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은을 만나는 날, 불청객의 습격을 당했다. 김정은의 열렬한 팬을 자처하는 여중생이었는데, 김정은을 인터뷰하고 싶다고 했다. 인터뷰와 사진촬영이 당하는 이의 진을 빼는 일임을 아는 까닭에, 본게임 앞으로 끼어든 오픈게임만큼은 막아내고 싶었다. 그런데… 기자보다 먼저, 매니저보다 먼저, 김정은이 입을 열었다. “그래, 얼마든지. 이리로 들어올래?” 그리고는 머리와 화장을 매만지는 분장실로, 문전박대 내지는 정중한 거절을 각오했을, 그래서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어린 팬의 손을 잡아끌었다. 곧 반쯤 문이 열린 분장실 밖으로 김정은의 빠른 말들과 잔웃음들이 새어나왔다. 무슨 얘기를 그리도 재미나게 하는지, 궁금증이 발동해 분장실 앞을 서성댈 참이었는데, 누군가 “기자 체면이 있지, 엿듣긴 좀 그렇죠” 하는 바람에 자리에 눌러앉고 말았다.
사진촬영과 병행하느라, 분장실 담소는 끊어졌다 이어지길 반복하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기념촬영도 하고 살갑게 작별인사를 건넨 뒤, 김정은이 다가와 마주 놓인 소파에 앉았다. “그동안 제 말에 얼마나 군더더기가 많았는지, 좀전에 알았어요. 쉽게 풀어서 말하는 게 참 힘드네요.” 말은 그랬지만, 김정은은 인터뷰의 달인 같았다. 그걸 본인도 인정했다. 연예 프로를 진행하면서 과묵한 게스트의 밉살스러움을 겪어보니, 인터뷰당하는 입장으로 돌아가면 몇 시간을 혼자 떠들 만큼 수다스러워지더라는 것이다. 초승달 모양의 귀여운 두 눈이 ‘자, 무엇이든 물어보세요’ 하며 웃고 있었다.
직업병이겠지만, 언제부턴가 보이는 걸 그대로 믿지 않는 습성이 생겼다. 김정은이 이동통신 광고에서 “묻지마, 다쳐”라고 윽박지를 때, 카드 광고에서 “여러부운, 부자 되세요” 하고 덕담을 건넬 때, <재밌는 영화>에서 “야, 대가리 박어” 하고 호방하게 소리칠 때, 재밌어 하는 한편으로, 그 모습들이 자연인 김정은의 반영일 리 없다고 생각했다. 설령 그렇더라도, 화사한 에너지를 브라운관과 스크린에 너무 자주 방사한 나머지, 피로와 우울 속으로 침잠해 있거나, 샐쭉하게 방어막을 두르고 있을 거라고, 그렇게 생각했다. 이 인터뷰에서 기자가 스스로에게 부여한 미션은 그 ‘간극’을 엿보는 일이었다.
그런데 초장부터 기자는 김정은에게 말렸다. 김정은은 본능적으로 사랑받는 법을 알고 있는 사람 같았다. 이야기할 땐 상대의 눈을 뚫어져라 바라봤고, 듣는 동안에도 “그렇죠”, “맞아요” 하는 식의 추임새를 끊임없이 넣어주며, 자주 웃고 크게 반응했다. 지금 이 순간, 세상에서 제일 중요한 건 ‘우리의 대화’라는 듯이. <재밌는 영화>의 촬영-조명팀이 그대로 옮아온 <가문의 영광>의 첫 촬영날, 스탭들이 ‘우리 정은씨 예쁘게 나와야 한다’면서 조명에 몇 시간씩 공을 들였다는 일화는 과장된 게 아니었다. “저는 웃을 줄 아는 사람이 코미디도 잘한다고 생각해요. 저 웃기기 되게 쉽거든요. 웬만하면 웃으니까.” 그 말을 하고 나서, 김정은이 또 웃었다.
좀 허탈해졌다. 김정은의 무기는 타고난 성격? 그렇게 모든 게 쉽기만 했을까? “처음부터 이러진 않았어요. 내 안에 없는 걸 끄집어낼 순 없겠지만, 여러 단계를 거쳐오면서, 더 긍정적으로 변한 것 같아요. 남들이 저한테서 보고 싶어하는 모습이 어둠이 아니라 밝음이라는 건 다행이죠.” 김정은이 언급한 그 ‘여러 단계’ 중 일부는 알려지지 않은 것들이다. 대학교 때 학교 패션쇼에 모델로 발탁되고, 방청객으로 갔던 TV녹화장에서 무대까지 불려 올려가는 ‘엄청난 일’을 겪은 뒤에, 그 충격으로 탤런트 공채에 응했고, 6천 대 1의 경쟁률을 뚫고 합격했다고 했다. “거기까지가 우연이에요. 다음부턴 아니죠.” <해바라기>의 삭발연기로 주목받은 뒤에 일 욕심이 치솟아 겹치기 출연도 마다하지 않았다는 것. ‘이런 것도 할 수 있다’는 걸, 알아주길 바라면서. “독하게 했죠. 다 득이 되진 않았지만. 급하게 공부할 때 ‘서머리’가 유용하잖아요. 그 시간들은 저한테 그런 의미예요.”
뿌린 대로 거뒀다는 얘기군, 만감이 교차하는 얼굴을 들여다보며 생각했다. 그런데 이 아가씨, 독심술이라도 배운 것인지, 자신이 과한 사랑을 받고 있다며, 퇴로를 열었다. “시대를 잘 만난 거죠. 새롭고 특이하고 엽기적인 걸 좋아하는 세상이잖아요. 그러니까 저 같은 사람도 배우를 하는 거죠. 인기요? 만만해 보여서 그런 거 아닐까요? 두루두루 은근하게 사랑받는 게 특정 소수의 광적인 사랑을 받는 것보다 좋은 이유가 있어요. 가늘고 길게 갈 수 있다는 거.” 곁에 있던 사람들이 큰소리로 웃음을 터뜨리는데, 이에 아랑곳없이 김정은이 갑자기 진지 모드로 돌입했다. 직장인도 경력이 쌓이면 승진하는데, 왜 연예인만 위치가 달라지면, 변했다고 탓하느냐면서. “날 무너뜨리는 건 쉬워요. 몰아세우거나 자존심 상하게 하면 무너지죠. 그래서 더 빈틈을 안 보이려고 바둥대는 거 같아요.” 김정은의 얼굴에서 아주 잠깐 그늘을 느낀 순간이었다.
비장의 카드까지는 아니지만, 꼭 짚고 넘어가야 할 질문이 하나 남았다. 왜 또 코미디인가. 김정은이 ‘왜 그러면 안 되냐’는 표정으로, <재밌는 영화>와 <가문의 영광>은 엄연히 다른 코미디라고 받아쳤다. “미친 듯이 웃기는 영화를 찾다가 <재밌는 영화>를 했구요, 거기선 오버할 필요가 있었어요. <가문의 영광>은 드라마틱하면서도 예쁘고 귀여운 코미디인데다, 제 포지션은 웃겨야 한다는 부담이 적었어요. 슬프고 심각한데, 그게 더 웃기는 그런 연기요.” 이어지는 속사포 같은 대답. “벗어나고 싶지도 않고, 변신에 대한 목마름도 없어요. 갑자기 손바닥 뒤집듯 돌아서야 할 필요가 뭐 있겠어요. 서서히 조금씩 달라져야죠. 코미디 안에서 더 보여줄 게 있구요, 개발하고 싶은 것도 많아요. 관객이 따라와줄 거라는 믿음도 있구요.”
까짓 체면 좀 구기고 말 것을. 그날, 분장실을 기웃거리지 못한 것이, 내내 아쉬웠다. 김정은을 독대한 시간이 짧았던 것도 아닌데, 미션 해결은커녕 무장해제까지 당했으니 말이다. 하긴, 김정은 말마따다 “새털같이 많은 날이 있고, 보여줄 게 아직 많다”는데, 무슨 걱정인가. 그래서 김정은을 그냥 지켜보기로 했다. 앞으로 주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