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덜란드 암스테르담의 초겨울은 영화 보기에 최적의 조건을 제공한다. 기습적인 호우와 진눈깨비, 햇살, 우박으로 수시로 표정을 바꾸는 바깥에 있느니 극장의 어둠 속으로 들어가 동굴의 안식을 찾는 편이 낫겠다는 생각이 절로 들기 때문이다. 이곳에 온 이튿날부터 마음의 명령을 따라 충실히 영화를 보기로 작정했다. 2024년 암스테르담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IDFA)의 프로그래밍을 요약하면 호들갑을 떨 만한 발견은 보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글을 쓰는 이유는 한국 다큐멘터리의 생동하는 기운에 대해 뭔가 할 말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올해 암스테르담에서는 4편의 한국 다큐멘터리영화가 프로그래밍되었다. 지난 1년간 국제 다큐멘터리 축제에서 성공적인 순회 커리어를 쌓은 작품들을 모은 ‘베스트 오브 페스트’ 섹션에 당당하게 포함된 2023년의 기린아 <애국소녀>(K-Family Affairs, 2023)를 제외하고, ‘루미너스’ 섹션에서 진정으로 빛난 <에디 앨리스> (Edhi Alice, 2024), 사사로운 암스테르담의 발견으로 언급하고 싶은 <네가 증오하는 우리의 진동>(Noise: Unwanted Sound, 2024), 초국가적 어젠다를 던진 한국·루마니아 공동제작 영화 <브라이트 퓨처>(Bright Future, 2024) 3편은 월드 프리미어(세계 최초 상영)로 공개되었다.
전환의 상태를 기술(記述)하는 트랜스 시네마
해방의 에너지가 비등점까지 끓어올랐던 <에디 앨리스>의 월드 프리미어 파티에서 출연자이자 캐릭터인 에디는 “세상의 또 다른 에디와 앨리스들에게 이 영화가 희망과 용기가 되기를 바란다”라고 침착하게 말했다. 김일란 감독은 전환의 경험을 지나온 두 트랜스젠더의 이야기 위에 에디의 소박한 소회에 담긴 소망을 부드럽게 놓아준다. 따라서 이것은 트랜스 경험을 공유하는 이들에 관한 보편 서사이자, 삶과 예술의 모든 측면에서 전환(transition)의 다원적 의미 맥락을 사유하는 시네마 에세이이다.
<에디 앨리스>는 각자의 삶에서 중대한 전기(轉機)를 맞이한 두 주인공의 교차 내러티브를 제시한다. 서사의 기초는 트랜스젠더 수술을 앞둔 서른다섯살의 박온열-에디이다. 30여분 지점까지 영화는 에디의 세계에 대한 정밀 묘사인 양 흐른다. 영화 속 영화, 또 그 안의 영화에 해당하는 에디의 스토리는 영화의 안과 바깥을 잇고 지우는 장치이다. 구조의 심오함 안에는 에디의 스토리를 서술하는 카메라-카메라 안 카메라가 더블링된다. 이렇게 겹쳐진 프레임 안에서 에디는 에디를, 앨리스는 앨리스를 연기(演技)한다. 130분의 러닝타임을 비대칭적으로 나눈 에디와 앨리스는 전환의 상태를 살고, 연기하며, 나아간다. 모름지기 다큐멘터리의 원소로서 ‘연기’는 연기자의 한 시절에 대한 내밀한 추체험이다. 그들이 자신을 연기할 때 그것은 일종의 모방 효과를 낳는다. 더 깊은 차원에서, 에디는 앨리스(가 지나온 길)를 모방하고, 앨리스는 에디가 모방하는 삶을 바라본다. 앨리스의 응시 위치는 카메라의 앞과 뒤 모두이다. 현재의 에디는 전환 수술을 하기로 결심했고, 앨리스는 춤을 배우기로 했다. 그가 별안간 춤에 헌신하려는 이유는 ‘본능적 결정’이라는 것 외에 설명되지 않는다.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다”는 자각이 저들의 운명을 포갠다. 멈추지 않는 방향과 속도로 정체성의 스펙트럼을 전개, 확산하면서 김일란은 그의 작가적 전환기를 알린 <3xFTM>(2008)의 쟁점을 근원적으로 넘어선다.
대관절 삶의 모방이란 무엇인가? 에디의 스토리는 은근한 근접성을 가지고 앨리스의 삶과 공명한다. 공들여 설계된 기하학 구조 안에서 저들을 비추고 반사하는 두 갈래의 비대칭 거울은 목욕탕, 횡단보도, 이태원, 잠, 애완동물, 변희수 하사, 리모델링, 자기소개, 셀룰로이드 필름, 가족, 눈물, 바다를 공유한다. 모방과 응시의 교환이 있다손 치더라도 에디와 앨리스가 처한 상황은 판이하다. 에디는 9년의 고뇌 끝에 전환 수술을 하기로 결정하였으나, 앨리스는 그 자신의 몸을 끊임없이 경멸해오다 남성의 성기를 자르는 것으로부터 시작하였다. 길게 고민한 에디는 빠르게 바뀌는 것 같고, 신속하게 결정한 앨리스는 모든 것이 더디다,
IDFA에서 7회차 상영이 배정된 <에디 앨리스>는 전회 매진을 기록하였다. 그러나 영화의 참된 성취는 축제의 강렬한 환대가 아니라 시네마의 광대한 영역을 자기식대로 탐험하겠다는 작가 김일란의 작은 결의에 있다. 그의 다섯 번째 장편다큐멘터리 연출작에서 김일란은 ‘트랜스토피아’라고 부를 만한 전인미답의 영화 담론 공간을 육성한다. <에디 앨리스>는 전환과 변이, 스펙트럼, 주관성, 동일성 등에 관한 논의가 열리는 이 공간을 통해 정체성의 정치, 재연, 재연과 실재의 중첩, 시네마틱 트랜지션이라는 현대 영화의 쟁점을 숨가쁘게 주파한다. 따라서 LGBT 다큐멘터리의 범주 안에서 이 영화를 논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 장르 구분의 유습을 초월하려는 ‘트랜스 시네마’는 손쉬운 정의와 영토화에 대한 저항이자, 젠더, 신체, 영화의 규범성을 해체하려는 실천이다. 서사구조에 복잡성을 더하는 셀룰로이드 필름의 편집 과정은 트랜스 수술의 함의와 상통하는, ‘자르고 붙이는 행위’의 다층위적 맥락을 상기한다. 트랜스 시네마의 협소한 정의를 넘어 김일란은 정체성 전환의 스토리를 시네마의 트랜지션으로 번안하였다. 이 모든 것을 말하기에 이 지면은 좁지만, 머지않은 미래에 이 영화가 더 깊이 논의되어야 할 말들을 데리고 우리에게 올 것이다.
정의와 분류에 저항하는 진정한 트랜스 미디어 아티스트의 자질을 보여준 또 다른 영화는 <네가 증오하는 우리의 진동>으로, 국제단편경쟁에 진출한 정혜진의 첫 번째 연출작이다. 헤이그의 예술학교를 졸업한 정혜진의 이 문제작은 인간의 노동이 신체에 가한 영향에 대한 반응을 탐구한다. 정치적 예리함과 시청각 스타일의 엄격함, 돌연한 서정성이 무정형의 꼴로 배합된 이 영화는 “당신이 기계일 수도 있다고 생각해본 적 있는가?”라는 의아한 질문으로 열린다. 그의 오른쪽 귀에서 난청과 이명이 시작되고, 의사로부터 “귀가 기계가 되어가고 있다”라는 진단을 받았을 때부터 정혜진은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애썼다. 난청을 앓는 환자들이 자신들만 들을 수 있는 소리를 묘사하기 위해 애쓰는 것처럼, 정혜진은 난데없이 찾아온 질환이 야기한 감각의 변화에 대해 무언가 말하고 싶다.
신체와 노동의 관계를 모티프로 한 <네가 증오하는 우리의 진동>은 기계화되어가는 현대적 인간의 조건을 불청객처럼 찾아오는 질환에서 찾는다. 그러나 이 영화는 임상적 용어로서 난청, 이명의 원인을 찾는 길을 내기 위해 기획된 것이 아니다. 다큐멘터리와 실험영화, 사운드디자인, 그래픽디자인을 병합한 다채널 예술을 통해 정혜진은 노동하는 인간에게 찾아오는 신체의 반응으로서 질환의 기원에 대해 이야기한다. 혼성적 오브제들이 조용히 공명하도록 배치한 플롯은 개인이 앓고 있는 병증의 여파를 사회적 질환으로 확장한다. 상하고 마모된 신체기능에 의해 무너지고 뭉개진 채로 들리는 소리는 파괴와 폐허의 이미지로, 내처 지난 몇년간 한국 사회 안에서 기계에 삼켜져 죽임을 당한 노동자들의 목록으로 전환된다. 그러나 목소리와 음성신호는 명징하게 해독될 수 없다. 화곡동의 집에서 할머니가 하는 이야기, 할아버지의 사연을 말하기 전까지 내레이터의 음성 디테일은 알아듣기 힘들다. 자신의 작업을 위해 정혜진은 ‘청각의 시각화’라고 부를 수 있는 감각 전환의 경로를 설계함으로써 개인의 경험과 가족 트라우마, 사회적 억압의 징후들을 불러낸다.
<네가 증오하는 우리의 진동>은 몽타주에 대한 완전히 새로운 아이디어를 가져왔는데, 여기서 이미지는 이전 이미지나 이후 이미지를 참조하지 않고 자화상, 트라우마, 죽음, 치료의 단계로 상승한다. 자본과 권력의 동기에 의한 죽음은 한국 사회의 표면 바로 아래에 존재하는 증오를 소환하고, 냉엄한 디지털 이미지 위에 얹어진 보이스오버는 사안의 긴급성을 신호한다.
조용한 연민과 슬픔의 정서를 자아내는 시청각 몽타주는 귀에서 눈으로 전환되었다. 자신이 앓는 증상을 관객들이 체험할 수 있도록 가능한 모든 수단을 사용하여 정혜진은 귀가 기계화되는 일만은 막아야 한다고 침착하지만, 절박한 목소리로 말한다.
밝은 미래의 목소리
다음 이야기는 기억, 애착, 혼란, 성장에 관한 감성적이고 몰입적인 증언을 담은 소품이다. 남아름의 <애국소녀>의 중심에는 한 가족이 있다. 연출자인 남아름과 공무원인 아버지 남형기, 여성 인권운동가인 어머니 변현주가 그들이다. 다큐멘터리 영화감독 아름은 그가 누리고 있는 민주주의, 12월18일이라는 의미심장한 생일이 모두 1980년대 군사독재에 맞서 싸운 부모에게서 받은 선물이라고 믿는다. 기록하는 법을 알려준 첫 번째 영화 선생님인 아버지를 통해 카메라를 들었던 아름은 부모의 유산을 좇아 민주시민으로 성장하였다. 그러나 아름의 자부심 넘치는 가족사는 고위공무원이 된 아빠가 세월호 참사를 국가의 입장에 서서 수습, 대변하면서 크게 흔들린다. 대척점에 자리한 아름의 엄마는 강직한 페미니스트이자 사회운동가로 국가권력과 가부장 체제의 부조리에 맞서 여전히 싸우고 있다.
남아름은 그 자신의 가족 이야기로 우리를 초대하여, 유머와 활기가 넘치는 톤으로 사랑하는 사람에게 기대하고 실망하고, 다시 연대하는 방식을 제시한다. 청년이 된 딸은 갈라진 가족, 갈라진 세대, 갈라진 세계를 표상하는 부모의 현재에 카메라를 비춘다. 촬영 과정에서 남아름은 부모의 분열이라는 딜레마에 봉착하고 오늘날 사회를 형성하는 시민으로서 자신의 역할에 대해 묵상한다. 감독 자신의 내레이션에 실린 가족사(事)에는 세계의 갈라짐에 대처하는 일, 시간과 거리를 초월한 유대의 힘, 개인에게서 사회로 확대되는 애국의 의미, 혼란과 슬픔, 화해, 치유의 가능성 등이 두텁게 겹을 이룬다. 다수의 장면이 감독-화자의 마음의 상태로 관객을 이끌기 위한 감각 기억을 불러일으키면서 감성적이고 질감 있는 스토리로 세대간 갈등과 유대의 뉘앙스를 형성한다. 남아름의 세대 경계 담론은 이 양식화된 소품에서 핸드헬드 관찰, 명상적인 서술 장면들에서의 솔직한 대화, 향수 어린 과거의 아카이브 영상에서 갈등이 촉발되는 현재로 미학적 레지스터를 수시로 바꾼다.
가장 진실하게 가슴에 와닿는 장면은 아버지와 딸이 마주 앉은 클라이맥스의 대화 신이다. 아름은 식탁의 맞은편에 앉아 머그잔을 토닥이는 아버지에게 카메라를 맞추고 말을 건넨다. 2014년 세월호 참사 직후 해양수산부 공무원이었던 아버지에게 보냈던 재수생 딸의 편지는 공무원의 ‘책임’을 묻는다. 작자이자 화자인 남아름은 사랑과 자조의 뉘앙스를 동시에 담은 여정의 끝에서 한국 사회 보편의 세대 담론으로 이 작은 이야기를 확장한다. <애국소녀>는 적당한 러닝타임에 많은 것을 다루고 있으며, 역사를 살아 있게 하고, 시간 안에서 살아가는 개인에게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일깨우는 다큐멘터리다. 세상은 좋아졌지만 삶은 복잡해졌다는 걸 아프게 깨달은 딸의 카메라는 그 복잡성을 단순화하는 대신 작은 순간들에 담긴 무게와 반성을 통해 앞으로 나아갈 길을 찾는다.
미래의 길을 향한 여정은 한국·루마니아 공동제작 영화 <브라이트 퓨처>의 중심 주제이다. 이 영화는 1989년 평양에서 열린 제13회 세계청년학생축전을 시각 인류학적으로 회고하는 파운드 푸티지 필름이다. 한국의 다큐멘터리 감독이자 프로듀서인 고두현이 공동 제작 파트너로 참여한 이 영화는 루마니아의 아카이브 연구자인 안드라 마크마스테르스의 데뷔작이다. 1989년 여름, 평화, 우정, 반제국주의를 기치로 내건 평양 축전은 역사상 가장 중요한 순간에 열렸다. 내레이터가 이야기하듯 축전 참가자들은 “화산의 가장자리에서 사회주의의 춤을 추는 것처럼 보인다”. 1인 독재 체제가 기승을 부리던 북한과 루마니아는 가장 가까운 우방국이었고, 정치, 문화적으로 많은 유사성을 가지고 있었다. 그렇다 한들 오늘날 35년 전의 학생 축제에 대한 기억을 되살려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희귀한 발췌 영상 속에서 축제 정신에 열광하는 청년들의 순수한 이상주의는 체제 선전에 골몰하는 화려한 기획과 선연한 대비를 이룬다.
과거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추구하는 이 영화는 돌고 돌아 다시 냉전의 문턱에 서 있는 오늘날의 지정학적 긴장 환경에서 이전 세대 청년들의 경험을 되돌아보며 국제적으로 연대하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 질문한다. 대다수가 아카이브 영상으로 구성된 <브라이트 퓨처>는 혁명적인 변화 직전의 이념적 열광과 인간적 만남의 기이한 공존을 회상한다. 다양한 출처를 기원으로 하는 생소한 보관 영상 안에서는 거대한 체제 선전 카드섹션과 거리 환영 인파, 환희에 찬 댄스파티, 절도가 넘치는 사열 의식, 유혈이 낭자한 격파 시범이 교차한다. 이미지 연상의 예술은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차우셰스쿠 독재의 악몽을 아시아의 철권통치 국가에서 행해진 추상적인 퍼레이드와 엮는다. 장엄한 이 선전의 발레는 민중이 견뎌낸 억압과 부조리에 대한 시각화이다. 스타디움의 확성기를 통해 반자본주의 구호가 울려 퍼지는 가운데 혼연일체의 행진을 보여주는 집체의 예술은 신중하게 큐레이팅된 이미지였다. 이 지점에서 <브라이트 퓨처>는 독재국가의 광기를 시각적 창의성을 가지고 분석하는 루마니아 뉴웨이브의 전통을 잇는다. 성실한 조사와 섬세한 배열만으로 훌륭한 영화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입증한 안드라 마크마스테르스 감독은 냉전과 독재의 최종 장(場)에서, ‘밝은 미래’를 예감케 하는 세계적 만남의 장소를 되살려낸다.
<브라이트 퓨처>는 많은 모순을 드러낸다. 조직적으로 연출된 안무와 애국심에 대한 호소가 체제에 대한 믿음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전부였을까? 젊음의 활기와 덧없는 연대가 주는 교훈은 무엇인가? 산산이 부서진 동맹의 시대에 평화와 연대를 주창했던 빛바랜 과거를 돌아보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는가? 아무려나 허다한 역사적 전환기에 끝과 시작은 극적으로 엇물려왔다. 마치 이 활력의 축제가 불러온 것처럼, 평양 축전 직후 루마니아에서는 독재가 종식되었고 밝은 미래가 열렸다. 우리에게도 이런 미래가 허락되기를 소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