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싸이더스 HQ 대표 정훈탁 [1]
2002-07-05
글 : 문석
사진 : 정진환
미다스의 손, 흥행을 빚다

만약 충무로를 전쟁터로 묘사한다면, 그것은 단순한 비유가 아니다. 영화 한편을 구상하고 기획해서 촬영에 들어가고 극장에 붙일 때까지 생산자들은 끝도 없이 나타나는 ‘적’들과 피비린내 물씬한 전투를 벌여야 한다. 오랜 시간과 공을 들여 시나리오의 날을 세우고 나면, 바로 제작비 조달과 캐스팅이라는 만만치 않은 적을 상대해야 한다. 온갖 요소와 맞서 싸우며 근근이 촬영을 마치고 나도 극장 확보와 홍보라는 대전을 치러야 한다. 이 전쟁을 치러나가는 데 있어 요즘 들어 가장 위력있는 ‘무기’로 각광받고 있는 것은 스타급 배우다. 수많은 한국영화가 자웅을 겨루는 이 백가쟁명의 환란기에서 믿을 만한 것은 아무래도 기본적인 관객 동원력을 확보한 스타의 존재일 수밖에 없을 것.

이름부터 총사령부를 지칭하듯, 매니지먼트 업체 싸이더스 HQ는 이 전장에서도 손꼽히는 명가다. 정우성, 전지현, 설경구, 전도연, 김혜수, 박신양, 김승우, 차태현, 장혁, 손창민, 신민아, 조인성, 최지우, 이은주, 한재석 등 영화계 스타뿐 아니라, god나 남희석 같은 한국 엔터테인먼트 산업의 대표 주자를 거느리고 있는 이곳은 충무로에서 가장 시선을 모으는 곳이기도 하다. 때문에 충무로의 ‘병사’들은 이 사령부의 총사령관인 정훈탁 대표의 손끝이 어디를 가리키는지 늘 지대한 관심을 쏟는다. 한국영화계에 ‘캐스팅 디렉터’라는 신종 직업을 소개했고, ‘배우 파워’를 실감하게 했으며, 올해 <씨네21>의 ‘파워50’에서 37위를 차지한 이 헤드쿼터의 사령관 정훈탁에 관해 살펴본다.

“뛰어난 기획력과 추진력을 가졌으며, 무엇보다 자기가 맡은 사람들은 끝까지 책임을 진다.”

“한국영화계의 가장 큰 문제인 캐스팅난을 심화시킨 장본인이며, 배우들을 무기로 삼아 자신의 영향력만을 키우려 한다.”

이 상반된 증언이 가리키는 화살표의 끝을 따라가보면 한 인물과 만나게 된다. 그의 이름은 정훈탁. 매니지먼트와 가요음반 제작을 담당하는 싸이더스 HQ의 수장이자 가장 잘 나가는 특급 배우들을 수두룩 보유한 충무로의 큰손인 그는 이렇게 대조적인 평가를 받고 있다. 어떤 이들에게 정훈탁은 최고의 VIP이지만, 또 다른 어떤 이들에게 그는 ‘공공의 적’이다. 사실 충무로 전체를 놓고 본다면, 그가 훌륭한 배우들을 길러내고 그들의 가치를 높이고 있다는 의견은 소수일 뿐이고 배우의 몸값을 끌어올리고, 제작에 간섭하는 등의 ‘횡포’를 부려 제작사들에 고통을 안겨주고 있다는 입장이 다수를 이루는 듯 보인다.

한국영화의 제작이 활황국면을 맞이하면서 그에 대한 불만과 성토의 목소리는 더욱 높아가고 있다. 기획 및 제작되는 작품 수에 비례해서 연기력과 스타성을 갖춘 배우도 함께 늘어나면 좋겠지만 현실이 정반대다보니, 뛰어난 배우들을 확보하고 있는 그에 대한 따가운 눈총도 많아지는 것. 정작 정훈탁은 충무로 곳곳에서 들려오는 불만의 목소리를 아는 척 모르는 척, 자신의 길을 갈 뿐이라는 듯 보인다. 게다가 운전기사, ‘가방모찌’, 사기꾼, 양아치, 폭력배의 이미지가 뒤섞여 있던 매니저를 ‘영화인’의 일원으로 자리잡게 했고, 매니지먼트 사업을 구멍가게에서 산업으로 세우기 위해 노력해온, 업계 경력 14년차 정훈탁이 아니던가.

매니지먼트계에서 정훈탁이란 이름은 일종의 돌연변이에 가깝다. 최근 그에 대한 불만을 털어놓는 사람들조차 이 부분은 인정한다. 연극영화과 출신으로 드물게 업계에 뛰어들었고, 이합집산과 합종연횡을 밥먹듯 하는 다른 매니지먼트 업체와 달리 소속 배우와 매니저가 거의 자리이동을 한 적이 없으며, 정우성, 김지호, 전지현, 장혁, god의 예에서 보듯, 생짜 초보를 데려다가 연이어 당대 최고의 스타로 키워냈으니 말이다.

이젠 누가 뭐라 해도 흔들리지 않는 철옹성을 쌓아올린 듯한데도, 그의 야심은 여전히 불타고 있다. <엽기적인 그녀> <달마야 놀자> <명랑소녀 성공기> <대망> <몽정기> 등의 작품에서 한국 최초의 캐스팅디렉터 역할을 했고, 제작사와 공동제작도 추진하고 있으며, 배우들에 맞는 시나리오를 찾아내기 위해 시놉시스 공모전을 개최할 예정이고, 전문배우들을 길러내기 위한 연기 아카데미도 준비중이다. 그럼에도 ‘아직도 배고프다’는 인상인 그는 싸이더스 HQ를 아시아의 일류 브랜드로 키우기 위한 쉼없는 발걸음을 떼고 있다. 그를 비판하든 옹호하든 이제 정훈탁은 충무로의 부인할 수 없고 외면할 수 없는 파워맨의 자리에 올라 있다.

호텔 주방장이 되고 싶었던 문제아

“사무실도 없이 삐삐 2대, ‘각그랜저’ 1대, 카폰과 휴대폰 하나씩만을 갖추고 동네 목욕탕이나 ‘자-뎅’ 같은 커피숍에서 회의를 하며” 1993년 EBM을 창립할 무렵만 해도 정훈탁이 이런 정도의 지위에 오르리라고는 그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다. 하긴, 동국대 연극영화과에 입학한 것이나 ‘가왕’(歌王) 조용필의 막내 매니저가 됐던 것 또한 그 스스로조차 예측하지 못했던 일이었으니 그리 놀랄 만한 일이 아닌지도 모른다. 그가 대학에 들어오기 전까지만 해도 부모님의 속을 까맣게 태우는 이른바 문제아였다는 사실까지 알게 되면, 그의 35년 동안의 삶은 럭비공으로 당구를 치는 격으로 엉뚱함의 연속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품게 된다.

86년 정훈탁이 동국대 연극영화과에 입학한 것은 스타에 대한 동경이나 연극, 영화에 대한 열정 때문은 아니었다. 오로지 “부모와 형들에게 남들과 똑같은 것을 느끼게 해주고 싶어서”였다. 고등학교 시절 허구한 날 싸움질과 나이트클럽행에 몰두하던 그였기에, 남들처럼 대학에 들어가서 가족을 기쁘게 해주자는 생각이었다. 주방장이 되고 싶다며 연세대 식품영양학과에 들어가고 싶었지만, 시험을 앞두고 ‘좀 놀았던’ 그는 학력고사에서 만족스런 성적을 올리지 못했고, “야, 넌 진짜 웃기고 재미있잖아”라는 친구들의 ‘권유’를 받아들여 연극영화과를 선택하게 된다. 다행히도 필기고사보다는 실기 성적의 비중이 높은 곳이라 합격할 수 있었던 것 같다고 그는 되돌아본다.

막상 들어왔건만, 대학은 정훈탁에겐 그리 신선한 곳이 아니었다. 그에게 동급생들의 정신연령은 그리 높아보이지 않았다. 부친 나이 50살에 태어난 정훈탁은 손위의 형 여덟명과 함께 자랐다. 말이 9형제 중 막내지, 시커먼 남자 9명이 만들어내는 세계에선 남들 같은 귀여움은 받지 못했다. 대신 성인 남성의 세계를 동년배들보다 훨씬 빨리 알게 됐을 뿐이었다. 그렇게 자연스럽게 남들보다 어른스러운 구석이 쌓였던 데다가 고등학교 때 워낙 ‘잘 나갔다’보니 대학생이 누리는 자유라는 것도 시시해 보였다. 때문에 그는 과에선 아웃사이더였고, 고등학교 친구들과 어울려 다니며 치기어린 방탕의 나날을 보냈다.

2학년 어느 날, 그는 고등학교 선배이기도 한 과 선배로부터 호출을 받는다. 선배는 다짜고짜 정훈탁을 무지막지하게 두들겨팼다. “너는 학교생활을 너무 안 한다, 과에서 이미 찍혔다”는 말과 함께. 피를 토할 정도로 맞으면서, 그는 학교생활도 한번 해보자는 마음을 먹었고, 연극 몇편을 통해 새로운 재미를 느꼈다. 동시에 무언가 둔탁한 게 그의 뒤통수를 갈겼다. “그동안 놀면서도 참 재미없었구나.” 그 와중에 한 교수가 “자네는 발음이 잘 안 되니 연기 대신 기획을 해보지”라는 권유를 했다. 마침 과 선배인 이창배씨가 충무로에 ‘창 기획’이라는 이벤트 업체를 차린 사실을 알게 된 그는 함께 일하고 싶다는 의사를 전한다. 대학 2학년생이었지만, 나이 든 형들로부터 늘 일과 관련된 이야기를 들었던 그이다보니 사회생활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 88년에는 올림픽과 관련된 이벤트를 진행하기도 했고, <열전! 달리는 일요일> 같은 TV 프로그램의 외주도 맡아 제작도 했다. 대학 4학년 시절, 배우를 매니지먼트하겠다는 포부를 갖고 ‘시나브로’라는 모델 에이전시를 차렸지만, ‘돈을 쓰기 위해 버는’ 스타일을 버리지 못해 쫄딱 망하고 만다. 그뒤 비디오나 공연 판권을 사와 국내에서 선보이는 일을 했던 강기철씨를 만나 일을 배웠고 신차발표회 등을 진행하며 차츰 일에 대한 자신감도 쌓아갔다.

조용필 친형 졸라 매니저 입문

졸업할 무렵이 되자 그는 왠지 가요 음반업을 하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그때 눈에 들어온 곳이 당대 최고의 가수 조용필의 ‘필기업’(현재 YPC)이었다. 해서 당시 사장이던 조용필의 친형 조영일씨에게 무턱대고 전화를 걸어 자신을 소개하고 받아들여 달라고 부탁을 했지만, 전화기 건너편에서는 황당하다는 반응이 들려왔다. “대학 나온 놈이 뭐하러 매니저를 하냐. 연극영화과를 나왔으면 배우하고 그래야지.” 당시만 해도 매니저는 스타 대신 가방을 들어주거나 운전이나 해주는 정도로 인식되고 있었던 탓에 이런 반응은 예측가능한 것이기도 했다. 그러나 정훈탁은 집요하게 물고늘어졌다. 이미 이벤트업을 하면서 너스레 떠는 데는 자신이 있었던 그는 조 사장에게 1주일에 두번씩 전화를 해서 안부도 묻고 실없는 소리도 했다. 3개월쯤 됐나, “너 똘아이 아니냐? 일루 와 봐”라는 반응이 왔다. 정훈탁의 첫인상을 좋게 봤는지 조영일씨는 그날로 조용필의 녹음실로 가보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는 회사에서 막내였지만, 착실하게 일을 해 조용필의 신임을 얻는 데 성공한다. 90년 일본에서 공연을 할 때, 조용필이 막내인 그를 수행비서로 찍어 데려갈 정도였다.

기업이 계속 성장하려면 신인을 키워야 한다는 생각을 품고 있던 정훈탁에게 어느 날 귀가 트이는 소문이 들려왔다. 92년 신씨네라는 영화사에서 일본으로부터 <백한번째 프로포즈>의 판권을 사 영화화한다는 것. 일본의 슈퍼그룹 차게 앤 아스카가 부른 주제곡 <세이 예스>가 공전의 히트를 친 사실을 알고 있던 그는 신씨네를 찾아가 O.S.T 음반기획을 의논한다.상당한 제작비를 들여 거의 완성 직전 무렵, 조용필은 “너무 상업적인 냄새가 난다”며 다른 업체에 넘기는 게 어떠냐고 제의했다. 하지만 밤잠 안 자고 음반에 매달렸던 정훈탁으로서는 조용필과의 이별을 감수하고서라도 자신이 공들인 ‘옥동자’의 출산을 맞이할 수밖에 없었다.

“망하면 돌아오겠다”는 말을 남기고 조용필 곁을 떠난 정훈탁은 93년 자신의 회사 EBM을 차린다. ‘Entertainment Business Man’의 약자지만, 한글로 ‘이미 버린 몸’의 약어라고 생각할 만큼 굳은 각오로 새 출발을 다짐했다. 결국 이 음반은 12만장이 팔려나가는 성공을 거뒀고, 이어 출시한 드라마 <폴리스>의 O.S.T도 10만장 가까운 판매고를 기록하며 히트했다.

내가 아는 정훈탁

정우성(배우)

첫 만남 때 평생 갈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감가는 얼굴이나 일을 대하는 진지함 같은 게 느껴졌다. 그때 소주를 마시면서 “만약 이쪽으로 성공하지 못하면 장사라도 같이 하자”고 마음을 모았던 기억도 난다. 그에게 가장 큰 고마움을 느낀 것은 내가 좀 알려지고 나서 쇼 프로그램과 드라마에서 섭외가 많이 왔을 때, 그가 욕을 엄청나게 들어가면서도 모두 거절했다는 얘기를 나중에 들었을 때였다. 당시만 해도 영화가 활발하지 않아 방송사에서의 입지가 중요할 때였는데도 말이다. 배우를 먼저 보호하려는 그는 최소한 우리에겐 좋은 매니저다.

박신양(배우)

그와 나는 동국대 연극영화과 동기다. 학교 밖으로만 돌았던 그를 비로소 알게 된 것은 2학년 때 연극을 함께하면서였다. 배우가 되기 위해 늘 극장에 틀어박혀 지내던 나는 사생결단의 자세로 임했지만, 그는 마치 소풍 오락시간처럼 풀어져 있는 모습이었다. 인상이 나빴냐구? 오히려 반대였다. 대학을 졸업한 뒤 우리가 다시 만난 것은 98년쯤 방송사 로비에서였는데, 그는 매니저가 돼 있었다. ‘한번 하면 평생 간다’는 생각을 가진 나로서는 매니저를 구하기 어려워서 2년 가까이 혼자 지냈는데, 일을 대하는 태도가 마음에 들어 일을 맡기게 됐다. 내가 연기를 계속 하는 한, 매니저는 바뀌지 않을 것 같다.

장혁(배우)

부모님 다음으로 좋아하는 사람이다. 사람이라는 게 무슨 일을 하더라도 어떤 정도껏 하게 마련인데, 그와 함께하면 그 ‘정도’라는 게 없다. 일이라는 생각보다는 흥미있게 할 수 있도록 배려를 해주다보니 그럴 수밖에 없다. 게다가 회사 안에서 넘버원이라는 사람이 가장 재밌게 일하고, 열심히 하다보니 그의 말은 훨씬 잘 듣게 되는 것 같다. 무명 시절, 술 먹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사자는 쥐 한 마리를 잡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한다”는 얘기를 해주더라. 그때 그 말이 마음에 와닿았던 것은 아마도 그 스스로가 그렇게 노력하는 모습을 봐왔기 때문이었으리라.

김성수(영화감독)

<런어웨이> 캐스팅할 때 처음 만났는데 자기 배우가 나설 작품이 아니라며 아무 말도 않았다. 정우성을 기용해 <비트>를 만들 때도 초반에는 말 안 했는데, 중반 이후부터 대화하기 시작했다. 의외로 영화에 대한 식견도 높고, 주변 눈치보지 않고 자기 생각을 냉철하게 말하더라. 그뒤 친하게 지내며 본 그는 결단력과 판단력이 무서운 인물이다. 작품을 고르거나 할 때는 심사숙고하지만, 일단 결단을 내리면 확 밀어붙인다. 배우를 키우는 것도 마찬가지다. 오랜 시간을 두고 숙성을 시킨다. 축구로 얘기하면, 그는 찬스가 날 때까지 공을 돌리다가 허점이 날 때 공을 찔러주는 홍명보 같은 존재이고, 기량이 나올 때까지 선수를 벤치에 앉혀놓는 감독 같은 사람이다.

전영민(영화제작사·매니지먼트업체 마니 대표)

내가 군대에 갔다가 뒤늦게 입학해 나이는 많았지만 우리는 동국대 연영과 동기다. 내가 아는 인간 정훈탁은 인간 냄새 나는 사람이다. 선배인 김승철씨를 대학로에서 불러내 <킬리만자로>에 캐스팅시킨 것은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나는 졸업 뒤 연기를 잠시 하다가 송강호의 매니저로 돌아섰는데, 일을 시작하던 무렵 그에게서 조언을 구하고자 만난 적이 있다. 그가 말하는 첫째 원칙은 배우들과 계약서를 쓰지 말라는 것이었다. 그는 배우가 회사를 나갈 수 없게끔 하는 것은 계약서가 아니라 매니저의 능력이라는 말을 해줬다. 잘 나가는 연기자라도 매니저의 능력이 있다면 나가라고 해도 안 나가며, 반대로 능력이 없으면 계약서가 아무리 철저해도 위약금을 물고 나간다는 얘기였다. 그래서 나도 그의 조언대로 계약서 없이 운영하고 있다. 장혁이나 전지현이나 무명 시절부터 죽 데려오며 키우는 능력은 정말 부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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