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네21 리뷰]
[리뷰] 종말의 이미지가 소생하는 엄숙한 생(生)의 감각, <룸 넥스트 도어>
2024-10-23
글 : 정재현

베스트셀러 작가인 잉그리드(줄리앤 무어)는 신간 출판 기념 사인회에서 옛 친구 마사(틸다 스윈턴)의 근황을 듣는다. 유력 언론에서 종군기자로 이름을 날리던 마사가 현재 수술로도 손쓸 도리가 없는 자궁경부암 3기 환자라는 것. 해후한 두 친구는 이후 병실과 집을 왕래하며 소식이 두절된 채 살아온 수십년의 공백을 끝없는 대화로 채운다. 언제나 말하는 쪽은 마사고, 듣는 쪽은 잉그리드다. 여느 때처럼 마사와 만나 영화 상영을 기다리던 잉그리드는, 마사가 자발적, 적극적 안락사를 결심한 것을 알고 충격에 빠진다. 게다가 마사는 스스로 끝을 선택한 날 잉그리드가 자신의 옆방에 머물길 바란다. 전장을 누비던 시절부터 수차례 죽음의 위기를 직면했지만 그럴 때마다 동행이 존재했다는 이유다. 결국 잉그리드는 마사의 제안을 수락하고 함께 지낼 뉴욕 교외의 별장으로 여행을 떠난다.

<룸 넥스트 도어>는 페드로 알모도바르 감독의 첫 영어 장편영화다. 스페인을 떠난 알모도바르의 영화는 신기하리만치 대사량이 적고, 텔레노벨라풍의 서사 전개도 전에 비해 두드러지지 않는다. 심지어 이 작품은 그의 40여년의 감독 경력 중 많지 않은 소설 원작(시그리드 누네즈의 <어떻게 지내요>)의 작품이다. 일견 알모도바르의 자장에서 비껴난 작품처럼 보이지만 <룸 넥스트 도어>가 알모도바르의 연출작임을 알아채는 데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을 터다. 가장 확실한 알모도바르의 인장은 역시 컬러 팔레트다. 알모도바르 영화 속 스페인이 실제 스페인이기보단 알모도바르식 스페인이었듯 이번 영화 속 뉴욕은 우디 앨런이나 노라 에프런 영화에서 본 뉴욕과는 거리가 먼 강렬한 원색으로 가득 차 있다. 특히 먼셀의 20색상환에 입각해 철저히 보색 대비를 맞춘 듯한 틸다 스윈턴과 줄리앤 무어의 의상을 주시하면 더욱 흥미로운 감상이 될 것이다. 그간 앙리 마티스나 파블로 피카소의 화풍에 비유된 알모도바르의 영화가 이번 작품에서 직접적으로 인유하는 화가는 에드워드 호퍼다. 호퍼의 그림은 영화에 직접 등장하는 것은 물론 후반부 결정적인 장면에 배우의 몸으로 직접 육화되며 잊을 수 없는 여운을 남긴다.

페드로 알모도바르는 근작 <페인 앤 글로리>(2019), <패러렐 마더스>(2021) 등을 통해 질병과 전쟁이 말미암은 죽음의 그림자 앞에서 서로 다른 세대에 놓인 인물이 혈연을 어 유대하는 과정을 담아왔다. <룸 넥스트 도어> 또한 앞선 두 장편영화와 함께 ‘죽음 3부작’으로 묶일 법하다. 시한부판정을 받은 마사와 엄마와 거리를 두는 딸 미셸, 베트남전쟁과 이라크전쟁 등 미국의 패권 추구가 앗아간 무고한 생명들과 생존자에게 야기한 불안, 코로나19 팬데믹과 전세계적 기후 위기까지 <룸 넥스트 도어>는 알모도바르의 그 어떤 영화보다 멸망 앞에 선 자들이 느끼는 공포와 불안으로 즐비하다. 하지만 제81회 베니스국제영화제 황금사자상 수상한 이 비범한 영화는 단지 종말을 고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죽음의 이미지를 앞세워 삶의 존엄을 성찰하고 예정된 정지 앞에 굴복하지 않는 인간이 통렬히 깨우치는 생의 감각을 섬세히 들여다보는, 존재 그 자체의 가치를 일깨우는 노장의 걸작 이다.

close-up

영화엔 틸다 스윈턴과 줄리앤 무어가 수십년간 보여준 명연기를 오마주한 듯한 숏이 내내 등장한다. 아픈 친구의 훌륭한 대화 상대가 되는 잉그리드는 <싱글맨>의 찰리와 겹치고, 딸과 평생 가까워지지 못한 마사는 <케빈에 대하여>의 에바와 포개진다. 꽃을 사들고 뉴욕 거리를 가로지르는 줄리앤 무어의 숏은 <디 아워스>의 오프닝 시퀀스와 조응한다. 틸다 스윈턴은 이번 작품에서도 흥미로운 1인2역을 시도하는데, 분장한 모습이 <어댑테이션>의 영화사 간부 발레리와 놀랍도록 닮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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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멋진 하루> 감독 이윤기, 2008

스윈턴이 절정의 액션을 하면, 무어가 진심어린 리액션을 한다. 서로의 호흡을 그대로 받아 돌려주는 두 배우의 연기는 두 연인의 탁구 랠리 같은 대화 시퀀스로 꽉 찬 영화 <멋진 하루>를 떠올리게 한다. 두 작품은 영화를 볼 땐 말을 거는 쪽의 얼굴에 집중하지만, 보고 난 후엔 말을 듣던 쪽의 얼굴이 잔상으로 남는다는 점에서도 어울리는 한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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