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다]
Gilda 1946년, 흑백, 110분
감독 찰스 비더 출연 리타 헤이워스, 글렌 포드, 조지 매크레디
때문이었다니, 가당키나 한 일일까? 영화 속에서 길다(리타 헤이워스)가 부르는 노래는 한 여자가 얼마나 큰일을 낼 수 있는가를 과장을 섞어
아주 유쾌하게 들려준다. 그런데 노래 속의 그 주인공이 길다/헤이워스 자신이라는 것은 영화를 보게 되면 누구나 간파하게 될 것이다. <길다>는
바로 그녀, 즉 너무나 매혹적이고 그래서 자신도 모르게 위험을 불러오는 한 여자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이야기이다.
길다의 주위에는 두 남자가 있다. 하나는 카지노를 운영하고 있는, 길다의 현재 남편인 먼슨이고, 또다른 한 사람은 지금은 먼슨 밑에서 일하고
있고, 또 과거엔 길다의 연인이었던 자니이다. 이 묘한 삼각관계로부터 <길다>는 남성들 사이만의 은밀한 공모와 질투, 그리고 암투를 끌어낸다.
하지만 그런 이야깃거리들은 길다/헤이워스의 숨막힐 듯한 (성적)매력으로 인해 거의 주변적인 것으로 밀려나버린다고 말해도 좋을 정도이다. 특히
그녀가 긴 검은 장갑을 서서히 벗으면서 노래하는 고혹적인 장면은 길다/헤이워스를 팜므파탈의 원형적 이미지를 가진 인물로 만들어놓았다. 이후로
많은 사람들의 머릿속에 헤이워스는 사랑스럽고 까탈스런 악녀 길다와 동일인으로 남게 된다. 실제로 헤이워스는 이렇게 불평을 털어놓았다고 한다.
“내가 안 모든 남자들은 길다와 사랑에 빠졌고 나(헤이워스)와 함께 잠에서 깨어났다.”
[추적]
Pursued 1947년, 흑백, 101분
감독 라울 월시 출연 로버트 미첨, 테레사 라이트
필름 누아르’ 스타일이 40년대에서 50년대에 이르는 시기에 보여준 ‘감염력’이란 대단한 것이어서, 여타의 장르들도 그것들의
누아르 버전을 갖고 있을 정도였다. 이를테면, 스크루볼 코미디나 문제영화(problem picture), 또 뮤지컬 등의 장르들이 모두 당시
그 앞에 ‘누아르’라는 형용사를 붙일 만한 영화들을 보유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경향은 흔히 가장 미국적인 장르라 일컬어지는 웨스턴의 경우라고
예외는 아니었다. 그것에서도 ‘불안의 세계’에서 떨고 있는 주인공들이 종종 등장하는, 이른바 ‘누아르 웨스턴’이라 불릴 수 있는 영화들이 나왔는데,
라울 월시의 <추적>은 니콜라스 레이의 <자니 기타>(1954), 앤서니 만의 <파 컨트리>(1954) 등과 함께 그 범주로 묶일 수 있는
영화들 가운데 하나다.
<추적>의 주인공인 제프는 현재에 들러붙은 과거의 기억으로 인해 번민하는 인물이다. 어릴 적 가족이 몰살당하고 혼자 살아남아 ‘뿌리 없이’
성장해온 그는 지금까지도 자신을 괴롭히는 결손된 기억의 정체를 파헤쳐 보려고 한다. 월시 감독은 전형적인 웨스턴의 공간에다가 억압된 기억의
모티브와 편집증적인 분위기를 불어넣음으로써, 이 영화를 색다른 심리적 웨스턴, 혹은 독특한 누아르영화로 만들어냈다. 로 키(low key)
스타일을 잘 활용하기로 이름난 중국 출신 촬영감독 제임스 웡 호의 출중한 비주얼 감각으로도 오래 기억에 남는 작품이다.
[레일로디드]
Railroaded! 1947년, 흑백, 72분
감독 앤서니 만 출연 존 아일랜드, 제인 랜돌프, 휴 버몬트
무엇보다도 50년대 ‘심리적 웨스턴’의 대가로 먼저 기억된다. 하지만 그는 40년대 말에 만든 일련의 범죄영화에서도 이미 자신의 웨스턴 대표작들에서
드러나는, 폭력 묘사와 시각적 표현에 대한 남다른 감각을 과시한 영화감독이기도 했다. <레일로디드>는 <데스퍼레이트>(1947), <`T-멘`>
(1947), <로 딜>(1948) 등과 함께 앤서니 만이 완숙함을 보여주기 전에 만든 폐쇄적인 범죄영화의 대표작으로 꼽을 만한 작품이다.
미용실이 도둑맞는 사건이 벌어지면서 경찰관 한명이 살해된다. 경찰은 이 사건의 범인으로 스티브를 잡아들인다. 하지만 스티브가 결코 범행을 저지르지
않았다고 믿는 그의 누이 로자는 미키 형사에게 수사를 다시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제 의심의 표적은 듀크라는 남자에게로 넘어간다. 하지만
듀크는 자신의 범행을 목격했음직한 사람들을 하나씩 미키보다 한발 앞서 제거해나간다. 예상과 달리 무고하게 죄를 뒤집어쓴 사람보다는 에로틱한
의식을 치르듯 살인을 하는 자를 따라가던 영화는 미키와 듀크가 벌이는 최후의 총격전으로 끝을 맺는다. 짙은 어둠 속에서 벌어지는 이 마지막
대결은 앤서니 만이 박진감 넘치는 액션 연출에 얼마나 능한가를 잘 보여준다.
[악의 힘]
Force of Evil 1948년, 흑백, 78분
감독 에이브러햄 폴론스키 출연 존 가필드, 비어트리스 피어슨, 토머스 고메즈
그런 전제에서 출발한다. 변호사인 조는 불법 도박장을 소유하고 있는 갱스터 벤을 위해 일한다. 어느 날 그는 벤이 마을의 소규모 도박장을 모두
없애버리려 한다는 계획을 듣게 된다. 조는 불안한 마음이 든다. 자신의 형 리오 역시 작은 도박장을 운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조는 리오를 찾아가
위험이 닥칠 것을 알려주지만 리오는 동생의 말을 무시한다. 결국 리오는 갱들로부터 치명적인 보복을 당하고 만다. 도박장을 무대로 펼쳐지는 비열한
이야기를 거쳐 자본주의의 비인간적인 메커니즘을 보여주려는 영화 <악의 힘>은 정치적인 범죄영화라고 부를 만한 작품이다. 에드워드 버스콤브 같은
비평가는 이 영화를 두고 “1940년대의 모든 범죄영화들 가운데 명백히 가장 정치적인 영화”라고 말하기도 했다. 매카시즘이 날뛰던 당시 미국의
사회적 분위기를 고려할 때, 그처럼 정치적인 색채가 섞인 영화를 만든다는 것이 그 자체로 ‘범죄행위’로 간주되었을 것이라는 점은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일이다. 실제로 이 영화가 발표된 직후 폴론스키 감독과 주연배우 존 가필드, 그리고 또다른 배우인 로이 로버츠는 모두 블랙리스트에
오르고 말았다. 폴론스키는 이로부터 무려 21년이 지난 뒤에야 차기작 <윌리 보이가 여기 있다고 말해라>(1969)를 연출할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네이키드 시티]
The Naked City 1948년, 흑백, 96분
감독 줄스 다신 출연 배리 피츠제럴드, 돈 테일러, 하워드 더프
마크 헬린저의)은 <네이키드 시티>가 어떤 식의 영화가 될 것인지를 미리 알려준다. 그것은 ‘네이키드 시티’라 불리는 도시 뉴욕의, 치장하지
않은 맨얼굴을 보여줄 것이다. 그렇게 해서 현실감을 획득한 영화 <네이키드 시티>에는 종종 ‘다큐 누아르’라는 생경한 레벨이 붙기도 한다.
물론 <네이키드 시티>가 꽤 리얼한 누아르영화처럼 보이는 것은 단지 이것이 현장에 발을 붙이고 있기 때문만은 아니다. 영화는 ‘뉴욕이 가지고
있는 800만개의 이야기들’ 가운데 하나만을 보여준다. 이 영화가 선택한 것은 미모의 젊은 여성이 살해된 사건이다. 노련하고 경험 많은 형사
멀둔과 미숙한 젊은 형사 지미가 이 사건을 맡는다. 이제 영화는 어떤 드라마틱한 ‘사건’을 만들어내기보다는 이들이 사건을 조금씩 해결해가는
‘과정’을 그저 바라보는 듯한 태도를 취한다. 그럼으로써 줄스 다신 감독은 노동으로 사건을 해결하는 보통 사람의 노고를 격려하기도 한다. <브루트
포스>(Brute Force)와 함께 다신 감독의 최고작으로 꼽히는 이 영화는 아카데미 촬영상과 편집상을 수상했다.
[D.O.A.]
1950년, 흑백, 83분
감독 루돌프 마테 출연 에드먼드 오브라이언, 파멜라 브리튼
빌리 와일더 감독의 <선셋대로>(1950)가 이미 죽은 한 남자의 회상, 즉 플래시백으로 구성되었다는 점에서 독특한 영화라면, <`d.o.a.`>는
죽어가는 한 남자에 의한 플래시백으로 구축되었다는 점에서 아주 이채로운 영화다. 게다가 <`d.o.a.`>의 플래시백은 거기에서 한발 더 나아가
죽어가는 남자, 즉 피살자가 자신을 그렇게 만든 살인자를 직접 찾아 나선다는 아이러니한 이야기를 들려주기까지 한다.
시골 마을에서 회계사로 일하는 프랭크는 샌프란시스코로 출장을 떠난다. 외지에서 편한 마음으로 파티를 즐기는 프랭크. 하지만 그는 다음날 의사로부터
자신이 독약을 먹어 앞으로 일주일 정도밖에 살지 못할 것이라는 충격적인 이야기를 듣는다. 분노와 경악이 교차하는 가운데 프랭크는 자신에게 독약을
먹인 범인을 직접 찾아내기로 마음을 먹는다. <`d.o.a.`>는 어쩌다 어긋난 시공간에 놓이게 된 한 평범한 사람의 이야기를 치밀한 구성으로
풀어나간다. 도시의 실제 거리에서 촬영함으로써 얻어진 현장감은 그처럼 경악할 만한 사건에 일종의 리얼리티마저 얹어준다. 칼 드레이어의 <잔다르크의
수난>(1928)과 <뱀파이어>(1932), 그리고 필름 누아르의 대표작 <길다> 등에서 촬영을 맡았던, 폴란드 출신의 루돌프 마테가 연출한
영화.
[푸쉬오버]
Pushover 1954년, 흑백, 88분
감독 리처드 콰인 출연 프레드 맥머레이, 킴 노박
향기는 남자들을 취하게 하고 또 그들을 파멸로 이끈다. 일종의 전형이 되어버린 그런 세계는 다른 많은 누아르영화에서처럼 <푸쉬오버>에서도 숙명적으로
반복된다.
형사인 폴은 갱 두목 휠러의 정부인 리오나와 가까운 사이가 된다. 폴이 형사인 걸 알고 있으면서도 그를 사랑한다고 말하는 리오나. 그녀는 폴에게
휠러를 죽이고 돈을 빼앗은 뒤 함께 도망가자고 말한다. 폴은 리오나의 이처럼 담대한 제안을 처음엔 거절하지만 자신이 그녀에게 집착하고 있음을
깨달은 뒤 그녀의 제안에 동의하고 만다. 휠러는 폴의 손에 의해 살해당하는데, 그만 그 장면을 폴의 동료가 목격하게 된다.
<푸쉬오버>에서 폴 역을 맡은 이는 프레드 맥머레이, 빌리 와일더의 걸작 필름 누아르 <이중 배상>(1944)에서 주인공 월터 네프 역을 연기했던
바로 그 배우이다. 10년의 차이를 두고 공교롭게도 그는 한 여자에게 유혹당해 자신의 직업적 책임과 동료를 배신하는 남자로 나왔던 것이다.
하지만 <푸쉬오버>에서 폴은 <이중 배상>의 월터처럼 한 여자에게 철저히 조종당하고 또 배신당하는 남자는 아니다. 그런 면에서 <푸쉬오버>는
신랄함이 약간 가신 <이중 배상>이라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사냥꾼의 밤]
The Night of the Hunter 1955년
감독 찰스 로튼 출연 로버트 미첨, 셸리 윈터스, 릴리안 기쉬
알렉산더 코다의 <헨리 8세의 사생활>(1933)로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받은, 뚱뚱하고 별로 호감을 주지 않게 생긴 영국 출신 배우가 55년
직접 연출한 영화 한편을 내놓았을 때, 그 영화를 본 사람도 많지 않았거니와 그것을 높이 평가하는 사람도 거의 없었다. 56년, 그 영화에
대한 리뷰에서 프랑수아 트뤼포는 이렇게 썼다. “그것은 아마도 로튼의 유일한 감독 경험이 될 것이다.” 트뤼포의 예언은 적중했다. 그런데 그
글에서 트뤼포는 <사냥꾼의 밤>이 우리로 하여금 이 실험적인 영화, 발견의 영화와 사랑에 빠지게 해주리라고도 말했다. 그 말도 정확한 것이었다.
시네필들 사이에서는 단순하게 말해 <사냥꾼의 밤>을 보았는가 아닌가에 따라서 시네필인가 여부가 결정된다고 말할 정도이니까 말이다.
영화를 보고 나면, <사냥꾼의 밤>이 개봉 당시 왜 그렇게 평가를 받지 못했는가를 짐작하기는 그리 어렵지 않다. 영화는 끔찍한 일이 저질러질
듯한 음습한 범죄영화로 시작해서 어린이들의 모험영화로 이월하더니 결국엔 놀랍게도 일종의 동화로 끝나는 게 아닌가. 이런 식의 조화롭지 못한
구성은 적지 않은 사람들에게 당황스러운 것이겠지만 기실 이 영화의 ‘기묘한 매력’은 주로 이로부터 나온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 불안정한
내러티브 속에다가 찰스 로튼은 선과 악에 대한 문제들을 조심스레 새겨 넣는다.
<사냥꾼의 밤>이 ‘전설’이 된 데는 여기에 참여한 몇몇 ‘전설적인’ 이름들 덕도 있을 것 같다. 이 영화에서 우리는 로버트 미첨 최고의 연기말고도
무성영화 시대 최고의 스타 릴리언 기쉬의 복귀를 꼭 언급해야만 할 것이다. 또 시나리오를 쓴, 미국에서 가장 추앙받는 평론가 제임스 애지의
이름도 기억하지 않을 수 없다. 촬영감독 스탠리 코르테즈는 오슨 웰스의 <위대한 앰버슨가>(1942)를 찍은 그 사람이다.
[전락의 링]
The Harder They Fall 1956년, 흑백, 109분
감독 마크 롭슨 출연 험프리 보가트, 로드 슈타이거
<전락의 링>에 대해 이야기하려고 한다면 당연히 주인공인 험프리 보가트부터 언급하는 게 그에 대한 합당한 예의일 것이다. 이 영화는 필름 누아르의
아이콘 자체였던 그의 모습을 마지막으로 볼 수 있다는 점만으로도 특별한 그런 영화이니까 말이다. 이 영화에서 보가트는 어쩔 수 없이 그 안타까운
노쇠함을 노출하고 말지만 그만의 윤리만은 여전히 지켜나가고 있다. 그는 마지막까지도 냉소주의를 가지고 세상에 대적하는 외로운 독불장군인 것이다.
보가트가 연기하는 에디 윌리스는 예전에 저명한 스포츠 칼럼니스트였는데 지금은 영락해서 한 권투선수의 홍보 담당일을 하고 있는 인물이다. 닉
벤코라는 권투 프로모션계의 거물에게 고용된 에디는 그리 영리해보이지 않는 아르헨티나계 권투선수 토로 모레노를 돌보는 일을 한다. 그러면서 윌리스는
프로 복싱 세계의 어두운 면을 들여다보게 된다. <전락의 링>이 묘사하는 프로 복싱의 세계는 범죄 조직의 손길에 의해 좌우되는 그런 곳이다.
그 세계란 비정한 검투사들이 싸움을 벌이는 난투의 세계와 다른 게 없다고 영화는 말한다. 커크 더글러스를 주연으로 기용해 <챔피언>(1949)이라는
리얼한 복싱 드라마를 이미 발표한 적이 있는 마크 롭슨 감독이 사각의 링에 대한 또 한편의 수작 영화를 만들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