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타]
[인터뷰] 청춘, 무르익다, <청춘 18X2 너에게로 이어지는 길> 배우 허광한
2024-06-04
글 : 이유채
사진 : 최성열

해임 뒤 완전히 소진된 채로 본가를 찾은 게임 회사 대표 지미(허광한)는 그림엽서 한장을 발견한다. 엽서의 발신인은 고등학생 시절, 고향 노래방에서 잠시 함께 일했던 일본인 배낭 여행객 아미(기요하라 가야)다. 찬란했던 옛 추억은 쇠락한 심신을 깨우고 지미는 돌연 아미의 고향으로 향하는 여정을 떠난다. <상견니>로 대만 로맨스물의 얼굴이 된 배우 허광한이 5월 22일 개봉작 <청춘 18X2 너에게로 이어지는 길>로 돌아왔다. ‘청춘’이란 제목과 첫사랑에 관한 줄거리는 그가 쉬운 길을 선택한 게 아닌가 하는 오해를 살 법하지만 극 중에서 그는 분명 익숙함과 거리를 벌린 연기를 선보인다. 무엇보다 이전에 본 적 없는 허광한의 어둠이 깊이 내려앉은 얼굴은 그가 이제 체념과 안정이 뒤섞인 30대 청춘의 초상으로도 부족함이 없음을 알린다. 지난 5월23일 <청춘 18X2 너에게로 이어지는 길>로 내한한 허광한을 <씨네21>이 국내 매체 중 가장 먼저 만났다. 인터뷰 룸에 모인 이들에게 정중히 인사를 건네고 신중히 답을 고르던 허광한은 주변의 텐션을 높이는 햇살 캐릭터일 거란 예상과 달리 물안개 핀 호수처럼 안정을 선사하는 사람이었다. 그와 마주 앉아 영화 이야기뿐만 아니라 그간 외모에 가려졌던 배우로서의 허광한을 조명하는 시간을 가졌다.

- 일본·대만 합작 프로젝트 <청춘 18X2 너에게로 이어지는 길>에 어떻게 참여하게 됐나.

= 몇 년 전 처음 출연을 제안받았을 때, 여행 에세이가 원작이란 얘길 듣고 흥미로웠다. 평소 실화를 바탕으로 한 작품에 관심이 많다 보니 이 이야기가 어떻게 영화로 만들어질지 계속 궁금해하면서 기획 개발 과정을 지켜봤다. 결국 해봐야겠다는 쪽으로 마음이 기운 건 시간이 좀 흐른 뒤 이 작품의 총괄 프로듀서로 참여한 장쳰 배우에게 직접 연락받고서였다. 장쳰 선생님과 대화할수록 도전해볼 만한 작품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시나리오가 단순한 러브스토리가 아닌, 어른이라면 이해할 수 있는 넓은 이야기로 읽힌다는 점도 매력적이었다.

- ‘어른이라면 이해할 수 있는 이야기’에 대해서 좀 더 설명해줄 수 있을까.

= 우리 영화의 특별한 점은 주인공이 첫사랑과 함께 한 짧았던 젊은 시절의 행복함뿐만 아니라 그 이후 삶에서 겪는 어려움까지 담아낸다는 거다. 내가 연기한 지미는 천진한 10대 시절을 통과해 게임 회사를 창업하고 바쁜 일상에 치이다가 서서히 삶의 의미와 본래의 자신을 잃고 만다. 그런데 이러한 과정이 지미만 겪은 특별한 경험일까. 우리 모두 이런 세월을 거쳐 어른이 되었기에 보편적으로 공감할 수 있는 내용이라 여겼다. 이제야 청춘의 시간을 떠올리며 스스로를 되찾는 여정을 떠나는 지미를 통해서 나도 관객도 힐링의 순간이 찾아오길 바랐다.

- 일본어가 서툴던 18살의 지미는 아미와 가까워지고자 일본어를 공부하고 성인이 되어서는 유창한 실력에까지 이른다. 외국어로 연기하기까지 어떤 과정을 거쳤나.

= 일본어 대사 분량이 워낙 많다 보니 기본적으로 단어 하나하나의 정확한 의미를 파고들려고 하진 않았다. 대사가 도무지 잘 외워지지 않는다 싶으면 몸에 단어를 저장한다는 느낌으로 통으로 외우기도 했다. 관건은 발음이었다. 36살일 때는 더욱 정확하게 발음하려고 신경 썼고, 일본인다운 자연스러운 말투란 무엇일지 연구했다. 작품 외적으로는 일본 배우들과 붙는 신이 어딘가 이상하거나 어색한 느낌이 들지 않도록 균형감을 찾고자 했다.

- 후지이 미치히토 감독, 기요하라 가야 배우뿐만 아니라 주요 스태프 대부분이 일본인이었다. 언어적 소통이 쉽지 않았을 것 같은데.

= 서로 적응할 시간이 필요했던 초반을 제외하면 유능하신 통역사분들 덕분에 소통이 어렵지 않았다. 한 에피소드가 특히 기억난다. 대만 현장에서는 보통 따뜻한 도시락이 제공되는 반면 일본 도시락은 대체로 차가워서 신기했다. 이렇게 서로 다른 문화를 체험하고 알아가는 게 즐거웠고 매우 의미 있는 일로 기억될 것 같다.

- 지미의 어리숙함을 너르게 받아내던 기요하라 가야 배우와의 합이 좋더라. 현장에서 그가 어떤 에너지를 가진 동료로 느껴졌나.

= 처음 만났을 때는 ‘와! 너무 귀엽다’라고 생각했고, 나이를 듣고 나서는 ‘와! 정말로 어리다’라고 생각했다. (웃음) 함께 연기하면서 가야 배우가 나보다 훨씬 어리다는 걸 느낀 적이 없었다. 겉으로는 순순하고 낭만적으로 보일지라도 내면이 성숙하다. 그가 상대에게 먼저 안정감을 만들어주는 배우였기 때문에 내가 극 중 상황에 빠르게 몰입할 수 있었다.

- 그렇다면 후지이 미치히토 감독은 어떻게 기억하나. 메이킹 영상을 봤을 땐 살뜰한 사람이라는 인상을 받았다.

= 감독님은 독특한 방식으로 배우를 이끄는 연출자다. “지금은 깊은 밤의 느낌을 원합니다”, “갓 태어나 세상에 처음 온 느낌을 상상해보세요”와 같은, 배우에게 공간을 떠올리게 하는 디렉션을 주셨다. 이런 주문이 상상력을 자극하고 그 안에서 내가 하고 싶은 연기를 자유롭게 해볼 수 있어 신기하고 좋았다.

- 36살의 지미는 큰 슬픔을 외면하기 위해 자신을 괴롭히다가 결국 메말라버린다. 촬영 기간 동안 이런 인물의 정서를 유지하는 게 버겁진 않았나.

= 힘들었다. 이 부분에 관해서는 잠시 생각할 시간을 가져도 될까. (테이블 위에 깍지 낀 손을 올려놓고 잠시 고민하다가) 음, 한 캐릭터를 살아 내다보면 그의 경험과 감정을 통해 나를 돌아보게 된다. 예컨대 지미는 뭔가를 피하면서 고통스러워한다. 배우인 나는 지미가 되어 그가 외면하는 상황에 들어가 보고 그의 고통도 느껴본다. 그런 뒤 현실로 옮겨 가면 어김없이 이런 생각에 빠진다. ‘혹시 나도 뭔가를 피하고 있는 건 아닐까? 그렇다면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까?’ 이런 식의 공감하는 과정을 반복하다 보면 어느새 맡은 인물과 가까워졌다는 걸 느낀다.

- 지미와 자신이 유독 겹쳐 더 힘들었다는 얘기처럼 들린다.

= 그럴 수도 있을 것 같다. 지미와 같은 일을 겪었다는 건 아니고, 나 역시 당장의 상황이나 자기감정을 피하고자 일에 몰두하는 경향이 있으니 말이다. 그러나 이런 현실 외면적인 워커홀릭 성향은 사실 누구나 가지고 있을 거다. 다만 스스로 모를 뿐이다. 그러니 우리 영화를 보며 알아채야 한다. (웃음)

- <상견니>에서 이미 10대 후반의 남학생을 연기한 적 있어서 이번 작품에서는 그와 구분되는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는 과제가 있었다.

= 18살 지미는 리쯔웨이(<상견니>)와 비교했을 때 확실히 더 내향적이고,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애 같은 측면이 있다. 그래서 열여덟의 지미를 연기할 때는 애매모호함을 특징으로 잡고 그 어중간한 톤을 제대로 표현하고자 했다.

- 아미를 ‘지미의 첫사랑’이란 말로 정의하기에는 부족할 것 같다. 지미에게 아미는 어떤 존재라고 생각하면서 연기했나.

= 청춘. 실제 연기할 때도 아미를 첫사랑으로 특정하진 않았다. 누군가를 향한 감정이 솟구치고, 그가 내게 완벽한 사람처럼 느껴지는 시절. 제대로 된 연애도 아니고 아쉬움만 가득하지만 그래서 마음속에 더 오래 남는 청춘의 아름다운 순간을 지미가 찾아가는 거라고 생각했다.

- 연기적으로 인상적이었던 몇 장면에 관해 묻고 싶다. 지미가 아미의 고향을 방문하는 후반부는 감정과잉의 유혹이 도사리는 부분인데 굉장히 담담하게 연기했더라. 그렇기에 아미의 그림일기를 읽으며 지미가 울음을 터뜨리는 장면의 정서적 파장이 무척 셌다.

= 사실 이 부분은 시나리오상에서 완벽했기 때문에 고스란히 살려보고 싶었다. 여기에 내 해석을 더하면 여행을 떠나기로 마음먹었을 때부터 지미는 자신과 화해할 준비를 어느 정도 마쳤다고 봤다. 아미의 고향에 이를 때쯤엔 그 결심이 더욱 단단해졌을 테니 평정심도 더 강해졌을 거고. 그렇다 하더라도 옛 시절이 그대로 보존된 아미의 방에서 아미의 그림일기를 펼쳤을 땐 어쩔 수 없었을 거다. 평정심 아래에 눌러두었던 아미를 향한 감정과 그 시절의 기억이 모두 터져 나왔을 거다. 나는 그 순간의 지미를 완전히 무너진 게 아니라 그동안 쌓인 감정을 모조리 해소함으로써 어떤 해방에 이른 상태의 인물로 표현하고 싶었다.

- 그렇게 말하니 돌아가는 기차 안에서 아미에게 편지를 쓰는 지미의 표정이 왜 그토록 편안해 보였는지 이해가 간다.

= 평온한 상태에서 아미에게 마지막 고백 편지를 쓴다. 딱 그것에만 집중해서 임했던 기억이 난다. 그게 전부인 동시에 사실 그 신의 촬영 시간이 매우 촉박해서 그럴 수밖에 없었다. 실제로 기차가 움직이고 있었고 역에 도착하면 바로 내려야 했다. 이런 식의 로케이션 신이 많았던 터라 모두가 단시간에 집중해서 촬영했던 것 같다. 덕분에 현장에서 몰입하는 법을 배웠다.

- <청춘 18X2 너에게로 이어지는 길>의 핵심적인 대사를 꼽자면 “여행은 무슨 일이 생길지 몰라 즐겁다”일 거다. 흔히 인생을 여행에 빗대기도 하고.

= 인생은 여행이라는 말에 아주 동의한다. 그 긴 여행에서 가족과 친구는 주변 풍경이 된다. 가다 보면 슬픔을 느낄 수밖에 없는 지점에 이르기도 하고 삶이란 내가 혼자서 책임져야 한다는 걸 깨닫는 순간도 온다. 물론 뜻밖에 재미난 일이 벌어질 수도 있다. 내 경우 그게 바로 배우였다. 지금 와서 배우가 아닌 나를 상상하기란 힘들다. 어디로 출퇴근하거나 가게 문을 여는 내 모습이 그려지지 않는다. 배우가 되었기에 나는 재밌는 이야길 만나고 평소에 가지 못하는 곳을 가고 있다. 그렇기에 감사하게도 제대로 된 여행길을 걷고 있다고 생각한다.

겸손하게 전진하기

- 데뷔한 지 10년이 넘었으나 여전히 배우로서의 허광한은 덜 탐구되었다는 인상이다. 그래서 간단히 몇 가지 묻고 싶다. 시나리오에서 무엇을 중요하게 보나.

= 시놉시스는 대본이든 중요한 건 전체적인 줄거리가 지금 나에게 재미를 주고 있느냐의 여부다. 만약 그렇다면 내용의 세부 사항을 들여다보고 구성과 캐릭터의 면면을 살핀다. 그렇게 읽다보면 장점이 계속 발견되는 작품이 나타나고, 이걸 꼭 하고 싶다는 마음도 덩달아 커진다. 결국 단계적이고 종합적으로 나를 끌어당기는 작품을 선택하는 편이다.

- 맡은 역할에서 빠져나오기 어려워하는 편인가.

= 음, 당연하게도 끝나자마자 즉시 빠져나오기도 몇 주 동안 캐릭터와 함께 지내기도 한다. 다만 어떤 역할이든 작별 인사를 한다고 해서 사라지는 건 아니다. 나는 내가 연기한 인물들을 다 내 마음속 서랍 안에 하나씩 넣어 놓았다. 다만 때때로 열어 보거나 영원히 열지 않는 차이가 있다.

- 지미는 어디에 해당하나.

= 지미는 아직 서랍에 넣고 싶지 않다. (웃음)

- 현장에서 즉흥적인 편인가.

= 앞서 시나리오를 신중히 고른다고 말한 만큼 그렇게 선택한 시나리오를 배우로서 충실히 살리는 걸 우선시한다. 그런데 찍다 보면 이런저런 아이디어가 떠오르기 마련인데 그럴 때면 감독님께 적극적으로 의견을 드리는 편이다. 물론 그것을 쓰느냐는 감독님의 몫이고.

- 많은 감독이 허광한 배우에게 미성년부터 성년까지 소화하는 역할을 맡겨 캐릭터가 성장하는 모습을 지켜보려 한다는 점이 흥미롭다. 왜 이런 역할에 자신이 계속 호명되는 것 같나.

= (고개를 저으며) 정말 모르겠다. 베이비 페이스? (웃음) 동안으로 낳아준 어머니 덕분이라고 생각한다.

- 최근 필모그래피에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 <팔계: 결전미래> 등 애니메이션 더빙 작품이 들어온 게 눈에 띈다. 더빙하면서 새롭게 배운 것이 있다면.

= 우선 더빙 연기는 영상 연기와 완전히 다른 영역이라는 걸 실감했다. 이번에 더빙하면서 목소리를 상황에 맞게 연출하는 법, 톤과 형태를 디테일하게 조절하는 법을 배웠다. 아마 전체적인 연기력을 키우는 데 도움이 됐지 않았을까 싶다. 여기서 익힌 것들을 잘 기억해뒀다가 내 영역에서도 잘 활용해볼 생각이다.

- 최근 다른 인터뷰에서 가장 좋아하는 영화로 <시계태엽 오렌지>와 <트레인스포팅>을 꼽았더라. 영화 취향이 궁금해지는 목록이다.

= 많은 영화가 선한 영웅 캐릭터를 내세우고 그가 예정된 해피엔딩으로 향하는 모습을 관객이 순순히 지켜보게 하는데, 두 작품은 끊임없이 관객을 옳고 그름에 관해 생각해보게 한다. 반대의 지점을 만들어주는 작품에 흥미를 느낀다. 깊이와 철학, 재미를 고루 갖춘 리안 감독의 영화들도 여전히 매우 좋아한다.

- 2023년엔 <메리 마이 데드 바디>로 제60회 대만금마장영화제 남우주연상 후보에 오르는 경사가 있었다. 데뷔 10주년을 맞은 해에 얻은 성과가 허광한 배우에겐 어떤 의미였나.

= (잠시 고민하다가) 후보에 이름이 올라가는 건 커다란 인정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노미네이션 소식을 들을 때마다 그간의 노력을 인정받는 것 같아 기쁘다. 다만 그러한 영광스러운 이력에 대해 최대한 생각지 않으려고 한다. 지금 찍는 작품에 집중하기 위해선 그런 자세가 필요하다.

- 과거를 잘 돌아보지 않는 편인가 보다.

= 음. 그건 가끔? 어차피 이미 일어난 일들은 내가 바꿀 수 없지 않나. 그렇니 앞을 보는 게 가장 현실적인 선택이자 자신에게 가장 좋은 성장법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과거에 남겨둔 많은 아름다운 추억들은 안고서 말이다.

- 그렇다면 캐릭터의 전사도 별로 상관하지 않나.

= 그건 또 다르다. 내 경우 어떤 캐릭터를 맡으면 꼭 그에 대한 첫인상이 생긴다. 그걸 바탕으로 인물이 이전에 어떤 사건과 상황을 겪었을지를 대본에 없더라도 상상해본다. 그런 과정을 거치면 인물의 내면 변화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 앞을 향해 달리는 허광한 배우의 하반기 계획이 기대된다.

= 영화 촬영을 준비 중이고 이미 찍어둔 한국 드라마(<노 웨이 아웃: 더 룰렛>)의 홍보 일정도 잡혀 있다. 촬영하면서 한국 스태프들에게 좋은 대우를 받았고 한국 팬들의 사랑도 다시금 많이 느꼈다. 한국어를 제대로 배워보고 싶다는 의지가 생겼다. 빨리 열심히 공부해서 나를 사랑해주는 이곳의 팬들과 직접적으로 소통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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