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2]
[인터뷰] 비극의 카리스마, <돌풍> 김희애
2024-07-11
글 : 조현나

명예를 위해 사람은 어디까지 무너질 수 있을까. 신념을 지킬 수 있다면 대통령 시해도 괘념치 않는 국무총리 박동호(설경구)와 그를 막고 권력을 차지하려는 경제 부총리 정수진(김희애). 국무총리의 계략을 한발 앞서 내다보며 강수를 두는 정수진은 가히 박동호의 대항마라 할 수 있다. <퀸메이커> <데드맨> 속 전략가의 모습으로 익숙한 시청자들 앞에, 배우 김희애가 최전선에서 정치 변혁을 일구려는 새로운 인물이 되어 돌아왔다. 섬뜩할 정도로 강단 있는 결정을 내리면서도 감정적으로 흔들리고 무너지는 정수진의 인간적인 면모가 그에 대한 몰입을 강화한다.

- 김용완 감독이 김희애 배우가 “<돌풍>의 대본을 가장 사랑하는 배우”라고 이야기했더라. 실제로 박경수 작가의 팬이라고.

박경수 작가의 이전 작품들을 보면서 참 귀한 작가라는 생각을 했다. 저력과 깊이가 있는데 그렇다고 글이 재미가 없는 것도 아니고. <돌풍>시나리오도 퀄리티가 굉장히 높았다. 정치가 소재지만 자신이 원하는 바를 위해 돌진하다 처절하게 몰락해가는 인간들의 모습이 와닿았다. 밝고 행복한 사람들에게서 느껴지는 에너지도 좋지만 인간의 슬픔과 비극이 주는 카타르시스가 확실히 있더라.

- 정수진이야말로 그런 면모가 잘 드러나지 않나.

처음 작품을 봤을 땐 그저 박동호를 상대하는 나쁜 역할이라고만 받아들였다. 그래서 박동호를 잘 서포트해야겠다고 생각했는데 뒷부분의 대본을 받아 읽고, 또 반복해 들여다보니 단편적인 악역이 아니었다. 서사가 드러날수록 정수진이 왜 그렇게 행동했는지 공감이 갔다. 수진은 상황과 시대가 만들어낸 괴물이다.

- <돌풍>을 보며 <퀸메이커>와 <데드맨>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다만 황도희(<퀸메이커>)와 심 여사(<데드맨>)보다 전면에 나서는 인물이라 연기한 입장에서도 접근법이 달랐을 것 같다.

황도희는 재벌의 수하로 일하다 배신당하고 복수하는 모습을 보여줬다면 심 여사는 정치판을 쥐락펴락하는 큰손이었다. 그런 면에서 두 인물은 결이 달랐디. 정수진은 설계자고, 복수심 없이 자신의 신념과 욕망에 따라 정치판에 뛰어든다. 그렇게 받아들이고 연기했다.

- 수진의 전사가 꽤 자세하게 밝혀진다. 운동권 시절의 모습만 보면 정도를 벗어난 행동은 전혀 하지 않을 것 같은데, 경제 부총리가 된 현재의 행보는 그런 예상을 상당 부분 벗어난다. 이러한 수진의 변화는 어떻게 받아들였나.

말한 대로 과거에는 모범적이고 순수하고 정의감에 불타는 소녀였는데 회를 거듭할수록 브레이크가 고장 나 스스로도 제어되지 않는 상태라는 느낌을 계속 받았다. 그렇지만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봤다. 태풍처럼 몰아치는 사건들을 견뎌내야 했기 때문에 생존을 위한 대응은 불가피했을 것이다. 4회에서 수진이 남편에게 “내가, 당신이 박동호여야 했어”라고 말하는 대사가 있는데 그걸 보면 이 사람의 가치관이 드러난다. 분명 선악을 구분할 줄 아는 사람이었지만 명예, 권력을 위해 거짓말을 하기 시작하고 그것이 더 큰 거짓말을 불러오고, 자신의 영달만을 좇지 않았음에도 남편과의 관계까지 점차 변해간다. 욕망으로 인해 몰락해가는 모습을 보며 인간적이라 느꼈다. 배우로선 수진의 드라마틱한 변화 과정이 굉장히 매력적이었다.

- 대사량이 상당해 외우는 데 품이 많이 들었을 것 같다.

어른이 돼서도 가끔 시험 보는 꿈을 꾸지 않나. 배우들은 대사 외우는 꿈을 꾼다. 꿈속에서도 가슴이 두근거리고 못 외우면 어떡하지, 싶다. 그만큼 힘들었다. 법률 용어들이 많은 데다 누가 선이고 악인지, 어떤 게 블랙코미디고 슬픈 상황인지 분간이 가지 않게끔 대사가 날카롭게 쓰여 있었다. 그래서 더 잘 전달하겠다는 각오가 유달리 강했다. 다음엔 좀 덜 비장해도 되겠다 싶을 정도로. (웃음)

- 가장 어려웠던 대사는 무엇이었나.

아까 언급한 “내가, 당신이 박동호여야 했어”라는 말이 수진의 내면을 함축해 드러낸다. 그래서 그 대사를 정말 잘하고 싶었고, 또 마지막에 이만길 비서관(강상원)이 사고를 터트려 수진이 거의 반쯤 정신이 나간 채로 나눈 대화도 그랬다. 그 대사를 하기 위해 12회까지 달려왔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잘해내고 싶었다. 특히 그 신은 이틀에 걸쳐 찍었다. 두 번째 찍을 때는 첫 촬영의 기억을 없애고 전부 내려놓고 임했는데 다행히 잘 나왔다.

- 촬영 내내 “정수진 그 자체로 지냈다”고. 배우들마다 몰입하는 방식이 다른데 본인은 어땠나.

예전에는 작품 시작할 때부터 끝날 때까지 아무도 안 만났다. 수도승처럼 절제하며 지냈는데, 이젠 좀 다르게 가보려 한다. 관객들에게 매력적인 연기를 보여주고 싶은데 혼자 방에 틀어박혀 전전긍긍하며 준비한 배우의 연기와, 인간으로서 행복한 삶을 유지하는 배우의 연기 중 어떤 것이 낫다고 느낄까, 어떤 걸 원할까 생각해보면 정답이 없는 것 같다. 큰 차이가 없다면 밸런스를 잡아가며 일할 때 더 집중하는 게 좋겠다는 입장이다.

- 한동안 영민하고 자기주장이 강한 역할을 연달아 맡았다. 그런 캐릭터를 선호하나.

그런 캐릭터들이 가진 매력이 있다. <돌풍>도 내가 넘어온 산 중 하나였는데, 이제는 일상극도 하고 싶다. 정말 잘할 수 있는데 사람들은 내가 일상극을 잘 못하는 사람인 줄 안다. (웃음) 다음 출연작이 궁금해지는 답변이다. 공개된 차기작으로 허진호 감독의 <보통의 가족>이 있다.차기작들에 관해 아직 이야기할 수 있는 게 많지 않아 아쉽다. <보통의 가족>도 정말 재밌게 촬영했다. 또 하나의 문제작이 될 것 같다. 이건 정말 어른들의 드라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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