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영화처럼, <남과 여>
2001-03-26
프랑스 영화처럼, <남과 여>


“… 가을날 비올롱의 긴 흐느낌 소리 스며들어, 마음 설레이고 쓸쓸하여라….” 까까머리 중학교 시절, 시를 좋아했는데 어느 날 세계의 명시를 펼치다가 울컥 했던 베를렌의 ‘가을의 노래’라는 시의 앞부분이다. 비올롱이 뭔지는 몰랐어도 가을날과 긴 흐느낌이란 단어가 가슴을 휑하게 할 만큼 잘 어울린다는 생각에 울컥 했다. 나중에 비올롱이 바이올린의 불어식 표기임을 알았고, 불어의 시적인 언어에 끌렸다. 종점다방에서 설탕 듬뿍듬뿍 넣어서 커피를 보약처럼 마시던 시절엔, 책에서 보던 ‘카페테리아’ ‘아트리에, 테아트르’라는 불어에서도 무드가 느껴졌다. 불어에 대한 동경으로 대학 때는 샹송 동아리에 들어서 안 되는 혀를 굴려가며 이브 몽탕의 <고엽>, 에디트 피아프의 <장밋빛 인생>을 불러댔고 그건 내 18번이 되었다. 더벅머리 하고서 경복궁 앞 프랑스 문화원 지하극장에서 보던 프랑스영화는 또 왜 그렇게 아득하고 감미로웠던지….



내 청춘도 사랑으로 아득하던 어느 날 보게 된 영화가 클로드 를로슈 감독의 1965년 영화 <남과 여>다. 설명이 필요없을 만큼 프랑스영화하면 첫 손가락에 꼽는 영화다. 여주인공 아누크 에메의 지성미와 고상미는 지하철 통풍구에서 치맛자락을 펄럭이며 100만달러짜리 각선미를 자랑하고, 샤넬 넘버5가 잠옷이라는 섹시심벌 마릴린 먼로도 우아하게 배반한다. 한여름에도 추울 거 같은 여자 아누크 에메의 우수와 공허에 가득한 눈빛에 빠져들었고, 로맨틱하고 서정적인 프란시스 레이의 음악의 감미로움에 빠져들었다. 자동차 유리창 위에선 와이퍼가 세찬 빗줄기를 쓸어내리는데, 차 안엔 남과 여 그 묘한 사랑의 떨림들…. 이 모두가 프랑스풍의 동경을 채우기에 충분했다. 그뒤에 드라마 PD가 되어서도 때려부수고 뒤집어엎는 걸로 제작비를 팡팡 쏟아붓는 할리우드 액션영화보다는 디테일 하나를 잡아내는 프랑스영화를 좋아하게 됐다. <남과 여>의 줄거리는 사랑하는 남편과 아내와 사별한 스크립터 여자와 자동차 레이서인 남자가 어린 자녀들의 기숙사를 오고가다가 만나게 되고 서로 사랑하지만 과거 사랑했던 흔적 때문에 주저하다가 라스트신에서 재결합하는 내용이다. 그다지 극적이지도 않은 평범한 줄거리다. 대다수 프랑스영화가 그렇듯 대단한 서사구조가 없어도 영화의 독특한 영상표현기법이 색다른 소스맛으로 영화를 버무려낸다. <남과 여>도 절제된 대사에 시적인 영상미, 그 속에서 쓸쓸하게 혹은 감미롭게 넘실대는 프란시스 레이의 보사노바풍의 멜로디, 그리고 고독한 미인, 안느 역의 아누크 에메와 외로운 남자, 장 루이 역의 장 루이 트랭티냥의 디테일한 표정연기, 컬러와 흑백을 경계없이 넘나드는 독특한 몽타주들…. 이 모든 것들이 따로국밥처럼 따로 놀지 않고 섞어찌개처럼 잘 어우러져서 감성에 호소한다. 특히 기억에 남는 건 비오는 날 여자가 기차를 놓치고 처음으로 남자 차에 탔을 때의 장면이다. 남자가 라디오를 트니까 우스꽝스런 음악이 흘러나오고, 남과 여는 픽하고 웃으며 비로소 어색한 기운을 털어내는데 심리적 디테일이 살아 있었다. 각자 어린 딸과 아들을 데리고 바닷가에서 애들을 안고 있을 때 여자 손을 잡으려다 마는 남자 손의 클로즈업…. 그리고 그뒤 차 안에서 남자가 여자의 손을 잡을 때 아누크 에메의 표정을 거의 1분 정도 롱테이크로 놓는데 그 표정의 디테일이 무척 인상적이었다.



영상과 음악, 심리적 디테일의 3박자가 들어맞는 프랑스영화를 좋아하다보니까 1996년 드라마게임을 하게 됐을 때 아예 제목을 ‘프랑스 영화처럼’이라고 정하고 단막극을 만들었던 기억이 난다. <남과 여>는 논리보다는 감각에 호소하고 작지만 오래 남는 소품 같은 영화다. 아직 부족하지만 언제나 <남과 여>처럼 아름다운 사랑이야기를 만드는 것이 나의 소박한 꿈이다. 핸들을 잡으면 살랑대는 봄햇살에 매일 오가는 길을 벗어나 이정표를 무시하고 어디론가 달려가고 싶은 계절이다. 사랑, 그건 겨우 유효기간이 얼마 되지 않는 하찮은 화학반응 정도라 하더라도 이 봄날, “… 브라보 사랑해요. 안느가….” 안느로부터 날아온 사랑의 전보를 받아들고 6천km의 거리를 액셀러레이터 밟아 여자한테 달려가는 장 루이가 돼보고 싶진 않은지…,



인생 한방, 사랑 한방을 외치는 시대지만 그렇게 달려간 바닷가에서 안느를 발견하고도 달려가지 않고 헤드라이트 불빛을 백사장에 깜빡이며 한 템포 쉬어가는 뜸 들이는 사랑을 하고 싶지는 않은지…, 기차역으로 여자를 떠나보내고 이대로 끝낼 것인가? 고뇌하다가 기차를 갈아타는 역에 먼저 마중나가서 기차에서 내리는 놓쳐버린 사랑을 붙들고 싶진 않은지…. 왜냐하면 연분홍 치마가 봄바람에 휘날리며 봄날은 갈 것이고, 세월은 우리 곁에 그리 오래 머물러줄 만큼 친절하지 않으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