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볼버>가 25만 관객(8월20일 기준)을 모으며 지난해 추석 <거미집>의 충격적인 흥행 부진을 반복하고 있는 듯하다. 한국형 장르물의 대들보처럼 여겨지던 감독들의 야심작이 관객에게 냉담히 외면받고 있다. 한국영화가 불쌍하다거나 이 상황이 안타깝다는 이유만으로 <리볼버>를 다시 호명하려는 것은 아니다. <리볼버>를 보며 느낀 모종의 이상함과 엇나감, ‘오승욱은 영화를 왜 이렇게 찍었지?’라는 관객으로서의 응어리, 그래서 이 영화를 어떻게 평가해야 하는지에 대한 곤란함을 지금이나마 다소 해소해보고 싶은 영화 주간지의 욕심이 이번 특집기사를 불렀다.
그렇다면 조금 구체적으로 다시, <리볼버>는 왜 다시 말해져야 하는가.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그 답은 <리볼버>를 향한 원색적 비난으로부터 시작해야 한다. 단출하게 말하자면 <리볼버>는 이상하다. 어쩌면 사실 그냥 잘 못 만든 영화처럼 보이기도 한다. 누아르의 비장미는 과장된 캐릭터들의 촌극에 묻혀 휘발되고, 이스턴 프로미스와 임석용(이정재)에 얽힌 과거의 비밀은 별일도 아닌 듯 쓱 지나가버린다. 주요 등장인물이 화종사 산길에 한데 모이는 클라이맥스와 이어지는 결말 역시 제대로 된 빌드업 없이 갑작스러운 교통사고처럼 찾아오는 터라 중간의 시퀀스 몇개가 빠진 느낌도 든다. <킬리만자로>처럼 피비린내와 소주 냄새로 가득 차 지질한 90년대 과도기 한국의 솔직한 풍경이 전면에 등장하지 않고, <무뢰한>처럼 어른들의 매캐한 향수 냄새가 듬뿍 나는 듯한 치정의 찌릿함도 없고, 오승욱 감독이 레퍼런스로 언급한 <차이나타운> 등 누아르의 몇몇 정전에서 피어났던 부조리의 짙은 혼란도 딱히 느껴지지 않는다.
이왕 딴지를 거는 김에 더 걸고 싶다. 여러 캐릭터가 극에 들어오고 나가는 당위도 많이 떨어진다. <사망유희>의 7층 목탑 플롯을 참고했다고는 하나 그 시퀀스의 구조가 영화 전체의 매끄러운 리듬으로 적절히 갈음되진 못한다. 하수영(전도연)의 은사이자 무언가 엄청난 사연을 가지고 있는 듯한, 차창 밖 노을빛을 후경에 끼고 무협영화의 은둔 고수처럼 등장한 민기현(정재영)은 두어번 등장해서 이 상황의 배후에 대해 뭔가 다 아는 척하더니 어느샌가 영화에서 사라져버리고 만다. 이스턴 프로미스의 실무를 책임지는 군인 출신 본부장(김종수)도 <리볼버>의 판을 쥐락펴락하는 듯 ‘이걸 보고해라 저걸 보고해라’라고 명령하다가 결말에 다다라선 별 영향력도 펼치지 못한다. 처음 하수영의 출소 길에 마중 나온 검사, 정윤선(임지연)의 전남편, 결국 그 정체가 제대로 드러나지도 않은 황정미, 뜬금없이 영화의 결말을 책임지는 바닷가의 생선 장수까지 작품의 메인 플롯에 딱히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캐릭터들이 영화의 시간을 잡아먹는다. 감독이 레퍼런스로 언급한 <최후의 증인>처럼 역사성 짙은 대서사시야 언뜻 스치는 인물들의 과거 맥락이 얽히고설키며 거대한 하나의 덩어리를 만들 수 있겠으나 <리볼버>의 많은 인물은 그만큼의 점도를 갖지 못하는 21세기의 약소한 개체일 뿐이다.
다시 정리하자면 듬성듬성한 내러티브, 박진감 없는 추적, 혹은 화면에 난데없이 등장하는 치즈케이크, 누아르영화 출소 시퀀스의 배경으로 삼기엔 너무나도 촌티 나는 버스 정류장의 원색 광고 전광판, 세발이나 있는데 한발밖에 쓰지 않은 리볼버 속 총알의 미진함 등. 가감 없이 말하면 이런 시나리오로 영화진흥위원회의 독립영화 제작지원 사업이나 여느 영화제의 피칭 프로젝트에 공모했다간 필시 떨어지고야 말 것이다. 지적하자면 한도 없을, 당장 포털사이트의 관객 평만으로 짐짓 가늠할 수 있는 탈웰메이드성이 <리볼버>의 겉보기다.
한국영화의 이상함, 난잡함, 엉성함
앞서 쏟아낸 비난 같은 의문은 곧 <리볼버>를 다시 보고 말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많은 빈틈과 허술함을 통해 <리볼버>는 우리가 흔히 아는 한국영화의 ‘웰메이드’적인 속성을 기어코 피해갔다. 지난여름 <씨네21>이 진행한 2023 여름영화 빅4 비평 대담에서 송형국 평론가는 “기존에 한국영화를 견인하던 중견감독, 그리고 개성이 뚜렷해서 충분히 기대할 만했던 감독들이 부정적인 의미로 대단히 매끈해졌다는 점을 강조”했다. 다 어딘가 비슷하고 할리우드의 꽁무니를 쫓는 일군의 한국영화를 꼬집은 것이다. 기성품의 양태에 맞춰 정제된 시나리오와 어딜 봐도 다음 장면을 알 법한, 인물의 감정을 마음이 아니라 뇌로 즉각 예상할 수 있을 법한 전형성이 한국영화를 지배하고 있단 사실이었다. 그런데 이 한국영화의 컨베이어벨트에 규격 외의 수제품 하나가 툭, 하고 걸려 공산품들의 가동에 태클을 걸었다. 이상한 모양의 총알 하나가 약실에 퍽 끼어버려서 어떠한 의식적 정체를 초래해냈다. 이 모난 돌이 바로 <리볼버>다.
<리볼버>는 의도적으로 껍데기만 남긴 영화다. 흥미진진한 내러티브나 절절한 감정이나 장르적인 박진감 등으로 불리는 웰메이드 영화의 통상적인 내실 없이 속칭 ‘가오’로만 가득 찬 작품이다. 한껏 폼 잡은 채 위스키에 물 섞으며 술 따르고 술 마시는 시간만 가오가 아니다. <리볼버> 속에서 지켜지지 않는 수많은 약속과 명령과 감시, 이것들이 합쳐진 <리볼버>라는 영화의 정체부터가 알맹이 없는 가오에 불과하다. 사실 오승욱은 그간 세련된 가오를 부리던 감독이었다. 너저분한 비장미로 당대 조폭영화와는 뭔가 다른 냄새를 풍기던 <킬리만자로>, 어른 멜로로 치장한 <무뢰한>의 가오는 오승욱이 지닌 풍부한 영화사적 맥락 아래에서 고전 필름누아르나 전성기 홍콩영화 등의 쿨함과 유현함이 적절히 혼성 모방된 결과였다.
그런데 <리볼버>와 하수영은 자신의 무지와 무능력을, 투박한 가오밖에 안 남은 본인의 처지를 부끄럼 없이 고백한다. 조 사장(정만식)에게 갔을 때 “난 아무것도 모르고 임석용의 찌끄레기나 받아먹던 x밥”이라고, 민기현에게 갔을 때 자신은 아무것도 모르고 증거조차 없다고 숨김없이 고백한다. 그야말로 순수함, 하수영이란 인물은 그간 우리가 한국형 누아르라 (임시로) 불러오던 각종 이미지와 클리셰, 관습을 빠져나와 방황하는 무숙자다. 전술한 ‘누아르의 비장미’라든지 ‘부조리의 짙은 혼란’이라든지 하는 것들은 기실 우리가 알던 20세기 영화사의 유산일 뿐 이것이 한국적인 것으로 변환될 당위와 사례, 계보는 딱히 없다. 되레 한국영화의 특이체질을 가장 활기차게 드러냈던 2000년대 르네상스의 기억은 <살인의 추억> 속 삑사리나 <올드보이> 속 기이한 근친상간의 대물림처럼, 혹은 <극장전>이나 <박하사탕> 에서 한심하게 영화의 시간을 배회했던 남자들처럼 쿨하기보단 대체로 어딘가 핀트가 하나씩 어긋난 것들과 기성 장르의 뒤틀린 혼종에 가까웠다.
앤디(지창욱)는 쉼 없이 ‘x발’이란 욕을 내뱉는다. 이 욕설은 딱히 할 말 없는 대화의 틈을 자신의 권위로 채우는 텅 빈 시간이다. 요컨대 <리볼버>는 서사도 인물의 대사도, 나아가서는 앤디라는 캐릭터의 존재마저 텅 빈 무언가로 만들어버리는 과격함을 취한다. 앤디의 의미는 <리볼버>란 영화의 본성과도 같은 것이다. 재벌가 자제인데 ‘x발’만 외치다가 끝내 초라한 태를 뽐내는 앤디처럼 <리볼버>는 의도적으로 누아르란 외피만을 챙겼을 뿐 한국영화의 체질적인 엉성함을 표면에 가득 전시한다. 홍콩영화의 멋짐을 따라 <신세계>를 만들었던 박훈정 감독이 <귀공자>에 들어 어이없는 슬랩스틱과 콩트의 세계로 진입한 것은, 유아 퇴행 혹은 소년 퇴행적인 캐릭터 귀공자(김선호)를 만들었던 것은, <리볼버>가 앤디를 만든 이유와 별다르지 않아 보인다. 멋진 누아르, 쿨한 누아르로 표상되는 외계의 영화 장르에 조금 반발하며 아이처럼 울부짖거나 웃기게 움직이는 것이야말로 한국형 누아르의 진상에 가깝지 않느냐는 의문이자 객기다.
<리볼버>는 하수영을 통해 그냥 자기가 할 수 있는 일까지만 하는, 우리가 감히 꿈꿀 수 있는 최대치의 사치인 14억원짜리 아파트와 현금 7억원이 가지고 싶을 뿐인 진짜 작금 한국의 중년을 그릴 뿐이다. 이 영화는 그간 한국영화가 빚져 오려 노력하던 정전의 누아르, 이를테면 와일더나 멜빌이나 코폴라나 폴란스키나 두기봉이나 코언 형제나 마이클 만의 자장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한국 사람 하수영의 거대하고 극사실주의적인 탈옥극에 가까운 것이다. 하물며 이두용, 임권택식의 이념 누아르마저 우리의 풍토가 아닌 양, 이제는 잊어도 되는 양 제대로 봐지지 못하는 시대다. 이 상황에서 한국영화는 할리우드의 뒤를 따르는 모호한 웰메이드 콘텐츠나 잘 조립된 장르에 집착할 것이 아니라 <리볼버>처럼 한국영화 르네상스를 떠올리게 할 만한 이상하고 난잡하며 엉성한 자유를 꿈꿔야 하는 것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