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2]
[인터뷰] 한 시대의 퇴장을 어떻게 담을지 고민했다, <장손> 오정민 감독
2024-09-12
글 : 이유채
사진 : 최성열

“가장 먼저 하고 지나가야 하는 이야기이자 꼭 내 첫 영화가 되어야 하는 이야기.” 두부 공장을 가업으로 잇는 3대 대가족의 삶을 시나리오로 쓰는 동안 오정민 감독은 설명할 수 없는 강한 확신이 들었고 5년간의 준비 끝에 장편 데뷔작 <장손>을 내놓았다. <화양연화>를 보고 양조위의 눈빛에 매료돼 영화 세계에 입문한 오정민 감독은 한국영화아카데미에서 연출을 전공하고 <연지> <림> <CUT> <백일> <성인식> 등의 단편을 찍었다. 종손 성진(강승호)을 중심으로 <장손>을 만들면서 그는 애증의 윗세대에 대한 의문이 어느 정도 해소됐고 이제는 그들을 이해할 수 있는 단계에 와 있다고 말한다.

- 관객 반응이 궁금한 영화다. 부산국제영화제 등 여러 영화제를 돌면서 어떠한 감상평을 들었나.

= 큰고모(차미경)에 이입해 지긋지긋한 집안에 화가 난다는 분, 아버지 태근(오만석)의 입장에서 남자의 무게감을 아느냐고 했던 분까지 관객 각자가 본인이 동일시한 캐릭터를 토대로 자기 사연들을 꺼내놓으셨다. 보는 사람마다 다르게 느끼는 영화를 만드는 게 감독으로서의 목표이고 <장손>은 그만큼 다양하게 해석되도록 설계한 작품이라 천차만별의 후기를 들을 때마다 기분 좋았다.

- 한 집안의 내밀한 곳을 생생하게 파고드는 영화라 자전적 이야기가 아니냐는 질문도 숱하게 받았을 것 같다.

= 단골 질문이었다. 실제로 대구의 대가족에서 태어나 부모님보다 할아버지, 할머니 손에서 자랐다. 내가 20살 때 할머니가 돌아가신 뒤 평화로웠던 우리 가족이 서로의 묵은 감정을 꺼내면서 싸우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면서 ‘어떻게 지금 그러지, 이런 게 어른의 팍팍한 세계인가’ 하는 환멸을 느꼈다. 그런데 나이를 먹을수록 인간의 모난 면을 긍정하게 됐고 나 역시 양가적인 감정을 가지고 살아간다는 걸 깨달았다. 개인적 경험에서 시작했으나 한국인은 물론 해외 관객까지 공감하는 확장성 있는 영화가 되길 바라며 시나리오를 고쳐나갔다.

- 확장성을 위해 어떤 과정을 거쳤나.

= 세대에 대한 고민을 많이 했다. 왕권 시대를 거쳐 식민지와 해방을 겪고 전쟁, 독재, 민주화 그리고 지금의 정보화 시대까지. 서구로 따지면 약 300년의 세월을 모두 경험한 역사적으로 유례가 없는 할아버지 세대를 바라보는 아랫세대의 마음, 부모님 세대에 관한 감각들이 풍부하게 담기도록 신경 썼다. 지금의 3대 대가족 가계도가 그 결과물이다. 일제강점기와 베이비붐 세대, X세대와 MZ세대를 표상하는 인물들로 꾸렸고 성별과 경제 상황, 사회적 계급에 차이를 두어 다양성을 고려했다.

- 여름부터 겨울까지의 3막 구조로 누나(김시은)의 딸 늘봄이가 태어나면서 사계절이 완성된다. 계절과 카메라가 깊은 관계를 맺고 있는데 이진근 촬영감독과 전체적인 컨셉을 어떻게 잡았나.

= 우선 카메라의 온도가 계절마다 달랐으면 했다. 복작복작하고 생동하는 여름에는 숏 분할과 이동을 많이 하고, 죽음이 있는 가을로 들어서면 속도를 늦추고 컷은 점점 길게, 마지막 겨울에 이르면 모든 게 고정된 이미지처럼 보이도록 했다. 그걸 바탕으로 콘티를 구체적으로 짰고 거의 그대로 갔다. 채도 높은 여름 영화로 시작해서 모노톤의 흑백 겨울 영화로 끝나는 일련의 흐름을 살리는 것도 중요해서 김채람 미술감독, 홍초롱 조명감독과 색감과 질감에 관한 대화도 많이 나누었다.

- 롱숏을 주로 쓴 카메라의 관찰자적인 시선에서 가부장제를 해체하겠다는 공격적인 태도보다는 가족이란 미지의 세계에 관한 호기심도 엿보였다.

= 가족은 이래야 한다는 정의를 내려본 적 없다. 그런 구호나 메시지는 기사나 대자보 같은 영화 바깥의 영역에서 펼쳐야 효과가 있다고 생각한다. 별개로 가족이란 테마는 꾸준한 관심사다. 인간에 관한 거의 모든 걸 담아내고 사소한 것까지 예민한 관계라 권력, 계급 등 그 어떤 소재든 깊이 탐구할 수 있다.

- 성진은 매 에피소드를 여는 안내자 역할을 하지만 갈등을 빚어낸다거나 사건의 주동자가 되진 못한다. 가족과의 거리감이 확 느껴져 그가 외부인처럼 생각된 순간도 있었다. 주인공 성진을 이러한 위치에 둔 이유는.

= 무의식적이었다. 캐릭터를 강화하는 방향도 고민했는데 결국 원래 자리로 돌아왔다. 보통의 작법대로라면 주인공 성진은 집단을 변화시키고 자신도 달라져야 하는 캐릭터다. 하지만 나는 6개월의 시간을 다루는 우리 영화에서 그런 식의 극적 전개가 가능할까 하는 의구심이 있었다. 단기간 동안 사건을 목도하면서 성진이 할 수 있는 최선은 반응이며, 그것이 진실한 무언가라고 판단했다.

- 어느 집마다 쉬쉬하는 이야기가 있기 마련이다. 벌어지는 사건의 자초지종과 인물들의 속내를 밝히지 않아 가족의 은밀함이 더욱 드러나더라.

= 큰고모가 장례식날 방을 뒤졌다고, 또 할아버지(우상전)가 성진에게 남긴 돈이 큰고모의 돈이라고 확신할 수 있을까. 진실은 누구도 알 수 없다. 그저 집안에서 각자의 주장이 소문으로 떠돌 뿐이다.

- 큰고모의 집에 불이 났어야만 하는 이유는.

= 불난 상태가 큰고모의 심연일 수 있겠다 싶었다. 역시 누가 불을 질렀다고 단언할 수 없지만 부여받아 지켜온 걸 자기 손으로 부수는 게 무엇일지, 그의 마음이 지금 얼마나 밑바닥에 가 있는지를 생각하며 썼다.

- 할아버지가 성진을 태근이라 여기고 말을 늘어놓는 밤 신에서 끝까지 고집스럽게 담아낸 할아버지의 등이 인상적이었다.

= 롱숏 그리고 뒷모습을 잘 찍자는 게 이 영화를 만들 때의 주요한 욕망이었기 때문에 공들인 신이다. 두 사람이 시선을 공유하지 않아야 할아버지의 착각이 계속된다는 현실적인 판단도 있었지만 이 신에서 할아버지가 그가 속한 시대의 표상으로 느껴졌으면 했다. 뒷모습에는 그렇게 할 수 있는 이미지적인 힘이 있고 그건 얼굴이 가진 힘과는 분명 다르다.

- 할아버지가 홀로 걷는 롱테이크 엔딩에 관한 질문에 어떤 의미를 담고 싶지 않았다는 답으로 말을 아껴왔다. 오늘 좀더 나아간 답변이 듣고 싶다.

= 생각한 의미도 의도도 있지만 연출자가 어떤 신을 하나의 문장으로 정리하는 건 관객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해 피해왔고 여전히 조심스럽다. 결국 엔딩에는 사라져가는 것들, 한 시대의 퇴장을 어떻게 담을 것인가를 고민한 결과가 담겼다고 할 수 있겠다.

- 배우에 이끌려 감독이 된 만큼 가장 작업해보고 싶은 배우가 누구인지 무척 궁금하다. 앞으로 만들고 싶은 영화에 대해서도 말해준다면.

= 염정아 배우. 자꾸만 보고 싶게 만드는 흡인력이 있다. 무거운 역할을 맡아도 묻어나오는 이 배우만의 사랑스러움과 귀여움이 매력적이다. 그리고 언젠가 폴리아모리적인 멜로영화를 찍고 싶고 어떤 영화가 됐든 나의 부끄러운 지점을 발견해주는 솔직한 작품을 만들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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