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2]
[기획] 솔로 앨범 《관능소설》 발매한 김윤아 ② 갈망이 낳은 글과 노래
2024-05-18
글 : 정재현
사진 : 최성열

- 2019년 세상의 모든 사랑을 테마로 한 <사랑의 형태>라는 콘서트를 연 적 있다. 에리히 프롬의 <사랑의 기술>을 비롯해 사랑에 관한 여러 텍스트를 노래와 엮은 공연이었다. 이 공연이 사랑 노래를 엮은 《관능소설》의 탄생에 영향을 줬다고 볼 수 있을까.

= 사랑 노래를 채우기로 한 건 2010년 발매한 솔로 3집 《315360》부터다. 돌고 돌아 지금 사랑 이야기를 시작하기 좋은 때가 됐다. 거꾸로 《관능소설》같은 앨범을 만들고 싶은 갈망이 <사랑의 형태> 공연을 낳았다고 볼 수 있다. 2010년대 후반은 자우림에 굉장히 중요한 시기였던 터라 자우림에 집중하는 시기를 가질 수밖에 없었다. 자우림이 3인 체제가 된 후 나온 첫 앨범 10집 《자우림》(2018)은 굉장히 중요한 앨범이었다. 그리고 자우림의 11집 《영원한 사랑》(2021)이 나왔다. 요컨대 견고한 우리의 자우림을 보이기 위한 몇번의 쐐기가 필요했다. 또 자우림 결성 25주년을 맞아 여러 활동이 이어졌다. 계속 자우림과 일하는 동안 솔로 프로젝트는 진행하기 어려웠다. <사랑의 형태> 콘서트를 계기로 김윤아 스타일의 콘서트를 만들어가고 있다. 앞으로의 콘서트는 어떤 형식으로 해나갈지 고민이다. 이 자리에서 처음 밝히는데 다음 김윤아 콘서트는 술을 한잔 곁들이는 공연을 계획 중이다. 김윤아의 앨범과 공연인데 술이 빠질 수 없지 않나. 객석에서 고주망태가 되면 곤란하니 제한된 양의 음주가 가능한 공연장과 공연을 열고자 한다. 그땐 내 음악은 물론 스탠더드한 팝을 세트리스트에 포함하지 않을까.

- <관념산문>의 첫 챕터에서 여행하는 스스로를 ‘시간 여행자’라 칭한 게 인상적이었다. 왜 공간 여행자가 아닌 시간 여행자인가.

= 나라별로 시차가 다르고 경도가 바뀌니까. “우리는 중도에 있다. (중략) 우리는 끊임없이 이동하는 화살표이며 (후략)”라는 프롤로그가 있지 않나. 2년 전 즈음 어떤 거리를 걷다 내가 지금 중간에 서 있다는 사실을 불현듯 깨닫고 쓴 문장이다. 그래서 어디를 향하지 않아도 좋고, 무언가에 집착할 필요도 없으니 나는 참 자유롭다는 깨달음을 얻었다. 그 관찰이 《관능소설》의 시작이었다. 이탈리아서 여행하며 앨범 사진을 찍고 산문의 영감을 얻어오는 기획도 그날이 아니었다면 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탈리아 여행은 당시 깨달음에 바치는 여행이었다. 새 깨달음으로 새로 태어난 내게 모든 순간이 소중했다.

- 《Shadow of Your Smile》에 이어 <관념산문>에도 죽음을 소재로 한 글이 다수 포함했다.

= 글에 쓴 대로 전쟁이 벌어진 장소에 가거나 숙소 지하에 죽음의 유물이 다수 포진해 있었다. 꽃 이야기로 돌아가면, 꽃은 지기 때문에 아름답다. 같은 꽃이 1년 내내 피어 있으면 아름답다고 생각할 수 있을까. 죽음이 있기 때문에 나올 수 있는 상념이다. 우리가 중도에 있고, 어디로든 갈 수 있는 화살표라면 가장 큰 방향은 결국 죽음으로 향하는 길일 것이다. 어릴 때부터 주변에 죽은 사람이 많았다. 단순히 죽음의 경험이 많았기 때문에 사람이 죽는다는 인식이 별스럽지 않다.

- <펜과 음표, 너의 작업실>엔 신원 미상의 음악가의 새벽 작업기가 묘사돼 있다. 새벽녘 작업실에서 일에 몰두하는 김윤아의 모습은 어떤가.

= 잘 준비를 다 마치고 작업에 들어간다. 정말 잠들지 않으면 안될 한계까지 일을 하기 때문이다. 보통 잠옷을 입고 안경을 쓰고 멋대로 머리를 동여맨다. 다행히 방에서 야경이 잘 보여 통창을 앞에 두고 마감을 시작한다. 마감 노동자의 풍경이 다 비슷하지 않나. 다만 마감이 닥쳤을 땐 절대 술을 마시지 않는다. 나를 믿을 수 없기 때문에. (웃음)

- 언제나 타이틀곡을 고르는 센스가 0에 수렴한다고 밝혔다. 이번 앨범은 <종언>과 <장밋빛 인생>을 더블 타이틀곡으로 정했는데.

= 여전히 모르겠더라. 그래서 차트에 오르는 음악을 주로 듣는 회사 분들에게 모니터링을 받았다. 그런데 <종언>과 <장밋빛 인생>의 지지도가 조정의 여지 없이 반반으로 나왔다. 두곡의 분위기도 다르고 이젠 후속곡이라는 활동 개념도 사라졌으니 두곡으로 활동하기로 했다. 사실 <장밋빛 인생>을 만들 땐 혹시 이 곡이 타이틀곡이 되지 않을까 내심 생각했다. 그런데 다음날 들어보니 또 아닌 것 같고…. (웃음)

- <종언>은 오래전 만들어진 멜로디에 가사가 붙은 것으로 알고 있다. <장밋빛 인생>은 어떻게 만들어진 곡인가.

= 차를 몰고 발레 수업을 가던 중 만든 노래다. 사람이 잘 아는 길을 운전할 때나 대형 쇼핑몰에서 카트를 몰 때 뇌의 알파파가 감응한다고 하지 않나. 그럴 때 편안하고 명상하는 듯한 상태가 된다. 악상이 떠오르면 바로 휴대폰에 녹음을 한다. 그날도 지금의 가사와는 조금 다른 ‘너의 입술이 나의 낮과 밤을 붉게 물들이고’가 알파파에 의해 저절로 나왔다. 얼른 녹음해둔 뒤 집에 와 잠옷으로 갈아입고 작업에 들어갔다. 사실 처음 데모까지만 해도 “장밋빛 인생 그대와 밟는 모든 스텝이”로 시작하는 사비(후렴구)만 탱고 리듬이었다. 그런데 1주일 걸려 곡을 만들고 나니, 내가 편곡할 수 없는, 스케일이 큰 곡이 탄생했다. 하여 여러 탱고 전문가를 떠올렸다. 2집 《유리가면》에서 협업한 호르헤 칼란드렐리 선생이 떠올랐지만, 곡 자체가 앨범 작업 후반에 나와서 그가 거주 중인 미국에 다녀오기엔 시간적인 한계가 있었다. 2집 때는 내가 편곡 현장에 갈 수 없어 아쉬웠거든. 이번만은 내가 직접 가 레코딩 현장을 컨트롤하고 싶어 여러 국내외 탱고 전문가를 수소문했다. 지난해 라이브 앨범에 프랑스 곡 <행복한 사랑은 없네>를 넣은 기억을 바탕으로 프랑스쪽 편곡가를 후보에 놓기도 했다. 그런데 당시 경험에 비추어 보면 프랑스는 작업을 의뢰했을 때 회신이 오질 않는다. 늦는 게 아니고 안 온다! 에이전시를 통해 독촉하면 그제야 담당자가 바캉스에 가 있다는 통보를 받는다. (일동 웃음) 전세계적 농담인 프랑스 공무원 이야기도 있어서 프랑스도 포기했다. 그러다 지금 편곡자인 사이토 네코와 연이 닿았다. 작업을 위해 일본에 갔다. 일본 내 톱 세션들이 사이토 선생의 호출로 모였다. 처음 본 세션들과 오래 호흡을 맞춘 밴드처럼 합을 맞추어야 하는 작업이었고, 심지어 <장밋빛 인생>과 <체취> 두곡의 녹음을 하루 안에 마쳐야 하는 상황이었다. 총보(합주 시 악기별로 된 여러 악보를 한데 모아 한눈에 전체의 곡을 볼 수 있게 적은 악보. 편집자)만 본 상태에서 어떻게 곡이 완성될지 궁금해하며 녹음실에 들어갔다. 정말 소름 돋는 합주를 들을 수 있었다.

- 가사에 사용하는 외국어가 늘 곡에 맞아떨어졌다. <장밋빛 인생>의 프랑스어 가사는 왜 필요하다고 판단했나. 동명의 제목을 가진 에디트 피아프의 샹송이나 이번 앨범에 영향을 준 다수의 프랑스영화와 관련이 있을까 추측해봤다.

= 장밋빛 인생(La vie rosée), 키스해줘(Embrasse-moi), 사랑해(Je t'aime), 꼭 끌어안아줘(Serre moi fort). 국어로 하면 소절이 길어지고, 영어보단 프랑스어가 음과 잘 붙는 가사였다. 무엇보다 ‘La vie rosée’는 자연스럽게 딸려나온 가사라 아무리 궁리해도 대체할 언어가 없었다. 실제 프랑스어를 모국어로 사용하는 화자들이 다행히 이 표현을 오글거려하지 않았다.

- <행복을 바라는 게 잘못인가요>를 만들 땐 수많은 멜로영화를 끝없이 주입해 뇌를 일시적인 가상 연애의 상태로 만든 후 작업했다고. 이전에도 이런 방식의 양적 공세를 통해 곡을 만든 적 있나.

= 없다. 가끔 배우들이 연기를 마치면 배역에서 빠져나올 때 힘들다는 이야기를 하지 않나. 이 곡을 만들 때 그랬다. 곡 작업을 마친 뒤 정신적으로 괴로워 스스로 정상이 아닌 것 같다고 토로할 정도로 힘들게 만들었다. 작업량도 감정의 강도도 쉽지 않았다. 영화를 통해 가짜 호르몬을 만들어 사랑을 느끼는 뇌를 만들었다. 더이상 가짜 사랑의 주입이 필요 없는, 곡을 만든 이후 수행하는 기술적인 과정 중 짙은 연애의 농도가 뇌 속에서 유지되다 뚝 떨어져 금단증세와 같은 괴로움이 있었다. 지금은 《관능소설》과 거리를 두는 상황이다. 어떤 앨범이든 다 만들고 얼마의 시간이 지나면 한동안 내 피, 땀, 눈물이 서린 작업물과 거리를 두고 시간이 더 흘러야 과거의 작업물에 놀라는 순간이 비로소 온다.

- 관찰 예능프로그램이 김윤아를 소비하는 방식에 불만을 가질 때가 있다. 꼭 집안일과 살림을 하는 김윤아의 이미지를 보이려 한다. 물론 아티스트 김윤아의 일상을 구성하는 요소 중 하나겠지만 동일 경력, 연령의 유자녀 기혼 남성 아티스트라면 사생활과 관련한 질문을 덜 받을 것이고, 다른 숏에 담길 것이며 다른 에피소드를 요구받을 것이다. 결혼 이후 김윤아의 삶을 담은 <해피엔딩>은 김윤아를 보는 여러 양태에 대한 화답처럼 들리는데.

= 이제는 화도 나지 않는다. (웃음) <해피엔딩>은 여성으로서 나의 경험이 온전히 담긴, 솔로 앨범이 아니면 만들 수 없는 노래다. 실제로 노래의 가사처럼 설거지하며 분해서 운 적이 많았기 때문에 수많은 여성 동료들에게 바치는 곡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내 노래 중 <Girl Talk> 같다는 생각도 했다. 최근 다른 인터뷰에서 아이를 키우면서도 계속 활동하는 여성으로서 여성 동지들에게 “쟤도 저렇게 하는데 나도 할 수 있지 않을까”에서 “‘쟤’가 되고 싶다”고 밝힌 적 있다. 그때 꼭 ‘쟤’라고 써달라고 했다. 이 노래도 마찬가지다. 자매들이 노래를 듣고 “‘쟤’도 자유를 찾아 날아가는데 나 또한 ‘쟤’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면 좋겠다. 《유리가면》 발매 당시 한 유력지에서 심지어 큰 지면을 할애해 ‘김윤아는 탱고의 유래를 알고 이 음악을 만들었나’라며 탱고의 근원에 관해 왜곡된 관점의 근거 없는 지식을 써낸 적이 있다. 탱고가 성 노동자의 음악에서 유래했는데 여자인 김윤아가 감히 그런 음악을 만들었다는 요지의 글이었다. 질문과 닿은 맥락에서 만약 내가 밴드의 남성 보컬이었다면, 밴드의 프런트맨으로 11장의 정규앨범을 내고 개인 작업물로 5장의 정규앨범을 냈다면 지금 듣는 평가보다 훨씬 우호적인 평을 받고 있을 거라 생각한다. 그래서 계속 하려 한다. 어떻게 되나 보려 한다. 다시 한번 “‘쟤’도 저렇게 하는데 나도 할 수 있지 않을까”의 ‘쟤’가 되고자 한다. 나는 나를 위해 음악을 하는 사람이라고, 내 생각은 내 음악에 들어 있다고 말하며 공고하게 끝까지 살아 있으려 한다.

<데미지>

“이유 없이 아름다운 영화. 또 피가 나온다. 김필씨와 듀엣한 <카멜리아>를 만들기 위해 이 영화를 처음 보았다. 어쩐지 지루할 것 같아 손이 가질 않았거든. 처음엔 스티븐(제러미 아이언스)과 안나(쥘리에트 비노슈)처럼 나보다 훨씬 연상의 남성과 함께 부를 곡을 만들 것을 염두에 두고 시청했다. 이 영화가 정답이었다. 가상 연애에 빠진 내 뇌가 잔잔한 바람에서 큰 태풍으로 변한 게 <데미지>를 본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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