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장이독자에게]
[송경원 편집장의 오프닝] 최선의 최선, 30주년을 여는 마음
2025-01-03
글 : 송경원

아무것도 아니다. 그냥 달력 교체하는 날이다. 매년 새해가 오면 이렇게 되뇌어왔다. 지난 1년의 후회와 다가올 새해에 대한 부담감으로부터 달아나기 위한 주문. 한해의 끝자락에 설 때마다 매번 우울감에 취한다. 1년 동안 해놓은 일을 정리하다 보면 살짝 초라한 기분에 사로잡히기도 하고 내년엔 뭔가 해내야 한다는 압박감도 싫었다. 그래서 종종 냉소주의의 주문을 되뇐다. 1년의 끝과 시작이란 그저 숫자일 뿐, 괜한 의미 부여하지 말자. 자책도 부담도 내려놓자. 아무것도 아니다.

올해는 그런 주문을 되뇔 필요가 없었다. 일상이 무너진 탓에 연말연시 준비된 여러 순간들이 정말 아무것도 아닌 게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매년 소소한 우울감에 시달렸는데 막상 자책할 기회조차 빼앗기고 보니 그게 얼마나 소중하고 사치스러운 감정이었는지 이제야 알겠다. 2024년 12월 이후 이어진 거대한 상실 앞에서 한국 사회는 일제히 얼어붙었다. 숨쉬기가 어렵다. 수사적인 표현이 아니라 문자 그대로 몸이 아프다. 오늘 나온 건강검진 결과표에는 아무 문제 없었건만 가슴에 얹힌 커다란 돌은 점점 무게를 더해간다. 이 무게를 온전히 감당하기 어려워 주위를 둘러본다. 누군가와 나눠야만 내가 살 것 같다.

그게 요즘 시간만 나면 뉴스를 틀어 놓고 사는 이유다. 아직 만나지 못했고, 미처 알지 못한 이들의 소식이 궁금하다. “잘 지내시나요?” 깊이를 짐작하기도 힘든 그들의 애통함이 멀리 나한테까지 당도해 슬픔으로 번질 때 비로소 공동체의 일부임을 실감한다. 혼자가 아니라는 안도감에 이어 파도처럼 차례로 밀려오는 감정들. 무너질 여유조차 없이 오늘을 버티는 간절함과 서로를 걱정하고 돕는 따뜻한 오지랖을 마주하며 미처 마음을 전하기도 전에 먼저 위로받고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새삼 돌이켜보니 일상이란 기적의 연속이다. 우리는 당연한 것들의 기적에 둘러싸인 채 오늘을 선물받았다. 잃어버리기 전엔 짐작하기 어려웠던 그 평범한 나날의 소중함을, 뉴스 너머 거대한 상실 곁에서 매일 깨닫는 중이다.

새해엔 모든 것이 다시 평범해지길 소망한다. 극장에 걸린 영화는 많은데 볼 게 없다며 투덜거리고, 이번주 원고가 망했다는 핑계로 울적해질 수 있길 기대한다. 그리하여 아무것도 아닌 듯 스쳐 지나갔던 일상의 모든 범사들이 한해의 끝자락에서 하나하나 의미롭게 되살아나길 꿈꾼다. 적어도 2025년에는 아무것도 아닌 건 없을 것 같다. 거대한 시련 앞에서 모든 순간이 의미롭고 소중해지는 중이다. 어쩌면 의미란 대상에 처음부터 깃들어 있는 게 아니라 그걸 향하는 의지의 다른 표현인지도 모르겠다. 필요한 건 단지 관심을 드러낼 만한 핑곗거리 정도다. 마침 2025년은 <씨네21>이 창간한 지 딱 30년이 되는 해다. 아무것도 아니라면 아무것도 아닌 그저 숫자. 동시에 지난 세월을 복기하기에 더할 나위 없을 핑곗거리. 이와이 슌지 감독의 <러브레터>가 개봉 30주년 만에 다시 도착했다는 소식을 듣고 같은 30주년을 핑계 삼아 기쁜 마음으로 표지를 마련했다. 2025년, 무엇이 최선(最善: 1. 가장 좋고 훌륭함)일까 고민하고 주저하기보단 무엇이 와도 최선으로 기억되도록 최선(最善: 2. 온 정성과 힘)을 다하려 한다. 아무것도 아닌 것에서 모든 것을 발견할 수 있는 너른 시야와 넉넉한 마음을 염원하며, 30주년의 문을 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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