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에 누워 <희생>을 보며 잠들지 않을 수 있을까. ASMR처럼 쉼 없이 흘러나오는 형이상학적 대사와 신의 변화를 뚜렷하게 감지하기도 어려운 장면간의 유동성, 장장 몇분간 지속되는 상승과 하강 이미지의 교차, 그리고 한정된 무대에서 펼쳐지는 꿈같은 이야기, 아니 사실은 이야기라고 하기도 마땅찮은 어떠한 순간들의 연속을 보며 맨정신을 부여잡기란 결코 쉽지 않은 일일 것이다. 그러니까 단출하게 말하자면 <희생>은 아주 지루해서 졸음을 참기가 어렵다.
김영진 평론가(당시 기자)도 1995년 5월 <씨네21>에 “필자는 안드레이 타르콥스키 감독의 팬이다. 그의 유작 <희생>을 다섯번이나 봤다. 그러나 부끄럽게도 다섯번 모두 특정 부분에서는 항상 졸았다”라며 극장에서조차 그 수마를 이기지 못했단 기록을 남겼다. <희생>을 보다 잠드는 건 30년 전이나 지금이나 모두에게 평등한 불가항력의 과정인 듯하니 딱히 부끄러워할 필요는 없을지 모른다.
지루하다거나 잠이 온다는 이유로 <희생>을 비꼬거나 영화의 가치를 격하하려는 것은 아니다. 다만 지금의 관객에게 <희생>이 지닌 일종의 서사적 지루함, 보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수면을 유도하는 내러티브의 불친절함이나 느림이 고급 예술영화의 당연한 특징처럼 읽힌다는 문제를 지적하고 싶다. 이를테면 속칭 ‘드르렁 영화’로 불리며, 조금 졸더라도 좌석을 지키며 끝까지 봤다는 사실만으로 조금 우쭐해지는 영화들의 단순한 ‘예술성’을 <희생>이 담보하기 시작한 듯 보이기 때문이다. 지루하기에 훌륭한 영화라는 착각은 마치 긴 롱테이크가 예술영화만의 특질로만 편협하게 쓰였던 1990년대의 인식에서 별다른 변화를 거치지 못한 것만 같다.
<희생>과 <존 오브 인터레스트>라는 현상
1990년대와 2020년대 예술영화를 대하는 관객 태도의 유사성을 <희생>과 <존 오브 인터레스트>로 비교해봐도 좋겠다. 2001년 조혜영 평론가는 1995년 <희생> 열풍을 돌아보며 당대 관객이 “단순히 영화 자체 때문만이 아니라 ‘보러 가는’ 행위 자체에도 많은 의미”를 두었고, “언론과 관객은 서로서로 그들을 더 부풀려나간 형상”을 보여줬다고 평했다.(조혜영. 2001. ‘1995년’을 역사화하기: <희생>의 한국 내 상영을 둘러싼 담론과 ‘기원’의 망상’)
이후 30년이 지난 지금 <존 오브 인터레스트>를 두고 매겨진 박평식 평론가와 이동진 평론가의 별점이, 그리고 SNS를 떠도는 <존 오브 인터레스트>의 칸영화제 수상 소식과 (<씨네21>을 포함한) 여러 언론의 극찬이 19만명 넘는 시네필리아 혹은 예술 문화 전반을 아우르는 아트필리아들을 극장으로 불러들여 매혹했음은 부정하기 어렵다. 그런데 필자가 씨네큐브에서 열린 개봉 전 프리미엄 상영회에서 <존 오브 인터레스트>를 보았을 때 주위 관객은 30년 전 <희생>의 극장 개봉을 반복하듯 하나둘 고개를 푹 숙이고야 말았다…. 김병규 평론가의 말처럼 <존 오브 인터레스트>는 의도적으로 “놀라움과 충격의 혁신성을 겨냥한다기보다는 철저할 만큼의 지루함, 무의미, 따분함의 상태에 종속”된 작품이며 쉽게 말하면 잠을 참기 어려운 영화다. 30년의 간격을 두고 한국 시네필 관객의 탐스러운 먹잇감이자 훌륭한 수면제가 된 두 예술영화 대표작의 공통점이 잠을 부른다는 것이라니.
거꾸로 <희생>과 <존 오브 인터레스트>를 원하는 소비자의 심리가 바로 저 잠을 부를 만큼의 불친절한 내러티브에서 기인한다고 보면 아귀가 맞기 시작한다. 의도적으로 벌린 내러티브의 틈을 지적 활동의 공터로 사용할 수 있는, 이야기 사이를 채운 영화적 조형성을 마땅한 비평의 언어로 적당히 대체할 수 있는 여건이 두 영화에 있기 때문이다. 서사적으로 잘 이해되지 않고 느릿느릿해 잠이 쏟아지더라도 감독의 명성이나 작품의 형식미가 특정한 의미를 품고 있다면 그것에 훌륭한 예술영화 딱지를 붙이기 쉽다. 이야기의 평평함과 내러티브의 빈틈 사이를 헤매며 20분쯤 슬쩍 자더라도 ‘이것은 통상적 내러티브를 해체하는 고급 영화이므로 어쩔 수 없다’라는 전제 아래 어딘가에서 배운 형식적 비평을 잘 적용한다면 충분히 젠체하는 것이 가능하며, 언론 역시 간단한 단평의 수사나 별점으로 영화를 상찬하기 쉽다. 즉 예술영화의 불친절한 내러티브에 대한 30년간의 물신화는 이러한 영화들을 제대로 보지 않아도 말하기 편리하고 마케팅적 수사로도 쓸모 있다고 생각하는 오만으로 지속되는 현상처럼 보인다. ‘불친절한 내러티브=고급 예술영화’란 편리한 공식은 두 영화의 진의를 제대로 바라보는 데에도 해를 끼치는 나쁜 지대다.
두 영화가 추구한 지루함과 따분함이 영화의 외적 대흥행과 겹치는 사태가 30년 만에 반복되면서 ‘수면 조장’이란 예술영화의 특징이 더 공고한 예술영화의 통념으로 자리 잡게 되진 않을지 무섭다. 2021년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아피찻퐁 위라세타꾼의 <메모리아>를 보던 시네필들이 하나둘 졸음에 쓰러지며 스마트폰을 바닥에 떨어트리고 <메모리아> 속의 “쿵!” 소리를 얼떨결에 재현했을 때도 왠지 관객은 ‘나만 자는 게 아니구나’라고 뇌까리거나, 대놓고 메타 수면 영화를 만들어버린 아피찻퐁의 세심한 배려에 모종의 안도감을 느끼곤 했다. 그것까진 그렇다 쳐도 <메모리아>의 지루함이 예술영화의 조건이며 시네필의 특권인 양 사이좋게 떠드는 모양새는 영 그렇다.
불친절한 내러티브=예술영화?
예술영화의 불친절한 내러티브란 맥락을 조금 다른 시선으로 살필 수도 있겠다. 졸리는 방향성은 아니되, 다면적이고 복합적인 내러티브나 플롯을 꾸린 <괴물> <추락의 해부> 같은 작품 역시 많은 관객을 이끌었다. 두 영화는 플롯을 꼬고 복합적인 내러티브를 활용하며 이야기적 진실의 희박함을 열심히 지켜나간다. 불투명한 서사에 대한 관객 각자의 해석을 ‘불러일으키는 것처럼’ 보인다. 이러한 전략을 좋은 말로 영화의 의도적 공백이라 여기고 넘어갈 수도 있지만, 여기선 불친절한 내러티브를 영화의 원류로 삼는 세 영화의 흥행이 지금 예술영화 관객의 취향을 만족시켰단 사실에 먼저 관심을 가지고자 한다.
영화의 ‘이야기’를 드라마와 내러티브로 나눈다면, 드라마는 감정적 요소이거나 추상의 영역에 가깝다. 반면에 내러티브는 각본이나 편집을 통해 이야기를 어떻게 표현하고 서술할 것인지 기술하는 데 가깝다. 그러니 드라마란 넓고 느슨하며 동시에 무척이나 개인적인 목표다. 드라마는 그 자체로 어떠한 상대성을 지니고, 이 상대성은 말 그대로 세상에 있는 인간의 수, 그들이 가지는 순간의 마음만큼 다양하고 무한하다. 반대로 내러티브란 형식은 좁고 특정적으로 말해지며 체계화되기 쉽다. 흔히 말하는 시나리오 작법이란 기술적으로 특정 감정을 부르고 감동을 주기 위한 내러티브의 도구다.
그러니 드라마에 대한 비평은 필연적으로 관객마다 달리 받아들여도 이상 없는 것으로 치부되고, 정답이 없는 문제로 여겨진다. 인물들이 보여준 감정과 드라마의 일대기는 오만 진실 속의 먼지로 분화해버리고 영화의 정답으로 여겨지는 일이 드물다. 반대로 내러티브에 대한 비평은 비교적 쉽다. 이것은 언어로 구조화할 수 있고, 마치 따라 하기 쉬운 것으로 혹은 영화를 조금만 공부하더라도 일반인들에게 자신의 지적 허영을 뽐내기 쉬운 도구로 사용될 수도 있다. <괴물>과 <추락의 해부>를 보며 아이들의 마음에 공감하여 감정적 평을 쓰는 일보단 진실의 상대성을 플롯으로 만든 방식이니 하는 부분을 설명하는 편이 훨씬 간편하게 시네필의 위치를 차지할 수 있다.
사실 서사의 다성적 발화니 서사의 파편화니, 진실의 다면성 혹은 상대성을 전면에 내세우는 내러티브의 복잡함이란 진즉 진부한 제재가 된 지 오래다. <희생> <라쇼몽> <지난 해 마리앙바드에서> 같은 작품이 각자의 시대를 풍미한 지 40~70년이 훌쩍 지났는데도, 많이 후퇴해도 <정오의 낯선 물체>가 스토리텔링의 신기원을 연 지 사반세기가 지났는데도 여전히 단선적 이야기 구조, 할리우드식 내러티브를 해체하는 것이 영화예술의 책무나 조건이라 하는 말은 머쓱하기 그지없는 일이다.
단출한 형식, 충만한 감정
내러티브의 형식을 이리저리 꼬는 것만으로 좋은 영화가 완성되지 않고, 마찬가지로 내러티브의 형식만을 분석한다고 좋은 글이 나올 수도 없다. 3부작으로 나뉜 플롯이나 비선형적 내러티브를 취사선택하며 제2의 홍상수를 꿈꾸던 수많은 영화과 학생이 고꾸라진 이유는 홍상수 영화의 힘이 형식뿐 아니라 인물들에게 내재한 드라마에 그 기원을 두고 있음을 간과했기 때문이다. 돌고 돌아 가장 단출한 형식 속에서 감정의 정수를 도출하려는 최근 홍상수의 흐름을 본다면 오히려 한 작가에게 내러티브의 정립이란 초기 단계이며 그것의 드라마를 더욱 확고히 뽑아내는 것이 만년의 업으로도 여겨질 법도 하다. 이 논리는 타르콥스키의 영화 중 가장 미니멀한 형식과 시공간, 내러티브 안에서 최대치의 감흥을 보여준 <희생>의 경우로도 설명된다.
그런데 아직도 롱테이크니 서사의 파편화니 진실의 상대성이니, 고전적 내러티브의 해체니 하는 지난 시대의 비평적 수사에만 지나치게 도취하며 영화의 개인적이고 감정적인 가치를 낮추는, 90년대적 인식에서 벗어나지 못한 예술영화에 대한 편협한 환상과 배타성이 도처에 깔린 것으로 느껴질 수밖에 없다. “가해자의 서사에 연루되지 않기 위해서 서사 자체를 무력화한다. 그 태도는 비겁하다”라는 남다은 평론가의 말마따나 윤리적 지루함을 서사의 지루함으로 둔갑시킨 <존 오브 인터레스트>의 안하무인에 모두가 저항 없이 손을 들며 티켓으로 인증하다니 이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가.
좋은 영화, 잘 만든 예술영화의 조건이 불친절한 내러티브의 형식적 건축을 통한 ‘드르렁’화에 있다는 편리한 사전 인식을 과감히 버려야 한다. <희생>은 타르콥스키의 마지막 작품이고 <희생>이니까 그 지루함을 숭고함의 차원으로 높일 수 있지, 지루하다고 해서 다 <희생>이 되진 않는다. 왜 영화의 감정이 내러티브의 농간으로 인해 텅텅 비고 평평해야만, 혹은 반대로 갈피 없이 갈라져야만 하는가. <희생>을 30년 만에 극장에서 볼 관객에게 던지고 싶은 제언은 하나다. 우리는 영화 보며 잘 땐 자더라도 불친절한 내러티브 같은 한정된 형식의 자발적 노예가 아닌 영화를 마주하며 느낀 감정의 주체가 될 수 있다. 우리가 충만한 감정으로부터 눈을 감지 않는 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