉수다.”(<씨네21> 1441호) 이를 다음과 같이 변주해도 전혀 위화감이 없다. 내가 <기생수: 더 그레이>에서 가장 싫어한 것은 바로 기생수의 촉수다. 원작 <기생수>의 기생생물은 육체를 강철처럼 단단한 낫이나 칼 형태로 만들어 그것을 무기로 사용했다. 이 무기들이 격돌하면 ‘카앙!’거리는 소리가 나며 검과 검이 부딪치는 듯한 액션 쾌감을 자아냈고, 이 금속의 무기가 인간의 육체를 단숨에 절단할 때의 선득함이 <기생수>의 상징적인 감각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러나 <기생수: 더 그레이>의 기생생물들이 전투할 땐 경쾌한 ‘카앙’ 소리가 거의 나질 않는다. 문어 다리끼리 맥없이 부딪치는 듯한 ‘척’ 소리만 날 뿐이다. 동물의 육체 같은 촉감을 지닌 촉수가 그들의 주된 무기가 됐다. 이것은 인간을 단칼에 베지 못하고 푹푹 찌르는 공격으로 상처내는 데 그치기도 한다. 원작에 비해 기생생물의 전투력은 급강했고 최준경(이정현)은 맨몸으로 굴러서 기생생물의 촉수를 피하기에 이른다. 허망하다. <기생수>의 기생생물이 인간을 눈 깜짝할 새 난도질하는 것은 작가의 변태적 취향 때문이 아니었다. 인간이 소와 돼지를 단칼에 도축하듯이, 인간이 학살의 주체에서 대상이 될 때 느껴지는 섬찟함과 그에 수반하는 인간성의 고찰이 <기생수>의 중핵이었다. 강철이 촉수가 되어버린 <기생수: 더 그레이>에 이러한 주제 의식은 흐지부지 사라져버렸다. 원작의 비범한 상상력을 훼손했다고 말해도 과장이 아닐지 모른다. 하지만 싫은 소리는 여기까지다.
서두의 비판은 다음 의문을 키우기 위해 다진 지반이다. 후반부에 접어들수록 기생생물이 지닌 촉수의 기능이 꽤 신묘한 방향으로 흐른다. 금속의 날카로움을 잃은 대신 피부의 진득함을 얻은 촉수는 살인이 아닌 포박의 도구로 쓰이기 시작한다. 예를 들어 설강우(구교환)가 기생수로 변해버린 누나 경희(윤현길)를 보고 분노에 차서 달려들 때 경희는 촉수를 사용해 강우를 포박한다. 그러곤 모종의 협상을 위한 설득의 대화를 꺼낸다. 작품의 말미에선 서로 가족으로서의 감정적 교류를 나누기까지 한다. 비슷하게 기생수의 지도자 격 인물은 형사 원석(김인권)의 배신을 종용하기 위해서 그를 죽이지 않고 겁주며 대화한다. 촉수가 조장하는 죽음의 지연, 생명이 살아 있는 시간의 적극적인 활용. <기생수: 더 그레이>의 인간과 기생생물은 원작 속 학살과 피살의 관계보다 교류를 지속하는 협상의 관계에 조금 더 가까워진다.
전투가 유예된 후 이뤄지는 대화의 지속에서 이른바 휴머니즘의 틈이 마련된다. 기생생물이 인간성의 헛됨을 지적할 때마다 인간에겐 고심하는 시간이 주어진다. 원작보다 살상력이 낮아진 촉수 덕에 인간은 다른 인간을 구하고자 하는 마음에 더 길게 사로잡힌다. 죽고 죽이는 일에 자꾸 망설이거나 지지부진하게 임하는 기생수들. 액션 장르물로선 형편없는 선택처럼 보이는 이 모습에서 모종의 기시감이 느껴진다. 어디선가 많이 본 듯한, 의도적으로 느린 사건의 박자. <부산행> 속 그 유명한 석우(공유)의 플래시백 장면부터 시작하여 <반도> 등에 이르기까지 연상호의 (게으른) 연출 중 하나로 지적돼온 슬로모션 기법과 크게 다르지 않다. 즉 연상호가 의도적으로 칼날을 촉수로 바꿨고, 그 이유가 본인이 줄곧 해오던 연출을 고수하기 위한 최선책이었단 발상이 떠오르게 된다.
연상호는 본인을 향했던 비판에 굴하지 않고 자기만의 방식을 하나 더 밀어붙인다. 그의 실사영화에 자주 가해진 지적은 단조로운 표정 연출이었다. <부산행>은 “장르영화가 요구하는 정확한 감정 지시와 패턴화된 표정”(송경원, <씨네21> 1067호)을 드러내는 정도에 그쳤으며, 외려 연상호가 <돼지의 왕> <사이비> 등 애니메이션에서 보여준 조악한 무표정이 훨씬 큰 감정적 감흥을 준다는 의견이 그의 실사 극마다 따라다녔다.
<기생수: 더 그레이>는 이러한 지적에 대놓고 반항하듯 인물들의 무표정을 아예 무한정 지속해버린다. 원작 설정에 따라 기생생물은 인간의 표정을 지을 줄 모른다. <기생수: 더 그레이>도 마찬가지다. 무표정으로 일관하며 거의 교조에 가까운 인류학적 철학을 읊는 기생생물들의 태도는 마치 연상호식 실사 연출의 극대화라고 여겨지기까지 한다. 복합적인 표정과 사유를 아예 소거해버리고 정해진 대로 달리는 장르의 엔진, 그리고 이 엔진을 불시에 꺼버리는 황당한 휴머니즘의 지연들로 <기생수: 더 그레이>가 완성된다.
연상호의 뚝심을 한결같은 게으름이라 해야 할지 지독한 철학이라 해야 하지 헷갈릴 지경이지만 후자에 약간의 무게를 싣고 싶다. <기생수> 작가 이와아키 히토시는 단행본 속 작가의 말에서 “재미있는 영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의 생물처럼 일관성이 있다. 만든 사람이 원작을 완전히 자기 피와 살로 흡수한 후 확신을 지니고 표현하기 때문일 것이다. 정열 없이 원작에만 의지하는 것은 졸작의 원인”이라고 밝힌 바 있다. <기생수: 더 그레이>를 재미있는 작품이라고 단언할 순 없다. 원작을 적극적으로 각색하되 더 훌륭하게 만들 방식이 있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연상호가 <기생수>란 세포를 자기 피와 살로 흡수했다는 점만은 부정하기 어렵다. 본인이 가장 사랑해 마지않을 걸작 <기생수>를 과격하게 훼손하여 자신의 일관된 연출적 자장으로 끌어들인 것이다.
만화는 만화의, 애니메이션은 애니메이션의, 실사 극은 실사 극의 규칙만을 따라야 할까. 남들이 바라는 각 매체의 장점과 기능을 뒤따르는 것이 과연 창작자의 올바른 태도일까. 적어도 연상호는 얄궂을 정도로 매번 남들의 기대를 배반하며 각 매체의 장점을 도장깨기 하듯 죽이고 있다. 실사 액션의 쾌감도, 살아 있는 인간의 표정도, 진중한 철학도 모두 탈락해버린 <기생수: 더 그레이>에 남은 것은 사실상 연상호란 창작자의 존재감뿐이다.
연상호의 지배력
조금 과격한 표현이지만 연상호는 <기생수> 속 기생생물을 닮았다. <기생수>에서 주인공 이즈미 신이치의 오른손에 깃든 기생생물 ‘오른쪽이’는 동체의 상처를 봉합하던 중 자기 신체의 30%를 두고 와버린다. 결국 신이치의 몸에 기생생물의 DNA가 섞이면서 그는 인간과 기생생물 사이에서 정신적 해리를 겪는 동시에 초인적인 힘을 발휘하게 된다. 연상호도 비슷하다. 애니메이션의 신체에 살던 이가 실사 극의 신체로 이전했고 이내 얼굴의 다성성과 같은 실사 극의 고전적인 가치를 침식하고 있다. 각기 다른 형식에 자신의 일부를 흘려보내며 영 다른 ‘무언가’를 만들고 있는 그의 지배력만은 새삼 놀랍다. 그 결과물이 당장은 인간과 기생생물이 절반씩 섞인 이상한 모습일지 몰라도 언젠가는 그 형태가 하나의 표준이 되어버릴 것 같은 기대 내지 공포가 엄습한다. 어쩌면 이 시도의 끝에서 실사 극(인간)의 새로운 형태 하나를 연상호(기생생물)가 완성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다만 이 시도의 종착역이 <기생수: 더 그레이>는 아니리라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