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 파치노가 여러 영화에서 거듭 확인시킨 것도 이런 도덕적 갈등과 시련이다. 그리고 그 시작은 <대부>의 마이클 콜레오네다. 아직 범죄세계를 모르는 앳된 청년 마이클, 그는 가족을 버리는 편이 옳았다. 아버지가 부상을 입고 형이 죽었더라도 눈 딱 감고 뉴욕을 떠나야 했다. 하지만 마이클은 그러지 못했다. 가족에 대한 애착 때문? 꼭 그런 것은 아니다. 부상당한 아버지의 병실을 찾는 장면에서 마이클은 세상을 알아버린다. 아버지에게 총을 쏜 자들과 경찰이 같은 편이라는 사실이 그를 범죄의 땅에 머물게 만든다. 그는 권력뿐 아니라 정의도 총구에서 나온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마이클이 화장실 물통에 들어 있는 권총을 꺼내들고 나오면서 마피아의 길에 발을 디딘 것처럼 당시 32살이었던 알 파치노의 미래도 그때 정해졌는지 모른다.
<대부>의 마이클 콜레오네로 시작해 <스카페이스>의 토니 몬타나, <칼리토>의 칼리토 브리간테, <도니 브래스코>의 레프티로 이어지는 알 파치노의 갱스터 이미지는 회한과 연민을 불러일으킨다. 선택의 기로에서 그는 항상 불운한 쪽을 택한다. <스카페이스>의 토니 몬타나는 콜롬비아 조직의 요구를 거절한 탓에 온몸이 벌집이 된 채 죽어갔고 <칼리토>에선 변호사 친구의 부탁을 뿌리치지 못해 낙원으로 가는 기차에 올라타기 직전, 심장에 구멍이 난다. <도니 브래스코>의 레프티 역시 3만달러를 들고 이곳을 떠나라는 도니의 제안을 거절하는 바람에 비참한 최후를 피할 기회를 놓친다. 그렇게 알 파치노는 살길이, 희망이 보이는 순간에도 기어이 악운에 몸을 맡기는 비극적 영웅으로 스크린에 자신의 피를 떨어뜨렸다. 그리고 이런 과거가 겹쳐질 때 <인썸니아>의 알 파치노는 비록 형사지만 갱스터와 다르지 않은 비극의 주인공이 된다. 영화에서 진정 가슴을 뭉클하게 만드는 것은 윌 도머가 자신의 죄를 고백하는 순간이다. 6일째 한숨도 자지 못해 퀭한 눈의 이 사내는 용서를 구하거나 동정을 호소하지 않는다. 그는 정말 말을 하고 싶다. 아무에게도 하지 않은 비밀을 토로하는 말, 그것은 <대부>의 마지막 장면을 연상시킨다. 피의 복수극이 끝나고 아내 케이(다이앤 키튼)가 묻는다. “당신이 죽였나요?” 굳게 입을 다문 채 잠시 생각에 잠겼던 마이클이 답한다. “아니.” 마이클의 거짓말과 더불어 피로 얼룩진 가족사는 감춰진다. 하지만 마이클의 가슴에 응어리진 가책은 어찌될 것인가? <인썸니아>에서 알 파치노의 고백은 마이클이 덜고 싶던 마음의 짐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아마 조각가 로댕이 살아 있었다면 알 파치노를 <칼레의 시민들>과 <지옥의 문>의 모델로 썼을 것이다. 조각칼로 깎은 듯 광대뼈가 뚜렷한 알 파치노의 얼굴은 비극을 형상화한 로댕의 조각품과 놀랄 만큼 흡사하다. 로댕이 알 파치노를 알았다면 비극을 꼭 군상으로 표현할 필요가 없었으리라. 세월이 내려앉으면서 알 파치노의 얼굴은 전보다 그림자가 짙어졌다. 뚜렷한 음영이 지난날에 대한 후회와 현재의 번민을 좀더 깊고 또렷하게 만든다. 갱스터와 형사영화라는 거칠고 남성적인 장르에서 시간의 흔적을 쌓은 알 파치노의 얼굴에는 비극의 기운과 더불어 전문가적 자존심과 자기확신이 들어 있다. 마이클 만의 영화 <히트>와 <인사이더>에서 알 파치노가 보여주는 단호한 태도는 도시의 거친 남자들이 도덕적 불안과 정서적 혼란을 극복하는 방법을 일러준다. <히트>의 수사반장 한나는 집요하게 일에 매달리는 남자다. 사건수사에 열을 올릴수록 가정은 부서지지만 거꾸로 가정이 무너지고 있기에 그는 더욱더 강박적으로 수사에 모든 것을 바친다. <히트>는 로버트 드 니로의 죽음으로 마지막을 장식하지만 알 파치노의 승리가 축복받을 만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수사반장 한나처럼 앞만 보고 달리는 사내라면 적이 보이지 않는 시대를 잘 살아갈 것 같지는 않다. <인사이더>의 알 파치노가 안정적인 가정을 가진 남자인 것은 아마도 방송사 프로듀서라는 직업 덕분일 것이다. 그렇지만 안전한 체제에 편입돼 있으면서도 분노와 흥분을 감추지 않는 그의 행동방식은 갱스터나 형사를 닮았다. 위기의 시대를 공격성과 단호함으로 돌파하는 남자로서 알 파치노의 이미지는 시간의 풍화작용을 너끈히 견뎌내고 있다.
이같은 알 파치노의 이미지를 살려 <애니 기븐 선데이>를 찍은 감독 올리버 스톤은 이렇게 말한다. “니체를 인용한다면, 알 파치노는 ‘에너지의 괴물’이다. 한 인간으로서의 부드러움, 스크린에 활력을 넣다 뺐다 할 수 있는 엄청난 고통이 그를 유례없는 세련되고 열정적인 연기자로 만든다.” 언제 폭발할지 모를 부글거리는 마그마가 그의 몸 속 어딘가에 있음을 그의 영화를 본 사람은 누구나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데블스 애드버킷>의 악마 존 밀턴을 보라. 말끔한 양복을 입은 노신사에 불과한데도 이 영화에 나오는 알 파치노를 보노라면 팔에 소름이 돋는다. 심장박동을 측정하듯 연기의 파동을 재는 기계가 있다면 알 파치노가 품어내는 연기의 에너지를 인간의 한계치로 규정지어도 좋을 것이다. 물론 알 파치노가 격정적인 연기만 잘하는 배우라면 지금의 위치에 오르지 못했을 것이다. 알 파치노는 한번 터져나오면 감당할 수 없는 용암을 가슴에 숨긴 채 눈빛만으로 그걸 드러낼 줄 아는 배우다. <대부>의 마이클이 화장실에서 권총을 들고 나와 태연한 표정으로 살인을 저지르는 장면은 캐스팅 당시 알 파치노 기용에 극력반대했던 스튜디오 관계자들을 하얗게 질리게 만들었다. “키가 작고 첫눈에 띄는 미남도 아닌데다 지저분해서 하버드를 나온 청년 마이클로 보이지 않는다”고 말했던 그들은 이 사내가 말론 브랜도의 뒤를 잇는 거인이 될 것이라고 믿은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의 혜안에 고개를 끄덕이지 않을 수 없었다. 알 파치노가 퇴락하는 늙은 마피아 레프티로 출연한 <도니 브래스코>는 극에서 극을 오가는 그의 연기폭을 느낄 수 있는 영화다. 양피가죽코트만 입으면 한눈에 조직의 보스나 노련한 형사로 느껴지는 알 파치노가 이 영화에선 목 주변에 털이 달린 체크무늬 모직코트를 입고 축 처진 어깨를 드러낸다. 의상 한벌의 차이로 정반대의 인간을 형상화할 수 있는 능력, 그것이 알 파치노가 일정한 연기틀을 벗어나지 않는데도 찬탄을 자아내는 이유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