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랜스크로스]
[트랜스크로스] 영화와 음악 사이, <강석우의 시네마콘서트>의 진행을 맡은 강석우 배우
2024-08-16
글 : 최현수 (객원기자)
사진 : 최성열

강석우는 오랜 시간 일상을 빛내는 이름이었다. DJ로 MBC 표준FM <여성시대>와 CBS 음악FM <아름다운 당신에게>를 진행하며 지난 15년간 매일 오전 9시부터 11시까지 새로운 음악과 진솔한 이야기로 아침을 가득 메웠다. 그의 다정다감한 목소리는 저녁이 되면 인자하고 따스한 얼굴이 되어 나타났다. <여름아 부탁해> <웃어라, 동해야> <너는 내 운명> <아버지가 이상해> 등 일일연속극과 주말연속극에 출연한 그는 배우로 누군가의 식탁 위에서 희로애락을 함께했다. 건강상의 문제로 정들었던 라디오를 떠난 뒤에도 강석우는 사람들의 눈과 귀가 되었다. MBN 교양프로그램인 <강석우의 종점 여행>을 통해 전국 각지의 풍경을 벗삼아 다양한 사람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고, 지난해부터 예술의전당 <11시 콘서트>의 해설을 맡아 클래식 대중화에 앞장서고 있다.

<씨네21>은 강북문화예술회관 강북소나무홀의 재개관을 맞아 8월23일 오후 7시30분 강북문화예술회관에서 배우 강석우와 함께 <강석우의 시네마콘서트>를 개최한다. <강석우의 시네마콘서트> 준비에 한창인 강석우를 만나 연기부터 음악까지 그의 삶을 구성하는 다양한 분야의 이야기를 나누었다. 친근한 목소리로 최근에 발견한 좋은 음악들을 선뜻 추천해주는 강석우와의 대화는 마치 매일 아침 활기를 더해주던 라디오를 듣는 것만 같았다.

- <씨네21>과 함께 <강석우의 시네마콘서트>를 진행하게 되었다. 배우이자 클래식 해설가로서 콘서트를 준비하게 된 감회가 남다를 것 같다.

= 사실 영화에서 음악이 연기보다 더 중요한 순간이 있다. 오래전에 본 영화를 반추할 때 특정 장면보다 음악을 기억하는 경우가 빈번하다. 추억이라는 측면에서도 영상보다는 음악이 더 쉽게 과거로 돌아갈 수 있게 만든다. 특히 영화음악은 처음 작품을 보았던 젊은 시절의 나와 화면 속 배우를 다시 되살리게 만드는 좋은 재료다. 이번 콘서트는 관객들이 추억을 떠올리는 행복한 시간이 될 것이다.

- 이미 공개된 프로그램의 목록에서 이번 콘서트의 지향점을 엿볼 수 있다.

= 사람들의 귀에 익숙할 만한 영화음악 위주로 진행한다. 프로그램에 소개된 곡을 아는 사람도 있겠고 모르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멜로디만큼은 모두의 귀에 익을 것이다. 사실 나조차도 이번 프로그램을 통해 음악은 잘 알지만 처음 관람한 영화가 있다. (웃음) 설령 프로그램에 있는 작품을 잘 알지 못하더라도 편안한 마음으로 공연장을 찾길 바란다.

- 70년대부터 90년대까지 영화계에서 활동했던 시기의 작품과 영화음악이 주를 이룬다.

= 클래식의 경우 17~19세기에 좋은 음악이 집중적으로 등장했던 것처럼, 영화도 70, 80년대에 감정적으로 충만한 작품들이 정말 많다. 영화 외에도 팝송이나 다른 문화도 이때가 보편의 감성을 아우를 수 있는 마지막 시대가 아니었나 싶다.

- 프로그램 중 곽지균 감독의 데뷔작인 <겨울나그네>가 눈에 들어온다. 청춘의 초상이 담긴 민우라는 역을 맡아 호연을 펼쳤던 작품이다.

= <겨울나그네>의 원작은 최인호 작가의 소설이다. 빌헬름 뮐러의 시에 슈베르트가 곡을 붙인 24곡의 연가곡집 <겨울나그네(Winterreise)>에서 이름을 가져왔다. 영화가 개봉될 무렵 최인호 작가님이 나를 불러 건넨 말이 있다. ‘앞으로 피리 부는 소년이라는 애칭이 평생 너를 따라다닐 것’이라는 말이었다. 내가 연기한 민우에게 피리 부는 소년이란 애칭이 있었기 때문이다. 처음 그 말을 들었을 땐 웃어넘겼지만, 지금까지도 여전히 우리 세대의 관객들에게 회자되는 걸 보면 민우는 꺼지지 않는 불꽃 같은 존재구나 싶다. 이야기를 덧붙이자면 <겨울나그네>는 음악으로 시작해서 음악으로 끝난다. 비록 이번 프로그램에서는 한곡만 소개하지만 좋은 곡들이 많이 등장한다. 한국의 위대한 바이올리니스트였던 김남윤 선생님이 음악 선곡을 맡으셨다. <겨울나그네>를 볼 때마다 영화와 소설이라는 굳건한 두축을 기반으로 음악이 그 위에 떠다니는 기분이다. 이번에 소개할 비발디의 작품집 3집 6번의 1악장은 민우가 자전거를 타고 교정을 달리는 영화의 오프닝부터 흘러나오는 음악이다.

- 시네마 콘서트는 기존의 다른 클래식 공연과 어떤 점이 다른가.

= 시네마 콘서트는 좀더 몽환적인 분위기를 자아낸다. 오래전에 본 영화를 떠올릴 때 실제 장면과 사람들의 기억 사이에는 괴리가 있다. 음악의 멜로디는 쉽게 변하지 않지만, 장면의 디테일은 시간이 갈수록 기억 속에서 변형된다. 따라서 음악을 들으며 영화를 떠올리는 과정이 원본 그 자체보다는 꿈을 꾸는 과정에 가깝다. 혹은 시간에 의해 영화가 재편집되는 과정이다. 따라서 이번 공연은 영화음악을 들으면서 각자의 편집본으로 영화를 재창조하는 몽환적인 시간이 되지 않을까.

- 지난해부터 예술의전당에서 <11시 콘서트>의 해설을 맡고 있다. 이번 콘서트에서도 해설 및 진행을 담당한다. 다른 장르의 음악 공연에서는 찾아보기 드문 역할이다.

= 클래식 콘서트에서 해설은 관객이 이전에는 듣지 못했던 부분을 들리게 만들어준다. 작곡가의 의도를 비롯한 후일담이나 멜로디의 흐름에 대한 나만의 감상을 소개한다. 예를 들어 2악장 후반부에 등장하는 클라리넷 솔로가 환상적이라는 코멘트를 듣는다면, 관객들은 조금 지루하더라도 언급한 부분을 발견하기 위해 음악 전체를 듣게 된다. 그 과정에서 새롭게 들리는 소리가 생긴다. 그렇게 클래식 음악에 마음을 붙일 수 있는 기회가 생긴다.

- 클래식 콘서트는 진입장벽이 높다는 인식이 있다. 클래식 입문에 좋은 길라잡이로서 처음 클래식을 접하는 이들에게 조언을 건넨다면.

= 음악을 숭상하듯 들을 필요는 없다. 검은 양복을 입고 근엄하게 연주한다고 해서 관객까지 무거워질 이유도 없다. 우리나라 극장은 계단을 오르고 정문을 통과해서 굽이굽이 공연장으로 향하면서 부담감을 준다. 뉴욕이나 다른 곳은 큰 거리 1층의 문만 열면 클래식 공연장으로 향할 정도로 단순하다. 콘서트 때마다 항상 관객들에게 코를 골지 않는 선에서 졸리면 자도 괜찮다고 이야기한다. 음악을 들으며 잔다는 경험 자체가 행복한 일이다.

- 대중들에게는 배우 강석우의 얼굴만큼이나 라디오 DJ로서 강석우의 목소리가 익숙하다. <여성시대> <아름다운 당신에게> 등을 거치며 오랜 기간 라디오 진행자로 활동했다.

= <여성시대>를 진행할 당시에는 세상에 대해 하고 싶은 말들이 많은 시기였다. <아름다운 당신에게>를 맡게 되면서 사람들에게 클래식의 매력을 친근하게 공유하고 싶었다. 과거 엽서를 주고받던 시절과 달리 지금의 라디오는 시청자들의 피드백이 즉각적인 점이 참 좋다. 특히 <아름다운 당신에게>에는 클래식에 대한 지식이 해박한 청취자들이 많다. 내가 사람들에게 좋은 음악과 이야기를 소개하는 만큼, 청취자들도 새로운 정보를 제공하거나 오류를 지적해준다. <아름다운 당신에게>를 진행하면서 참 많이 배웠다.

- <아름다운 당신에게>를 진행하면서 클래식 입문자와 애호가 모두에게 사랑을 받았다. 특히 음악과 함께 풀어낸 이야기들은 동명의 책으로 출간됐다.

= 토요일마다 ‘강석우의 플레이리스트’라는 코너를 진행했다. 에세이 형식의 글을 내가 미리 작성하면, 이야기에 맞는 음악을 선정하는 형식이었다. 수필이나 칼럼처럼 살면서 느낀 생각을 적어나가는 글을 썼다. 시간이 흘러 책 두권 분량이 나올 만큼 모였다. 심지어 한권 더 출간할 수 있는 글이 남아 있다. 사실 풀어낼 글과 음악은 여전히 많은데, 이젠 곡의 제목을 떠올리는 데 시간이 걸린다. (웃음)

- 클래식 해설이나 라디오 진행은 결국 남들에게 새로운 것을 소개하는 큐레이션의 일종이다. 좋은 이야기, 좋은 음악을 소개하기 위해선 나름의 감식안이 필요하다.

= 지금도 매일 음악을 듣고 있다. 아름다운 곡을 듣게 되면 바로 메모한다. 에버노트에 방대한 자료를 축적하고 있다. 각 음악이 어떤 분위기와 감정에서 필요한지 세밀하게 구분하고 감상과 정보를 빠짐없이 기록한다. 이야기도 마찬가지다. 흥미로운 이야기들이 그저 손을 스쳐 지나가는 것은 아까운 일이다.

- 연기부터 라디오, 클래식 해설, 도서, 여행 프로그램과 칼럼까지 배우 강석우를 관통하는 키워드는 “이야기”다.

= 중학교 1학년 때부터 결혼하기 직전까지 매일 일기를 썼다. 처음 일기를 쓴 날짜를 정확히 기억한다. 1970년 10월31일 토요일부터였다. 여전히 그때 썼던 이야기를 전부 보관하고 있다. 그 시절의 나는 돈은 없고 시간은 많았다. 더군다나 유흥을 즐기는 사람은 더욱 아니었다. 방학이면 자루에 가득 담긴 책을 읽고,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클래식을 찾아 듣는 것만이 시간을 보내는 나 나름의 방법이었다. 어쩌면 젊은 시절의 내가 모여 지금을 만들었는지 모른다. 그때 읽은 글이 지금의 이야기를 만들고, 어릴 적 좋아했던 오보에가 훗날 가곡을 작곡하고 색소폰을 연주할 수 있게 했다.

- 김수용 감독의 <여수>, 유현목 감독의 <장마> 등 데뷔 초기에는 한국영화사의 두 거장 밑에서 잊지 못할 연기를 보여주었다.

= 대학 시절 유현목 감독님의 수업을 들으며 조언을 얻었고, 김수용 감독님은 지금의 내 이름을 직접 지어주셨다. 한국영화사에서 김수용과 유현목은 작가라는 칭호가 어울리는 감독이다. 특히 유현목 감독님은 한국의 리얼리즘을 대표하는 작가다. 촬영을 진행하면서 유현목 감독님이 타협하는 모습을 한번도 본 적이 없었다. 우직하게 자신의 영화관을 밀어붙이는 분이었다. <장마>와 같은 걸작은 이런 완강한 고집이 빚어낸 결과물이다. 그런 시절에 일원으로서 함께 작업했다는 사실이 감사한 마음이다.

- 최근에는 디스토피아 장르인 <종말의 바보>에서 기존의 따뜻했던 인상과는 사뭇 다른 백 신부 역을 연기했다.

= <종말의 바보>를 통해 새로운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 김진민 감독과도 백 신부의 악행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젊은 날 신에게 인생을 바치기로 했던 영성 있는 신부가 끝내 자신만을 택한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주변 사람들에게 추앙을 받고 가진 것이 많아지면, 선택의 순간에서 오류를 범하기 쉽지 않은가. 작품 안에서 나만의 관점이 전부 반영된 것은 아니지만 인물을 연기하며 해석을 부여하려 했다.

- 70~90년대의 배우 강석우는 비애와 청춘이 깃든 얼굴로 기억된다. 드라마로 활동 반경을 옮긴 후에는 익숙하고 따뜻한 중장년을 연기했다. 일흔살을 앞둔 지금 어떤 얼굴로 기억되기를 원하는가.

= 결국 연기는 어떤 역할을 맡음으로 타인에게 영향을 끼치는 일이다. 따라서 잔혹한 얼굴로 기억되고 싶지는 않다. 따뜻한 역할만 해도 시간이 짧지 않은가. 여전히 세상에는 따스함이 필요하다.

최근에 발견한 보물 같은 음악

Piano Concerto in A Major: III. Nocturne <Homage to Chopin>. Adagio con moto

엊그제 라디오를 듣다가 새로운 음악을 발견했다. 알프레드 힐이라는 오스트레일리아 태생의 후기 낭만주의 작곡가가 만든 피아노 협주곡 A장조였다. 두 번째 악장이 느린 악장이어서 부제를 찾아보니 아니나 다를까 ‘오마주 투 쇼팽’(Homage to Chopin)이라고 적혀 있었다. 제목처럼 쇼팽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는 유려한 곡이었다. 최근에는 우연히 밥을 먹다 식당에서 포크 아티스트 니콜라스 존스의 앨범인 《Three Feet Under》를 발견했다. 클래식뿐만 아니라 일상에서 좋은 음악을 발견하면 항상 궁금증을 못 견디고 꼭 그 음악을 찾아보고 기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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