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연극 <팬지>로 데뷔한 배우 강승호는 자신을 “공연만 해온 사람”이라 정의했다. 대학(중앙대학교 공연영상창작학부 연극전공) 때부터 거의 매해 무대에 섰고 인터뷰 당일에도 8월 초연한 <사운드 인사이드>로 관객과 만나고 있었다. 드라마 <트레이서> <마이 데몬>과 영화 <숏버스 감독행>(2021)에도 출연했으나 영상매체와 친숙해질 만큼의 비중은 아니었기에 첫 영화 주연작 <장손>은 그에겐 모험이었다. 두부 공장을 가업으로 잇는 대가족의 종손 성진 역을 맡아 카메라 앞에 서는 동안 그는 욕심내지 않았다. 초심자로서 감독과 스태프의 이야기를 경청하고 노련한 선배배우들의 말과 행동에 충실히 리액션하려 했다. 정직한 공정을 거쳐 두부를 빚어내는 장인의 마음으로 한컷 한컷 최선을 다한 끝에 뿌듯한 결과물을 얻을 수 있었다.
- 마지막에 캐스팅됐다고. 대가족을 맡은 배우들을 처음 만난 날을 어떻게 기억하나.
= 시나리오 리딩 날이었다. 그런 자리가 익숙하지 않고 낯도 많이 가려서 심장이 튀어나올 것 같았다. 영상매체에서 처음으로 주인공을 맡아 부담감도 컸는데 대사가 적어 긴장한 티가 그나마 덜 나지 않았을까. 그렇게 믿고 싶다.
- 영화를 영상매체라고 표현하는 데에서 영화와 아직 낯선 사이라는 게 느껴진다. 연극과 영화의 차이를 이번에 크게 체감했나.
= 그렇다. 공연은 순간마다 느끼는 현장성이 있고 끝난 뒤 쏟아지는 관객들의 박수와 함께 성취감을 바로 느끼는데 영화는 그렇지 않았다. 신마다 열심히 하지만 잘하고 있는지 알 수 없고 촬영 뒤엔 내 영역 밖인 후반작업이 있다 보니 일단 기다려야 했다. 그러고 나서 한참 뒤에 극장에서 완성작을 봤는데 엄청나게 큰 감정이 한꺼번에 밀려왔고 치유되는 느낌을 받았다. 영화 작업의 매력이 이런 건가 싶었다.
- 촬영장인 합천에서 합숙하며 찍었다. 세 계절을 근사하게 담아낸 영화를 찍는 동안 무엇을 보고 느꼈나.
= 메인 촬영 장소인 할아버지(우상전) 댁에서 차로 2~30분 거리에 숙소가 있었는데 참 좋았다. 내부 컨디션이 괜찮았고 사장님이 워낙 친절하셨던 터라 좋은 인상으로 남아 있다. 무엇보다 음식. 매일 촬영 끝나고 숙소로 돌아와 다 같이 먹은 한끼와 점심 밥차가 감동적일 만큼 맛있었다. 밥차 메뉴였던 흑돼지로 만든 제육볶음의 맛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 (웃음)
- 성진은 주인공이지만 사건의 주변부에서 주로 반응하는 인물이다. 오정민 감독이 난도 높은 역할이라고 설명한 캐릭터에 어떻게 접근했나.
= 연극을 먼저 말하자면 연습 과정에서 역할에 대한 데이터를 충분히 축적하고 무대에는 가볍게 올라가려 한다. 분장실에서 무대로 향하는 순간을 특별하게 여기지 않고 그저 여기 있다가 저기로 옮겨가듯 자연스럽게 말이다. 영화라고 접근법이 다르지 않았다. <장손>도 촬영 전에 감독님과 이야기 전반에 관한 대화를 많이 나눴다. 그 과정에서 감독님이 이 작품을 자전적인 작품으로 읽히는 걸 원치 않는다는 걸 느꼈고 그만큼 나도 연출자와 영화를 분리해서 생각하려 했다. 극 중 역할도 실제도 에너지를 받는 쪽이니 선배님들의 의견을 최대한 많이 듣고 현장에 임했다.
- 성진이 종손의 무게를 어느 정도 느낀다고 보고 연기했나.
= 성진은 겉으로 보기에는 별생각 없어 보여도 속으로 엄청난 부담감을 느낀다고 생각했다. 비유하자면 남들 눈에는 보이지 않는 길고 커다란 뿌리가 몸에 깊이 박힌 것 같은 느낌. 그것과 마주하긴 힘드니까 자꾸만 회피한다.
- 속내를 파악하기 힘든 성진이지만 그가 과거에 얽매여 살고 TV에 가끔 나오는 배우 아들을 못마땅해하는 아버지(오만석)를 미워하는 동시에 안쓰러워한다는 건 알 수 있다.
= 감독님과 사전 대화를 나눴을 때는 아버지에 대한 성진의 감정이 더 컸던 걸로 기억한다. 주사가 심한 아버지와의 과거가 성진에게 좋게 남았을 리 없다. 하지만 연기할 때 싫은 마음에 초점을 맞추지 않았고 나중에 영화를 보았을 때도 나쁜 아버지로 그려지지 않아 복잡한 부자 관계가 잘 표현됐다고 생각했다.
- 한밤중에 술주정을 부리는 아버지를 어머니(안민영)와 함께 이불로 제압하는 장면은 액션 신이라 부를 만하다. 현장 분위기는 어땠나.
= 그 신이 목소리만 나오고 마루가 끝에서 끝까지 다 나올 정도로 멀리서 찍지 않았나. 영화 경험이 없는 나로서는 그렇게 찍는 게 정확히 어떤 의미인지 알 수 없어 그저 연극을 하듯이 상황에 맞춰 최선을 다해 아버지를 이불로 덮어씌웠다. 카메라가 어딨는지도 모르고 말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결과물을 보니 카메라가 타이트하게 들어갔으면 인물들의 감정이 안 살았겠다 싶으면서 이러한 촬영법이 맞는다는 느낌이 직감적으로 들었다. 그런 신기한 순간이 촬영하는 동안 거듭됐다.
- 성진의 감정이 궁금한 신이 하나 있다. 돌아가신 할머니(손숙)의 장례식장에서 밖에서 혼자 담배를 피우던 성진이 앞서 봤던 엄마와 고모들의 우는 모습을 따라 하다가 돌연 그만둬버리는 신이다.
= 엄마와 고모들을 따라 한다고 보았나. (그렇다.) 진짜 운다고 생각한 관객도 만났는데 이렇게 다양하게 해석할 수 있는 장면이라니 흥미롭다. 나는 담배 신 바로 앞에 붙은, 아버지가 울며불며하는 신을 염두에 두었다. 성진은 아버지가 왜 그렇게까지 슬퍼하는지가 궁금해서 아버지의 울음소리를 그대로 내보지만 어떠한 슬픔도 느껴지지 않고 답도 안 나와 답답한 채로 흉내를 멈춘다.
- 할머니와 가까웠던 성진이 슬픔을 느끼지 못한다는 건 그가 아직 할머니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해서였을까. 앞서 성진은 장례식장에 들어섰다가 나오는 모습을 보여줬다.
= 그래서 성진은 아버지도 고모들도 모두가 대성통곡하는 상황에서 혼자 물음표의 상태였을 거다. 할아버지 역시 같은 상태라 입관 전의 할머니와 작별 인사를 나누는 시간에 두 사람만 미동 없이 서 있었던 거고. 거기에 성진은 남은 장례 절차를 종손으로서 무사히 마무리해야 한다는 부담감이 너무 큰 탓에 슬픔을 느낄 새가 없었을지도 모른다.
- 큰고모(차미경) 가족에게 느끼는 감정 또한 성진이란 캐릭터를 구성하는 중요한 요소다. 플래시백으로 정확히 묘사되진 않지만 큰고모부(이재웅)가 성진의 초등학교 졸업식 날 교통사고가 났고 그날 이후 큰고모부는 병원에 누워 있다.
= 사고로 인해 성진은 큰고모부에게 어느 정도 죄책감을 느낀다고 생각했다. 고모에게도 미안하고, 그 마음을 표현하려고도 한다. 하지만 그가 절실하게 미안해한다고 생각지는 않았다. 그랬다면 꽃가루 알레르기가 있는 큰고모부(이재웅)에게 병문안을 갔을 때 생화 대신 조화를 사가지 않았을까. 그 정도의 어긋남과 위선이 감독님이 추구했던 인물의 방향이었고 나 역시 공감했다. 그랬을 때 성진이 더 현실적이고 레이어가 있을 것 같았다.
- 그렇다면 병문안 신에서 성진이 고모에게 “나도 부모님처럼 생각했다”라고 했던 말에도 어느 정도의 위선이 깔려 있었다고 보나.
= 관객에게 그 말이 성진의 진심으로 다가갈 수 있겠지만 적어도 내게는 그 대사가 따뜻하진 않았다. 미안함도 분명 깔려 있겠으나 고모와 단둘이 있는 순간을 모면하기 위한 말이었을 수 있고.
- 영화에는 성진과 할아버지의 동행 신이 인상적으로 담겼다. 우상전 배우와 붙는 신이 많은데 선배에게 어떤 에너지를 받았나. 캐릭터상으로는 훈장님처럼 교훈을 많이 주셨을 것 같다.
= 전혀. 러블리하시고 유쾌하시고 정말 재밌으셨다. 아침마다 10km를 뛸 만큼 우리 중에 체력도 제일 좋으셨다. 배우 중 유일하게 경상도인이 아니셔서 언어적인 부담이 있으셨지만 사투리를 운율로 완벽하게 익히시는 모습을 보고 감탄했다.
- 그렇다면 강승호 배우는 대사를 어떤 식으로 외우나.= 무조건 외우는 식으로는 절대 못한다. 계속 말로 뱉어보면서 대사 한줄, 단어 하나하나의 의미를 찾는다. 그러기를 반복하다 보면 체화되고 있다는 감이 오기 시작하고 대사가 스스로 내 안에서 밖으로 나간다는 느낌이 드는 순간이 온다.
- 할아버지가 준 봉지 안에 담긴 게 거금이 든 통장이라는 걸 알고 혼란스러워하는 택시 신의 비하인드도 궁금하다. 이 신에서의 성진의 감정은 어떻게 준비해갔나.
= 그 장면은 감독님이 생각한 택시 안으로 들어오는 광량을 정확하게 맞춰야 했기 때문에 테이크를 여러 번 갈 수 없었다. 한정된 시간 안에 여러 버전을 찍고자 주어진 상황에 최대한 집중하려 했다. 손차양을 만들어서도 가고 빼고도 가봤는데 대본대로 들어갔고 손차양이라는 제스처에 외면의 의미가 담겼다고 생각했다. 여기서 영화라는 작업이 또 신기했던 게 영화에서 ‘해’는 그냥 ‘해’가 아니라 ‘여기서 차를 타고 2분 정도 가면 있는 산의 중턱에 걸린 해’라는 점이었다. 그렇게까지 디테일하게 계산하고 간다는 게 여전히 대단하고 놀랍다.
- 성진처럼 강승호 배우도 처음 배우를 한다고 했을 때 집안의 반대가 있었다고. 어떻게 부모님을 설득했나.
= 집안에 예술 계통의 사람이 없었고 여느 집처럼 우리 집도 부정적인 편이었다. 부모님을 말로 강력하게 설득하기보다는 결과물을 보여드렸다. 전국 청소년 독백 대회에 나가 10명을 뽑는 부산 예선을 통과했고 연극전공으로 대학에 진학하면서 부모님도 나를 조금씩 믿어주셨다. 고1 때 재미 삼아 연기 학원에 다닐 때만 해도 연기에 큰 흥미를 못 느꼈다. 그만두고 난 뒤 학원 친구들이 올린 무대를 보고 세상이 달라 보이는 경험을 했다. ‘나 이거 너무 하고 싶다’라는 마음이 샘솟았고 그때부터 공연이란 공연은 다 찾아보고 다녔다. 끼가 없는 듯해 물리적인 시간을 모두 연습에 썼다. 조금씩 성과가 나타났고 그만큼 더 열심히 했다. 그때만 해도 먼 미래까지 생각하진 않았는데 지금 이렇게 배우를 하고 있다.
- 꾸준히 연극무대에 서다가 2020년 <미씽: 그들이 있었다>를 시작으로 드라마에도 출연하고 있다.
= 대학 때 영화전공 친구들과 작업하면서도 매체에 대한 호기심이 들지 않아 나는 그런가 보다 했다. 그런데 막상 해보니 연극할 때만큼의 만족감이 있어 앞으로 더 공부해보고 싶다.
- 연극 <사운드 인사이드>로 무대에 선 지 2주쯤 지났다. 어떤 마음이 들게 하는 공연인가.
= 그동안 빠짐없이 공연을 하다가 처음으로 1년4개월가량 길게 쉬어봤고 그러고 나서 한 작품이 <사운드 인사이드>다. 오랜만의 공연이라 준비 과정에서부터 무대 위의 순간까지 하나하나가 다 소중하다. 휴식기 동안 적어도 하루는 꼭 쉬어야 한다는 걸 배웠다. 나를 몰아세우지 않으면서 10월 마지막 공연까지 매진할 계획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