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런트 라인]
[비평] 경계 없는 장소와 경계하는 시간, <수유천> <새벽의 모든>에서 감지되는 문들
2024-10-16
글 : 김소희 (영화평론가)
<새벽의 모든>

홍상수 영화에서 흩어지거나 반복되는 지표들을 물고 늘어지는 건 그의 영화를 감상하는 좋은 태도가 아닐 것이다. 가능한 한 투명하게 영화를 감각하고 그 감각을 길어 올리는 것이 그의 영화를 논하는 가장 좋은 방식이라는 암묵적인 합의가 존재한다. 그런 의미에서 홍상수 영화와 가장 먼 것은 ‘의미’이며, 의미의 총체로서의 ‘정치’다. 사적인 것이 정치성을 통과한 뒤라야만 의미를 얻는다고 인식되는 한국 사회에서 진정 사적인 것은 존재할 수 없는지도 모른다. 그런데도 유독 홍상수 영화의 ‘일상’만은 정치성의 침범을 받지 않고 온전히 남겨졌다. 예컨대 홍상수 영화는 정치적인 의미망 속에서만 점잖게 묘사되던 섹스를 정치에서 해방했다. 그의 영화 속 섹스는 쾌락에 종속되지 않고, 그 안에서 누구라도 자신의 사적인 민낯을 발견하게 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수유천>은 그의 영화와 가장 멀리 떨어뜨려 놓아온 ‘정치’라는 개념을 가까이 불러오도록 충동한다. 시언(권해효)은 자신의 누나이자 전임(김민희)의 어머니와 절연한 이유에 대해 누나가 친척들이 모인 가운데 큰소리로 ‘너 빨갱이니?’라고 물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공산주의자를 색출하고 밀고하는 지칭어인 ‘빨갱이’는 분단 한국을 사는 자들의 두려움과 거부감을 노골적으로 드러낸 말이다. 그 단어가 홍상수 영화에 등장하는 것이 생경하기는 해도, ‘빨갱이’에 초점을 맞추는 것은 ‘고추장’의 의미를 분석하는 것만큼이나 황당한 일이 될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말해볼 수도 있다. 고다르가 ‘이것은 피가 아니라 붉은색이다’라고 언급하며 서사에 갇히지 않은 이미지를 볼 것을 요청했다면, 홍상수는 이를 ‘이것은 빨간색이 아니라 고추장이다’라고 바꿔 쓰는 것처럼 보인다. 즉, 이것은 이념이 아니라 기호다. 이러한 맥락에서 빨간색(빨갱이)을 이념이 아니라 한국 사회를 떠도는 기표의 관점에서 살펴보는 것은 적어도 가능한 선택지다.

시언은 블랙리스트에 올라 고초를 겪은 예술가다. 그가 40년 전 쓴 시나리오로 지금의 학생들과 만든 촌극은 4명의 여성이 둘러앉아 끼니를 때우며 남은 살림살이와 부재한 남성들(아버지와 오빠)을 걱정하는 목소리로 채워진다. 그와 함께 커다란 총소리 음향과 철조망을 연상시키는 그림자 조명을 통해 전쟁의 이미지를 암시적으로 드러낸다. 시나리오가 쓰인 40년 전이라는 시간대는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과 그 이후를 떠올리게 한다. 민주화운동 이후 이를 수습하고 논하는 과정에서 어김없이 공산주의 프레임이 작동했다는 사실을 떠올릴 때, 그 역시 한국전쟁이라는 뿌리와 무관하지 않다.

홍상수 영화에서 정치가 작동하는 경우는 없었지만, 한국을 상징하는 지표는 빈번하게 등장해왔다. 궁궐과 유적지, 한옥마을과 같은 장소들과 이순신과 같은 위인이 꿈속 캐릭터로 등장하기도 했다. 하지만 어떤 것도 테이블 위에 늘어놓은 녹색 소주병의 위용을 넘지 못했다. 무엇보다 분단 한국의 정치 현실을 인식하게 만드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밤과낮>에서 파리를 도피처로 삼은 주인공이 평양에서 온 유학생을 만나는 에피소드가 두드러진 예외다. 모임에 참석한 남자의 억양으로 그가 북한 사람임을 확인한 성남(김영호)은, 대뜸 ‘김일성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라고 물어 분위기를 얼어붙게 만든다. 성남이 도피처로 삼은 파리는 치외법권이 성립되는 장소이자 남과 북이 만나는 일종의 판문점이다. <수유천>에서 삼촌과 조카의 만남은 이산가족 상봉에 버금가는 시간의 격차를 두고 이뤄진다. 삼촌은 조카의 아기 때를 기억하고, 40대가 되었다는 사실에 놀라워한다.

<수유천>, 문 없는 경계

<수유천>

<수유천>의 배경지인 여대는 경계가 삼엄하다고 말해진다. 여대 강사 전임은 연출자로 초대한 외삼촌 시언에게 요즘 학교 출입이 엄격해졌다고 말한다. 대화숏 직후 두 사람이 나란히 정문을 통과하는 뒷모습을 보여주는데, 문 옆에는 경비가 꼿꼿한 자세로 서 있긴 하지만 개폐 장치가 따로 설치되지 않은 통로다. 정문은 물리적인 차단막보다 상징적인 차단으로 기능한다는 점에서 판문점을 연상시킨다. 경계 없는 경계를 통과하면 평화의 시간과 분쟁의 시간이 교차한다. 전임은 술을 깨기 위해 한밤중에 캠퍼스 안에서 램프 하나 켜고 돗자리를 깔고 눕는다. 그러던 중 전 연출 준원(하성국)과 관련된 사건에 연루되면서 연극을 그만둔 3명의 학생이 어둠 속에서 나타나고, 함께 돗자리에 둘러앉아 위로의 말을 건넨다. 이 순간의 초현실적인 기운은 전 연출이 전임을 찾아오면서 일어나는 소동을 더욱 당황스럽게 느끼도록 만든다. 전임은 준원의 등장을 의아해하며, “출입증 반납 아직 안 했어요?”라고 질책하듯 묻는다. 자신이 뭘 그렇게 잘못했냐고 반문하며, 연출로 복귀시켜 달라고 요구하던 준원은 전임이 경비를 부르겠다고 압박한 뒤에야 마지못해 물러난다.

전임과 시언이 당면한 주요 과제는 갑작스럽게 연출이 바뀐 위기를 딛고 10일 안에 비전공자들과 새로운 촌극을 꾸리는 것이다. 그러나 촌극을 꾸리는 과정이 영화의 중심은 아니다. 새로운 연출과 학생들이 인사를 나누는 교실은 첫 시퀀스 이후 다시 등장하지 않는다. 시언이 수업 첫날 준비해간 꽤 두툼한 시나리오가 무엇에 관한 이야기인지도 언급되지 않는다. 부재한 줄거리의 자리는 이러한 위기를 초래한 전 연출을 둘러싼 가십이 차지한다. 교실 시퀀스는 수업 중간 교실을 빠져나간 전임이 조금 전까지 교실 안에 있던 시언을 건물 밖에서 만나는 것처럼 연결한 편집으로 이어진다. 이를 통해 교실의 안과 바깥, 촌극의 안과 실제 이야기를 잇는다. 전임은 시언에게 전 연출이 그만두게 된 경위를 설명한다. 이 이야기 속 당사자들은 이야기 안에만 머무르지 않고, 지분을 요구하듯 모습을 드러낸다. 아직 관계가 말끔히 정리되지 않은 이들의 이야기는 완료되지 않은 상태로 남는다.

촌극의 무대는 허구와 실재가 분리되지 않은 공간이다. 무대는 등퇴장로나 세트가 지어지지 않은 채 비어 있다. 원래 장소에 놓인 마룻바닥을 그대로 사용하고, 무대를 꾸미는 소품은 작은 사각 반상과 그 위에 올려진 네개의 컵라면과 젓가락이 유일하다. 시언은 작은 사각 반상과 네명의 학생의 위치를 잡아준다. 둘러앉은 배우들은 하나둘 라면을 먹기 시작한다. 그중 한명이 고개를 쭉 빼고 주변을 살피는 연기가 즉흥적으로 추가된다. 어디가 극의 시작이고, 어디가 끝인지에 관해 누구도 궁금해하지 않는다.

이들이 촌극을 만드는 과정을 가까이에서 지켜보는 전임은, 캠퍼스와 주변을 배회하며 문으로 경계지어지지 않은 공간에서 문을 만드는 존재처럼 보인다. 전 연출이 등장한 에피소드에서 보듯, 허가되지 않은 사람이 경계를 넘는 것은 무척 민감한 일이다. 문을 만드는 사람이라는 이미지가 가능한 건, 전임이 특정한 장소에 정박하지 않기 때문이다. 전임이 사는 집은 한번도 등장하지 않는다. 전임이 점한 장소들은 경계 지어지지 않은 바깥 공간이다. 영화의 첫 장면에서 전임은 천변의 돌난간에 걸터앉아 그림을 그린다. 천변을 보여주는 숏 앞에는 달을 비추는 숏이 맞붙곤 하는데, 카메라는 달의 위치가 연상되는 높이에서 부감으로 인물을 당겨 잡는다. 다른 날에도 전임은 천변에 걸터앉은 모습으로 등장한다. 마치 마땅한 거주지 없이 천변에서 잠들고 깨어나는 것처럼 보인다. 다른 날에도 전임은 집이 아닌 장소에서 모습을 드러낸다.

배우 김민희가 홍상수의 영화에 들어오면서 초래된 변화는 남성 캐릭터들의 권리처럼 보였던 배회하는 자의 위치를 여성 캐릭터, 혹은 고유한 자신의 것으로 가져온 것이다. 김민희는 종종 사건의 중심에서 벗어난 자리에 있음에도 중심의 존재감을 드러내곤 했다. <밤의 해변에서 혼자>와 <도망친 여자>에서 김민희는 지인이나 친구들을 방문하는 자였다. 중심 사건 바깥에 존재하는 연루자였던 <그 후>를 지나 <풀잎들>에서는 사람들을 관찰하고 기록하는 인물을 연기했으며, <강변호텔>에서는 관찰자라는 캐릭터의 특성이 거의 비인간에 가까워지는 경향을 드러내기도 했다. 한편 홍상수 영화에서 갑작스럽게 두드러진 직접적인 죽음 묘사는 그의 영화가 관객, 특히 한국 관객과 소통할 수 있는 공유 지대가 별로 남지 않았음을 시사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이후 <인트로덕션>을 통해 새로운 시작을 쓰는 듯 보인 그의 영화 세계는 예전과 같은 방식은 아니지만, 여전히 죽음의 그림자가 어른거린다. 새삼 한반도의 정세를 떠올리게 만든 <수유천>의 지표들도 언제나 상징적인 것으로 이야기되는 죽음을, 캐릭터의 죽음으로 축소하지 않으면서도 구체화하는 방편인지도 모른다.

<수유천>의 마지막은 정치적인 지표에서 비롯된 불길함과 실종(죽음)에의 예감을 작동시킨다. 시언, 정 교수와 나란히 장어집 근처 얕은 천변에서 담배를 피우던 전임은 갑자기 카메라 뒤편을 향해 사라진다. 이후 전임이 사라진 곳을 고정숏으로 비추고, 시언이 전임을 큰 소리로 부르며 찾는 화면 밖 목소리가 인적 없는 스산한 풍경을 더욱 불길하게 만든다. 잠시 후 전임은 “저 부르셨어요?”라는 대답과 함께 천진하게 걸어 나온다. 조금 전까지 도사린 불길한 분위기는 깨어진다. 시언이 “거기 뭐 있어?”라고 묻자, 전임은 “아니요, 아무것도 없어요. 정말 아무것도 없어요”라고 말하면서 계속 걸어 나오는데, 그 동작과 미소 띤 얼굴에서 프리즈프레임으로 전환되며 영화는 끝난다. 아무도 없는 풍경 속에서 인물이 걸어 나오는 순간, 텅 빈 것에 불과했던 풍경에는 하나의 문이 생성된다. 보이지 않는 문을 열고 인물이 나온다. 동영상을 스틸 이미지로 단번에 이동시키는 프리즈프레임은 캐릭터의 동작과 표정을 동결시키는 동시에 그를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 하나의 문으로 만든다.

<새벽의 모든>, 경계 없는 문

<새벽의 모든>

정지된 이미지에서 문을 상상하게 만드는 <수유천>의 마지막과 <새벽의 모든>의 끝맺지 않은 끝맺음은 대조적인 듯 보이지만, 서로 통한다. 미야케 쇼의 <새벽의 모든>은 어린이용 과학 완구를 만드는 회사, ‘쿠리타 과학’의 어느 한때를 비추면서 끝맺는다. 누군가는 캐치볼을 하고, 누군가는 자전거를 타고, 누군가는 계단을 내려온다. 각자의 자리에서 각자의 일을 하는데 그 안에는 조화로움이 있다. 회사의 공간은 문이나 담으로 구획된 경계가 없음을 그 특징으로 한다. 이러한 공간적 특성은 정신적인 문제로 직장을 그만둔 이력이 있는 두 주인공을 경계 없이 품어주는 구성원들의 태도와 닮았다.

영화가 병증을 보여주는 방식은 단순하지만, 의미 있다. 첫 장면에서 후지사와(가미시라이시 모네)가 월경전증후군(PMS)으로 인해 비 오는 날 우산 없이 젖은 벤치에 그대로 누워버리는 모습을 보여준다. 증상의 발현은 외화면 음악의 개입과 당사자의 일인칭 내레이션을 통해 이미 지나간 과거의 사건으로 제시된다. 일인칭 내레이션은 소설 원작 영화의 흔적일 수 있지만, 환자를 대상화할 수밖에 없는 위치에서 카메라와 관객을 자유롭게 하는 방편이기도 하다. 당사자의 자기 객관화는 대개 비당사자의 타자 주관화의 가능성과 맞물리곤 한다.

후지사와의 병증은 다른 캐릭터의 병증을 마주하는 하나의 문이 된다. 후지사와가 쿠리타 과학에서 만난 야마조에(마쓰무라 호쿠토)가 공황장애를 앓고 있다는 사실은, 건조하고 자기중심적인 그의 성격을 보여준 뒤에 드러난다. 사람들이 밀집한 장소에서 호흡 장애를 겪는 야마조에의 모습은 일인칭 서술이 아닌, 실시간의 증상으로 묘사된다. 앞서 후지사와의 병증을 체험한 관객은 은연중에 후지사와의 병증을 경유해 야마조에의 증상에 다가가게 된다. 이같은 방식으로 관객은 두 사람이 서로를 알아보기 이전에 두 사람을 연결한다. 후지사와는 자신의 병증을 경유해 야마조에를 돕고, 야마조에는 질병의 우위를 견주는 데서 벗어나 상대의 병증에 접근하면서 자신의 상태를 바라볼 힘을 얻 는다.

영화는 지속해서 사람들 사이의 간격을 인식하게 한다. 후지사와와 야마조에, 그들이 앓고 있는 서로 다른 질병, 애도 모임에서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고 둘러앉은 사람들과 각자의 사연, 카메라 뒤의 학생들과 카메라 앞의 구성원들, 탁구나 캐치볼 등 둘 이상이 필요한 활동에서 요구되는 거리 등 사람들 사이에 물리적이거나 심리적인 거리가 드러난다. 나란한 이들의 사이에서만 인식되던 거리는 이미 죽은 이의 생생한 목소리를 매개로 범우주적인 간격으로 도약한다. 천체 관측을 시연하는 장소에는 까만 밤하늘이 보이지만, 발표회가 끝난 뒤에는 아직 해가 지지 않은 하늘이 보인다. 밤을 품은 낮의 이미지는 서로 다른 시간의 공존을 표시하며, 그 사이를 넘나드는 문을 상상하게 한다. <수유천>이 우주를 하나의 인물 속에 축소한 결과라면, <새벽의 모든>은 인물을 우주 속 개체로 포괄한다. 한쪽은 인간 속 세계를 그릴 때, 다른 쪽은 세계 속 인간을 그린다. 영화와 관객 사이에는 사람임을 잊지 않고 세계에 다가가는 문이 놓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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