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타]
[인터뷰] 누구나 공감할 만한 그리움, <청춘 18×2 너에게로 이어지는 길> 후지이 미치히토 감독
2024-06-04
글 : 이자연

후지이 미치히토 감독은 배우 심은경이 주연을 맡은 <신문기자>(2019)로 국내에 친숙하게 알려졌다. 이후 <우주에서 가장 밝은 지붕> <남은 인생 10년> 등 인간의 감정을 나지막이 추적하는 밀도 높은 작품을 선보였다. 이번에는 청춘물이다. 우연히 만난 여행자 아미(기요하라 가야)에게 첫눈에 반한 지미(허광한)는 36살, 다시 그때의 기억을 되돌리기 위해 긴 여행을 떠난다. <슬램덩크> <러브레터> 등 90년대 말을 추억하는 다양한 조각을 좇아 관객들은 금세 지미의 호시절로 돌아간다. 많은 사람이 북적이는 식탁, 간질거리는 오후의 시간들, 평온한 여행지. 무언가 이유 없이 그리워지는 다정한 풍경 속에 한국을 찾은 후지이 미치히토 감독을 만났다.

- 블로그로 연재됐던 에세이가 대만에서 큰 인기를 얻어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원작의 어떤 점이 영화화하기 좋다고 생각했나.

= 오래전부터 아시아를 무대 삼은 영화 작업을 꿈꿔왔다. 그러다 <신문기자>로 영화제에 갔을 때 장첸 프로듀서로부터 연출 제안을 받았다. 그 당시 시점으로 영화를 완성하면 36살이 되어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지미와 같은 나이다. 그게 하나의 연결고리이자 인연처럼 느껴졌다. 나와 지미는 비슷한 지점이 많았다. 20대가 되어서는 10대 시절의 기억을 전부 잊고 오로지 일만 하면 앞만 보고 달려왔다. 이 영화를 다 마치고 나면 내가 그동안 잊고 지냈던 만남과 기억을 다시 성실하게 마주할 수 있을 거란 느낌이 들었다. 특히 원작은 누구나 공감할 정도로 보편성이 컸다. 바다 건너서도 모두가 이해할 거라 믿었다.

- 영화는 원작과 어떻게 다른가.

= 원작은 첫사랑에 관해 더 순수한 스토리를 갖고 있었다. 자유롭게 각색해도 된다는 원작자의 답을 듣고 나만의 상상을 더했다. 극 중 지미가 완성한 게임은 실제 그의 친구인 브라이언이 만든 작업물이다. 브라이언의 이야기를 자세히 취재하면서 원작의 오리지널리티를 높였다. 나중에 이 이야기의 주인공이자 원작자인 지미가 영화를 보고서 “반은 나의 이야기이고 반은 브라이언의 이야기다”라며 바뀐 부분을 긍정적으로 좋아해줬다.

- 일본과 대만 합작을 기획하면서 고민이 깊었을 것 같다. 첫 글로벌 프로젝트인데.

= 그동안 일본에서만 영화 작업을 해왔기 때문에 해외 합작은 어떤 문제를 대비해야 하는지 잘 몰랐다. 그 미지의 상태가 걱정이었다. 일본에서 하듯이 하면 안될 거라는 불안도 컸다. 환경 자체가 다르기 때문에 거기에 맞춰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대만의 영화제작 시스템이 내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더 유연했다. 현지 팀원들도 내 의견을 경청해줬다. ‘합작 영화를 이렇게까지 스트레스 없이 만들 수 있구나’ 생각할 정도였다. 다만 어려움을 꼽자면 촬영 전까지 줌 회의를 거듭했는데 그 과정에서 미팅 시간이 두배가 되었던 건 조금 힘들었다.

- 대만을 선택한 이유는.

= 일단 대만엔 내 가족적인 뿌리가 있다. 또 유학을 했던 곳이라 정서적으로 친밀했다. 대만을 시작으로 한국, 중국, 싱가포르, 인도네시아 등 아시아 전역으로 합작 가능성을 넓히고 싶다.

- 영화는 여행을 주요 키워드로 선택한 만큼 각 지역의 아름다운 풍경을 드넓게 드러낸다. 풍경을 조명하기 위해 촬영에 어떤 점을 가장 신경 썼나.

= 영화 속에 설경이 드넓게 펼쳐진다. 영화 기획서를 받았을 때 그 안에 눈밭을 지나는 기차 사진 한장이 포함돼 있었다. 그걸 보고 이게 영화를 상징하는 이미지구나, 생각했다. 그만큼 여행이라는 키워드가 무척 중요한 작품이었다. 이 아름다운 겨울 풍경을 보여주기 위해 콘트라스트 대비를 중요하게 여겼다. 다만 관광 무비가 되지 않도록 지역 곳곳의 일상적 공간을 여행자의 시선으로 비추려 했다. 사실 나는 내 작품에 장소를 크게 강조하는 편이 아니다. 하나의 배경으로 자연스럽게 두고 싶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번 영화는 내게도 새로운 시도였다. 평소 당연하게 여기는 것들을 이방인의 시선으로 보면 모두 낯설고 생경하게 느껴지지 않나. 우리가 핸드폰을 보느라 놓친 풍경이 사실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느끼게 해주고 싶었다.

- <청춘 18×2 너에게로 이어지는 길>에는 영화 <러브레터>, 만화 <슬램덩크> 등 90년대 대중문화가 자주 등장한다. 이외에도 향수를 불러일으킬 요소로 다른 후보군이 있었나.

= <러브레터>와 <슬램덩크>는 에세이에 실제 지미가 좋아하는 것이라고 나와 있는 것들이다. 이외에도 게임 <파이널 판타지>가 언급돼 있어 넣으려 했지만 최종적으로 뺐다. 그 당시 대만에는 <파이널 판타지>가 해적판밖에 없던 터라…. (좌중 폭소) 게임사의 허가를 받지 못한 <드래곤 퀘스트>도 빠졌다.

- 특히 <슬램덩크> 속 명대사를 읊는 지미의 모습은 여자애 앞에서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자랑하고 싶은 보통 10대 남자애 같았다. 따로 디렉션을 주었나.

= 엄청 멋져 보이려 노력하지만 하나도 안 멋진 포인트를 살려달라고 했다. 그런데 나도 허광한 배우가 그 장면을 그렇게까지 잘 살릴 줄 몰랐다. (웃음) 아마 허광한 배우가 조금이라도 더 어렸더라면 그런 연기가 나오지 못했을 것이다. 청소년기는 아직 자아가 완성되지 않아 확신이 없지만 남들에겐 멋져 보이고 싶은 시기다. 이때 자기 행동이 얼마나 겸연쩍고 웃긴지는 그 시기를 통과해본 사람만이 안다. 만약 진짜 10대 배우에게 시켰다면 어땠을까. 잘 표현이 안됐을 것 같다. 못난 시기를 완전히 지났기에 웃으면서 연기할 수 있는, 편하게 훌훌 털어버릴 수 있는 배우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늦잠 잔 지미가 계단을 쿵쿵쿵 내려와 엄마 탓을 하는 장면도 그렇다. 이 시기의 모습을 자연스럽게 보여주고 싶었다.

- 이번 작품에서 허광한 배우는 10대부터 30대까지 넓은 나이대를 연기한다. 이 과정에서 그에게서 어떤 힘을 느꼈나.

= 나는 처음부터 18살의 지미와 36살의 지미를 한 사람이 연기하길 바랐다. 그때 사람들이 “허광한 말고는 없는데?” 하더라. 10대의 순진무구한 모습부터 30대 중반의 무뎌진 감정까지 스펙트럼이 넓은 배우로 그가 꼽혔다. 그리고 첫 만남에 나도 반했다. (웃음) 그에게 꼭 지미를 맡아달라고 부탁했고 그 역시 흔쾌히 응해줬다. 촬영장에서 보이는 그의 진중한 연기는 독보적이었다. 젊을 땐 무게중심이 위에 있어서 늘 조급하고 불안하다. 목소리가 높고 안절부절못한다. 시간이 지나 경험이 쌓이면서 무게중심이 아래로 내려가면 차분해지고 안정된다. 그 변화를 허광한 배우가 눈부시게 보여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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