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2]
[기획] 음미하는 영화의 온기 어린 풍미 - 트란 안 훙의 뭉근한 신작, <프렌치 수프>가 담아내는 것
2024-06-20
글 : 이유채

<거미집> <사랑은 낙엽을 타고> <나의 올드 오크> <추락의 해부> <키메라> 그리고 현재 <존 오브 인터레스트>까지 2023년 칸영화제의 영화들이 또렷한 발자국을 낸 한국 극장가에 <프렌치 수프>가 환호를 이어갈 다음 차례를 기다리고 있다. 1993년 데뷔작 <그린 파파야 향기>로 황금카메라상을 탄 지 20년 만에 트란 안 훙에게 다시 감독상을 안겼음에도, <프렌치 수프>가 많은 관객과 만나기 위해서는 넘어야 할 산이 만만치 않다. 음식 소재라는 익숙함, 올드보이의 작품이 주는 안정성에 가려져 준수한 복귀작 그 이상의 평가를 받지 못할 소지가 있다. 하지만 <프렌치 수프>는 영화 속 프랑스 요리처럼 오랜 시간을 들여 음미해야 느껴지는 깊은 풍미의 영화다. 요리사는 식재료 하나하나를 긴 호흡으로 마주하고, 트란 안 훙 감독은 요리의 힘을 빌려 대체할 수 없는 것에 대한 사유를 이어간다. 시간을 녹여 만든 요리와 그것을 응시하는 영화. <프렌치 수프>의 깊은 맛이 다소 아쉬웠던 감독의 전작 <이터너티>에 실망했던 이들의 마음까지 돌려세울 수 있을까. 여기 참을 수 없을 만큼 아름답고 매혹적인 시간의 요리를 전한다.

키친은 전쟁터다. 뜨거운 불과 흥건한 물, 언제든 무기가 될 수 있는 갖가지 조리 도구뿐만 아니라 실수하기를 기다리는 것만 같은 엄격한 셰프가 있다. 거기다가 밖에는 굶주림으로 한껏 예민해진 손님들이 보상을 바라듯 최고의 음식을 기다린다. 살벌한 요리 서바이벌 프로그램과 요식업자의 치열한 생존을 담은 콘텐츠가 흥하고 영화 <보일링 포인트> <더 메뉴>, <더 베어> 시리즈 등도 현실 반영에 한몫하면서 부엌의 낭만화는 갈수록 사그라드는 모양새다. 그러나 “베트남의 외딴 마을에서 살던 어린 시절, 내가 볼 수 있었던 유일한 아름다움은 어머니의 부엌뿐이었다”고 말하는 트란 안 훙은 <프렌치 수프>의 주방을 아늑한 맛이 풍기는 공간으로 조성했다. 그렇기에 1885년 프랑스, 20년 이상 협업하며 독보적 명성을 쌓은 레스토랑 오너 도댕 부팡(브누아 마지멜)과 수석 셰프 외제니(쥘리에트 비노슈)의 네모난 일터는 분주할지언정 모든 것이 정연하며 그 안엔 사랑과 존중, 평화가 깃들어 있다.

아름다움은 어디서 기인하는가

뜻밖에도 <프렌치 수프>는 탐스러운 요리로 유혹하는 영화가 아니다. 힌트라도 주는 듯 흙이 잔뜩 묻은 채소로 시작하는 영화에서 먹을 것이란 대체로 무언가가 되기 한참 전, 날것 상태에 머문다. 깊숙한 들통 밑바닥에 깔린 고깃덩어리와 우유가 가득 담긴 그릇 안에 눕혀지는 가자미가 식욕을 돋우기엔 역부족이다. 구멍을 낸 둥근 퍼프 페이스트리 안에 소스를 곁들인 소를 채워넣는 ‘볼로방’이나 조수 비올레트의 조카 폴린이 첫입에 “울 뻔했다”는 감상을 남긴 아이스크림 디저트 ‘오믈레트 노르베엔’을 비추는 카메라의 태도는 지극히 덤덤하다. 그와 같은 풍만한 음식을 클로즈업해서 시선을 뺏는 숏도 전무하다시피하다. 대신 <프렌치 수프>는 완성한 요리가 아닌 요리하는 과정을 통해 부엌의 아름다움을 구현하고자 하며 그 아름다움은 영화의 문을 본격적으로 여는 긴 요리 장면에서 일찌감치 드러난다.

<이터너티>의 과욕과 뜬구름을 반성하기라도 하듯 천연한 톤을 유지하는 <프렌치 수프>의 전반부 30분은 특별히 강조하는 구간 없이 공평하고 순조롭게 흘러가지만 틀림없이 무언가가 일어나고 있다. 외제니와 도댕, 비올레트와 폴린까지, 그들은 망설임 없이 각각의 자리에서 씻고 썰고 볶으며 달궈진 팬과 물이 가득 찬 솥을 든 채로 여유롭게 서로를 스쳐 지나간다. 촬영감독 조나탕 리퀴에부르의 단일한 카메라는 이들에게 미끄러지듯 다가가고 멀어지면서 주방에서 벌어지는 신비를 리드미컬하게 포착한다. 눈빛 교환, 신체 접촉 없이도 당신을 완전히 신뢰하고 있다는 확신, 경지에 다다른 호흡. 거기에서 배어나는 안정감은 이 영화의 아름다움의 요체가 된다. 초록의 양배추, 불그스름해진 삶은 가재, 주황빛을 내는 다진 당근 등 생생하게 빛나는 식재료 본연의 빛깔과 창밖으로 넉넉히 들어오는 자연광, 청각을 미세하게 자극하는 자연의 소리는 트란 안 훙의 작품임을 증명하며 순수한 아름다움의 폭을 넓힌다. 그간 즉흥성과 우연의 힘을 빌려 연출해왔던 감독은 고도의 정밀성이 필요한 오프닝을 위해 리허설을 도입했다. “주방에서 카메라와 캐릭터가 어떻게 움직여야 하는지를 아이폰으로 먼저 찍었다. 그걸 배우들에게 보여준 뒤 실제 촬영에 들어갔다. 재촬영해야 했을 때 새로운 재료 세팅이 필요했고 그것은 꽤 복잡했다”고 그는 당시를 회고한다. 엔지 한번이 자칫 큰 피해를 부르고 배우들이 많은 사물의 위치와 복잡한 동선을 정확히 익혀야 했을 현장은 보이는 것처럼 우아하지 않았음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다시 돌아와 <프렌치 수프>의 부엌은 시시각각 다른 장소로 변화하며 아름다움을 확장한다. 요컨대 부엌은 이따금 활달한 실험실로 변한다. 쟁반 위에 가지런히 놓인 재료들과 도처에 널린 조리 도구는 검사를 기다리는 시료와 실험 도구가 된다. 불순물을 체에 거르고 연기나는 팬 앞에서 이것저것을 배합하는 외제니와 도댕은 연구원과 다름없다. 빻아서 색을 내고 빵 시트 위에 크림을 펴 바를 때면 접시는 팔레트가, 주걱은 붓이 되고 요리사들은 진지한 화실의 주인이 된다. 어김없이 정해진 제 위치로 이동하는 인물들은 연극배우가 되고 부엌은 곧 무대로 인식된다. 누구이건 간에 그들은 시간과 정성을 들여 결과물을 내는 퍼포머로서 궁극적인 매혹의 대상이고 그들의 일터는 <그린 파파야 향기>(드뷔시의 <Clair de Lune>), <씨클로>(라디오헤드의 <Creep>), <여름의 수직선에서>(벨벳 언더그라운드의 <Pale Blue Eyes>)에서처럼 음악의 마법을 부리지 않아도 충분히 황홀한 공간이 된다.

이런 사랑도 있다

외제니의 죽음 뒤 도댕의 삶에 초점을 맞춘 마르셀 루프의 원작 소설 <도댕 부팡의 삶과 열정>(1924)과 달리 <프렌치 수프>는 외제니와 도댕이 함께 일한 말년의 시간에 집중한다. 트란 안 훙은 “사랑과 우정을 동시에 보여주고 싶었다”는 방향성에 따라 각색 과정에서 외제니 캐릭터를 크게 키웠다. 황혼의 남녀는 한집에 살며 수십년간 요리법을 개발했고 호감을 키웠으며 도댕은 긴 시간 동안 “결혼합시다”라는 말을 건네왔지만 외제니에게 번번이 거절의 변을 듣는다. “우린 부부보다 많은 시간을 함께해요. 그렇다면 이대로 좋지 않나요?” 몇번이고 거절을 당해도 도댕은 외제니의 마음을 강요하지 않으며 준비한 다음 대사를 정중히 읊는다. “오늘 밤, 당신의 방문을 두드려도 될까요?” 다시 말해 외제니와 도댕의 관계는 애매모호하거나 미적지근한 사이가 아니라 지속을 위해 끓어오르는 감정을 절제할 줄 아는 성숙한 어른의 관계다. 둘은 뭉근하게 끓일수록 맛이 더 깊어지는 프랑스식 수프 ‘포토푀’(영화의 프랑스 원제) 같은 사랑을 나눈다. 영화는 이들이 얼마나 서로를 사랑하는지를 둘만의 공용어인 요리로 표현한다. 알 수 없는 증세로 쇠약해진 외제니를 위해 도댕은 침대에 누운 그의 뜨거운 이마에 손을 올리고 입을 맞추는 대신 부엌으로 들어가 완두콩을 발라내고 육수의 간을 본다. 카메라는 단 한 사람을 위한 신중한 의식을 치르고 있는 남자에게 바짝 다가가 그의 긴장한 속눈썹을 포착한다. 완성한 요리가 외제니의 테이블에 세팅되고 그녀가 음식을 입에 넣고 혀를 굴리는 몇초 동안 도댕은 세상에서 가장 연약한 남자가 된다. 그리고 분명 맛에 감탄한 외제니가 눈동자로 그를 찾고 그녀의 반응을 알아챈 도댕의 입가가 기쁨으로 살짝 실룩댄다. 사랑이란 말이 터져나올 것 같은 찰나, 어떤 산해진미가 올라왔을 때보다도 침이 꼴깍 넘어가는 바로 그 순간을 트란 안 훙은 그토록 기다렸는지 모른다.

사진제공 그린나래미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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