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2]
‘영화적인 것’에 대한 강박과 오해 - 영화 <채식주의자>와 <흉터>의 경우
2024-10-31
글 : 김경수 (객원기자)
<채식주의자>

한강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 직후 그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채식주의자>(2010)와 <흉터>(2011)가 재개봉했다. 누군가는 작가의 팬으로서, 누군가는 작가를 알려고 영화를 볼 것이다. 문제는 두 영화가 성공적이지 못한 영화화 사례로 이야기되는 작품이라는 사실이다. 한강 작가는 2014년 웹진 <채널24>와 한 인터뷰에서 “사건 중심보다 인물의 내면을 따라가”는 영화화를 바란다고 말했지만 두 영화가 그 바람을 제대로 실현했다고 말하긴 어려워 보인다.

우선 도드라지는 문제는 두 영화 모두 연출상 원작의 에피소드를 피상적으로 재현했다는 점이다. 영화 <채식주의자>의 경우 영혜(채민서)가 누구인지, 어떤 아내로 살았는지 등 설명 없이 영혜가 냉장고 앞에서 멍하니 있는 장면부터 그린다. 사건을 지탱하는 감정적 인과는 옮기지 않은 채 시각화에 몰두하니 감정이입이 쉽지 않다. 영화가 소설의 서사를 모두 담아낼 필요는 없지만 핵심적인 뼈대를 생략하는 건 다른 차원의 이야기다.

<채식주의자>

다소 과격하게 표현하자면 영화 <채식주의자>는 원작의 문학적 장치와 주제에 대한 몰이해의 결과물이다. 소설 <채식주의자>의 핵심적 장치는 다름 아닌 ‘시점’이다. 소설집 <채식주의자>에는 영혜를 소유물로 보는 남편 ‘나’(<채식주의자>), 몽고반점이 있는 처제 영혜에 대한 예술적인 영감과 성적 매혹을 느끼는 형부(<몽고반점>), 영혜를 연민하는 언니(<나무 불꽃>) 등 세 인물의 시선이 교차한다. 각각 혐오와 대상화, 연민이라는 타자화를 그려내며 입체적인 이해를 돕는다. 반면 영화 속 카메라는 원작의 장치를 외면한 채 영혜에게 가해진 폭력을 관찰할 뿐이다. 영화 <흉터>도 마찬가지다. 원작 <아기 부처>의 화자가 남편에게 유자차를 탈 동안 자신을 “병원체를 품은 숙주”처럼 보는 자기혐오를 외면한다. “표정이 없는 것이 아니라 ‘없는’ 표정”(송경원, <씨네21> <흉터> 리뷰 중)이라는 평가를 뒤틀면 카메라가 없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마땅한 역할이) 없는 카메라다.

영화 <채식주의자>는 원작 속 익명으로 등장한 남편과 형부, 언니에게 이름을 더하는 과오도 저지른다. 소설 <채식주의자>는 육식주의와 남성성 이데올로기에 반성 없이 따르는 인간을 익명적 존재로 보고, 그들의 시선 밖으로 벗어난 영혜의 주체성을 그려낸다. 반면 영화는 형부 민호(현성)과 영혜가 격정적인 정사를 할 때 절정에 이른 영혜의 얼굴을 클로즈업하는 등 포르노의 클리셰를 답습한다. 소설처럼 민호의 카메라에 둘의 육체를 담되 그 카메라 밖에선 포르노를 찍는 상황은 원작의 의도를 정확히 배반한다. 결론적으로 영화 이미지에 대한 강박은 역설적으로 영화의 실패로 이어졌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두 영화는 인물의 은폐된 내면을 몸짓과 이미지로만 그리려고 한다. 영화 <채식주의자>에서 감독은 원작에서 기울임체로 서술된 영혜의 악몽과 내레이션을 그리려는 최소한의 시도라도 해야 했지만 하지 않는다. 타인의 상처를 온전히 볼 수 없다는 원작의 태도가 타인에 대한 감응을 포기하고 관찰만 하라는 태도는 아니다. 시각화에 앞서 원전의 충실한 이해가 필요함을 방증하는 사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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