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령인가? 동거인의 죽음을 예감한 잉그리드(줄리앤 무어)가 선베드에 쓰러져 흐느낄 때, 유리창 너머로 다가오는 흐릿한 마사(틸다 스윈턴)의 형체를 바라보면서 생각했다. 마침 객석의 몇몇이 숨을 훅 들이켠 것도 같다. 아직 배우 틸다 스윈턴이 퇴장하기엔 이른 타이밍임을 고려하는 훈련된 관객들에겐 어렵지 않게 오해의 해프닝을 유추할 수도 있는 대목이다. 하지만 이것은 페드로 알모도바르의 영화다… 그러니 약속된 자살의 사인(닫힌 문) 이후 등장한 저 태연한 존재를 유령이라 생각해도 이상할 것은 없다. <귀향>의 어머니가 그랬듯 말이다.
거부할 수 없는 희망의 형벌로 항암 치료를 견뎠으나 결국 암세포가 온몸에 전이된 자궁경부암 3기 환자. 다크웹에서 구한 안락사 약으로 언제든 죽을 준비가 되어 있는 시한부의 전직 종군기자. <룸 넥스트 도어>의 마사가 항시 지나치게 깨끗하고 스타일리시하게 묘사된다는 사실도 인물을 차라리 하나의 유령 또는 기호로 바라보게 한다. (투병하는 몸의 처절함을 소거한 알모도바르의 영화엔 말기 암환자의 영화임에도 단 한번의 구토가 등장할 뿐인데, 그마저도 마사의 것이 아니라 그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해 패닉에 빠진 잉그리드의 몫이다.) 나이와 성별, 출생 연대 미상이라고 수식할 만한 배우 틸다 스윈턴이 내뿜는 불멸의 기운을 소멸하는 사람에게 입힌 알모도바르의 심미안도 이런 인상에 기여한다. 연두색 선베드 위에서 노란 슈트를 입고 눈감은 마사의 이미지 또한 풍경의 디졸브와 함께 깨끗이 사라져버린다.
사라지는 모든 것은 잊힌다. 예정된 잊힘 앞에서 <룸 넥스트 도어>가 추구하는 과제는 단순하지만 긴요한 것이다. 우리는 이 서사에 도착한 한 사람의 성실한 작가가, 지나치게 개입하지 않되 두려움에 물러서지도 않으면서 흩어지는 존재의 비밀을 부여잡는 과정을 목도하게 된다. 잉그리드가 마사를 관찰하고 재해석할 동안 영화는 그들에게 최상의 색채와 구상적 감각을 부여하면서 기다려준다. 마주한 작가와 대상의 소실점이 맞아떨어져, 마침내 이 질문이 튀어나올 때까지. “네 얘기 써도 돼?”
<룸 넥스트 도어>에서 주목할 점은, 극 중 인물들을 사로잡은 중대한 설정 두 가지가 모두 기대와 어긋난다는 것이다. 하나, 잉그리드는 마사의 바로 옆방이 아닌 아랫방에 자리 잡는다. 여기엔 어떤 갈등이나 위기가 없다. 너무도 자연스럽게 그들은 적절한 거리를 설정한다. 둘, 몇번의 실패 끝에 어렵사리 죽음의 동거인을 구해놓고도 마사는 잉그리드가 외출한 한낮에 홀로 약을 삼킨다. 죽음에의 동반과 목격이 <룸 넥스트 도어>의 최종 심급은 아니라는 것이 확실해진다. 바람 때문에 닫혀버린 마사의 방문을 보고 착각한 잉그리드가 그의 진짜 죽음 이전에 실질적인 슬픔과 충격을 선행하게 한다는 점에서도 그렇다. 대신 죽음 이후 두 여자의 캔버스에는 눈물의 장례식이 아니라 글 쓰는 작가의 책상이 담긴다. 말하자면 이 영화가 계획대로 착실히 완수하려는 과업은 존엄한 죽음의 완성이라기보다 ‘서사의 완성’이다. 경찰 심문실에서는 미리 설계해둔 공고한 각본이, 엄마를 원망해온 딸에게는 그동안 말 못했던 전기(傳記)가, 편지 한장을 남기고 떠난 친구를 향해서는 내밀한 응답의 서신이 쓰여진다.
작가는 비밀을 삼키고 글을 쓴다. 그리고 반드시 무언가를 재생시킨다. 요컨대 <룸 넥스트 도어>는 <페인 앤 글로리>와 <패러렐 마더스>가 지닌 죽음의 모티프를 이어받되 당사자가 아닌 기록자로 시점을 전환하고 그 역할에 몰두한 영화이기도 하다. <룸 넥스트 도어>에서 마사의 딸이 모습을 처음 드러낼 때 우리는 다시 유령의 귀환을 의심하게 된다. 젊은 모습으로 분장한 틸다 스윈턴의 재등장 때문만은 아니다. 영화는 죽은 줄 알았던 마사가 발코니 유리창 너머로 잉그리드에게 걸어오는 일전의 이미지와 정확히 같은 구도로 딸의 모습을 재현한다. 그리고 배우 틸다 스윈턴을 다시 한번 연두색 선베드에, 잉그리드의 옆에, 눈 내리는 하늘 아래 눕힌다. 유령적 존재는 알모도바르 영화의 스타일로 그치지 않고 오인의 모티프와 1인2역의 장치를 통과하면서 소생의 숨결로 나부낀다. <룸 넥스트 도어>에서 기화되듯 사라진 마사의 육신은 <패러렐 마더스>에서 학살로 공동 매장된 유골들이 되살아나는 디졸브와 순환하고, 틸다 스윈턴은 그 순환 속에서 실로 불멸한다. 물론 이 영화에서 마사의 되살아남을 가능케 하는 것은 기억하고 기록하는 작가-잉그리드의 역량이다.
페드로 알모도바르는 이 비밀과 재생의 순환을 저지하는 현실의 세태에 상처받은 입장도 취한다. 법적 소송을 피하기 위해 회원의 몸에 절대 손댈 수 없도록 한 헬스장에서, 근육질의 트레이너는 슬픈 잉그리드를 위로해주고 싶어도 안아줄 수 없어 괴로워한다. 그의 뉘앙스에 따르면, 마찬가지로 마사의 죽음 이후 남겨진 잉그리드 역시 비슷한 혐의에 처할지 모른다. 친구의 죽음을 방조하거나 오히려 조장했다는 오해, 나아가 타인의 죽음을 작가로서 소재화해 착취했다는 비판. 달리 말해 알모도바르가 지향한 연극적 어투와 극도로 심미적인 미장센의 세계는 <룸 넥스트 도어>에서 픽션이라 가능한 어떤 안전함의 결속처럼 느껴진다. 연루자의 관점에서 비로소 서술할 수 있는 내러티브의 복잡성은 <룸 넥스트 도어>의 두 친구 바깥에도 있다. 전쟁터에서 섹스함으로써 두려움을 떨치는 가톨릭 수사들, 불길 속으로 뛰어드는 남편을 막지 못한 아내, 기후 위기 앞에서 아들 부부의 임신 소식에 경멸하거나 강연에서 독자의 질의응답을 거부하는 늙은 염세주의자가 그들이다. ‘룸 넥스트 도어’에 있지 않는 타인이 그들을 제대로 말하긴 역부족이다. 그러나 작가는? 부지런히 짐을 싸서 그들의 옆방 혹은 아랫방으로 향할 것이다. 그곳이 쓰는 사람의 자리다. 잉그리드가 마사에게 물려받은 완벽한 책상을 부러워하면서 나는 이제 <룸 넥스트 도어>의 다음 문이 열릴 곳도 가늠해본다. 첫 번째 경유지는 뉴욕에 남겨진 마사의 작은 서랍 안, 잉그리드가 그토록 궁금해하던 종군 수첩의 몇 페이지다. 보스니아 내전을 누빈 기자에게 샘솟았던 은밀한 아드레날린, 남자보다 강해지고 싶었던 욕구, 딸을 외면한 죄책감, 전쟁 중의 황홀한 사랑, 그리고 언젠가 픽션을 더해 썼으나 차마 발행하지 못한 기사가 모두 거기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