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
씨네21 추천도서 - <이건 다만 사랑의 습관>
2024-04-16
글 : 이다혜
사진 : 백종헌
안희연, 황인찬 엮음 / 창비 펴냄

“세계의 가능성을 개진하는 것이야말로 시가 가장 잘하는 일이다.” 창비시선 500번 기념 시선에 실린 엮은이의 말은, 희망과 전망이 부재하는 시기에 읽는 시의 의미를 이렇게 말한다. 안희연, 황인찬 시인이 엮은 이번 기념 시선은 401번으로 1948년생 시인 김용택의 <울고 들어온 너에게>(2016)부터, 499번으로 2000년생 시인 한재범의 <웃긴 게 뭔지 아세요>(2024)까지를 다시 읽게 한다. 좋아하는 시인의 이름부터 찾아 읽는 일도 가능할 테고, 아무 페이지를 펼쳐 운명처럼 마주하는 시를 읽어내는 시도도 좋을 것이다. 나는 엮은이가 골라 뽑은 본인의 시부터 읽어보았다. 황인찬 시인은 <내가 사랑한다고 말하면 다들 미안하다고 하더라>를 골라 실었다. “공원에 떨어져 있던 사랑의 시체를/ 나뭇가지로 밀었는데 너무 가벼웠다// 어쩌자고 사랑은 여기서 죽나/ 땅에 묻을 수는 없다 개나 고양이가 파헤쳐버릴 테니까// 그냥 날아가면 좋을 텐데,/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그날 꿈에는/ 내가 두고 온 죽은 사랑이/ 우리 집 앞에 찾아왔다(후략)” 쫓아버릴 수 없는 감정이, 죽은 줄 알았지만 다시 찾아오는 사랑이 문간에서 어슬렁거린다. 그런데 제목 “내가 사랑한다고 말하면 다들 미안하다고 하더라” 때문에, 이런 비장함과 처연함은 어딘지 블랙코미디 같은 성격을 띤다. 안희연 시인의 <슈톨렌>은 죽음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한 뒤, “(전략) 아니야 나는 기다림을 사랑해/ 이름 모를 풀들이 무성하게 자라는 마당을 사랑해/ 밥 달라고 찾아와 서성이는 하얀 고양이들을/ 혼자이기엔 너무 큰 집에서/ 병든 개와 함께 살아가는 삶을// 펑펑 울고 난 뒤엔 빵을 잘라 먹으면 되는 것/ 슬픔의 양에 비하면 빵은 아직 충분하다는 것(후략)”을 말한다. 봄빛에 어울리는 정희성의 <연두>, 책들 사이에서 잠드는 밤에 꿀 법한 꿈같은 이근화의 <세상의 중심에 서서>, 선거철에는 눈길을 주지 않을 수 없는 송경동의 <우리 안의 폴리스라인>, 잠들지 못하는 밤이면 점등하는 불빛처럼 어른거리는 안미옥의 <캔들>을 비롯한 시들이 실렸다.

유수연, <미래라는 생각의 곰팡이>, 150쪽

성장하는 건 역시 끔찍한 것이군

멋쩍은 듯 던져진 것이

종일 땅으로 떨어지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