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향은 주관적이고 상대적이다, 라고 사람들은 말한다.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고 나는 말한다. 그러나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보면 그렇지 않은 것 같다. 취향은 지극히 변덕스러운 것임에도 불구하고 내 안에서 절대시되고 객관화의 탈을 뒤집어쓴다. 예를 들어 몇년 전 내 ‘취향’이 아닌 CD를 선물받고는 그 다음날 혼자 음반가게에 돌아가서 유투(U2)의 음반으로 바꾸며 상대방의 취향를 무시했지만 요즘 나는 유투를 좋아(한다고 말)하는 사람이 느끼하다고 생각된다. 것도 ‘유투를 좋아한다고? 나는 아닌데’가 아니라 ‘쟤는 유투를 좋아하니까 느끼한데다 잘난 척하는 인간일 거야’라고 은근슬쩍 상대방의 인격까지 저평가하게 되는 것이다.
좋아하는 노래나 영화가 다르다고 언성이 높아지는 일은 거의 없기 때문에(하긴 있기도 하다. 몇달 전 우리 팀에서는 밥자리에서 <봄날은 간다>의 주인공이 유지태냐 이영애냐를 가지고 얼간이 같은 논쟁이 벌어져 무지하게 썰렁하게 자리에서 일어난 적도 있다) 취향은 상대적이라고 이야기만 할 뿐 취향은 가치관이나 신념보다 더 일방적이고 폭력적일 수도 있다. 그 대표적인 피해자군이 <타인의 취향>에서 카스텔라 같은 인물들이다. ‘돈만 밝히는데다 배나오고 머리벗겨진 아저씨가 취향은 얼어죽을 무슨 취향…’, 자신이 아직 젊다거나 문화적으로 세련됐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상당수는 공모자가 되어 수많은 카스텔라들을 왕따시킨다.
카스텔라가 클라라의 친구 전시회에서 추상화를 사와 집안에 걸 때까지의 과정은 한편의 코미디다. 클라라와 친구들, 회사 부하들, 부인까지 그를 멍청하다거나 불쌍하다거나 심지어 미쳤다고 생각한다. 물론 카스텔라가 예술에 눈을 뜬 것은 클라라라는 여배우에 대한 연모에서 출발했지만 그게 무슨 상관이람. 그도 라신을 논할 수 있고, 난해한 추상화를 집안에 걸 권리가 있는 하나의 인격체이지 않은가. 말은 이렇게 해도 아마 내가 음반가게 점원으로 그를 만났으면 어땠을까. 대범하지 않은 성격이므로 <사랑도 리콜이 되나요!>의 잭 블랙처럼 당장 가게에서 내쫓지는 못했겠지만 속으로는 ‘고속도로변에서 메들리 테이프나 사서 들으시죠’라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그렇지만 돈이 없는데다 머리도 벗겨지지 않았다고 해서 내가 카스텔라 같은 대접을 받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착각이다. 만약 내가 10대들이 모이는 놀이공간에서 어울려 논다면 그네들 중 상당수는 “저 할망구는 뭐냐? 꺼지라고 해”라며 짜증낼 것이다. 비단 세대만의 구별짓기가 아니라도 나의 취향을 혐오하는 사람을 일렬로 세운다면 태종대 절벽 끝도 모자라 아마 수천명은 남해안 바닷가에 빠져야 할 것이다. 취향의 게임이 흥미로운 것은 이 때문이다. 서로가 서로의 점수를 팍팍 깎지만 결코 위너가 나올 수 없는 경쟁. 문화귀족이라고 표현할 만한 클라라 일행은 카스텔라의 몰취미를 비웃지만 그들 역시 삐져나오는 지적 속물주의를 숨기지 못하고 관객의 구역질을 받아야 하는 것처럼 말이다.
같은 언어를 쓰지만 서로 다른 나라 사람 같은 클라라와 카스텔라의 벽은 조금씩 허물어진다. 감독은 이 영화가 사람들간의 배타주의를 몰아내는 데 도움이 됐으면 한다고 이야기했다. 난 잘 모르겠다. 이 영화를 보고 나오는 순간에도 영화에 대한 서로 다른 평가를 하다가 친구와 나는 만날 차가 막히는 길에서 “어, 차가 많이 막히네” 화들짝 놀라는 척하며 화제를 돌려야 했다. 그러나 뭐, 잠시 내가 친구의 취향을 비난했기로서니 별로 죄책감을 느끼고 싶지는 않다. 타인의 취향을 이해한다는 건 지루한 상대방의 이야기를 인내심 있게 들어주는 것, 그럴듯하게 속아주는 척하는 것에 다름 아닐 테니 말이다. 김은형/ <한겨레21>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