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 배가 고파지기 시작할 무렵이다. 저녁 여섯시, 이병헌 앞에 놓인 과자봉지가 금세 동이 났다. “전 뭐든지 잘 먹어요. 술도 잘 먹고, 밥도 잘 먹고, 간식도 잘 먹고.” 어느덧 서른세살이 된, 그런데도 사진촬영을 하기 전에 근육을 키워야겠다며 장난처럼 벼락치기 운동을 하던 이병헌은 쉬지도 않고 다른 봉지를 뜯었다. 드라마 <올인> 때문에 짧게 깎은, 본인은 정말 모자로 감추고 싶어했지만 거칠게 뻗은 머리가 오히려 앳되게 보이는 이병헌. 그러던 사람 위로 오랜 사랑을 가슴에 삼킨 젊은 카레이서가 겹쳐드는 과정은 지켜보고 있으려니, 신기했다. 먼저 눈동자에 물기가 담긴다. 그리고, ‘연인’의 가슴에 잠시 얼굴을 묻는다. 두 남자의 영혼이 뒤바뀌는 로맨스 <중독>의 신비한 파장이 스튜디오로 퍼져나온다.
십년쯤 전이었다면 누구도 이병헌에게 이런 표정을 기대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게 아닌데, 하면서도 가죽재킷을 걸치고 스스로의 젊음을 과장하던 한때라고 이병헌은 회상한다. “터프가이가 인기있던 시절이었죠. 미디어가 끌고 간 부분이 있었을 지 모르지만, 내 안에 그런 면이 있기도 했을 걸요.” 그러나 십년 넘는 세월의 사포질을 거친 뒤, 이병헌은 변함없이 가파른 골격을 가시걷힌 폭신한 눈빛으로 감싸안고 있다. 개인의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상처를 눌러담은 <공동경비구역 JSA>의 이수혁 병장이나 죽음을 넘어 돌아온 사랑을 오직 혼자서 알아보는 <번지점프를 하다>의 인우가 보여주던, 심성 고운 눈동자. 이병헌은 때로 팍팍하기도 했던 이십대의 자신이 이처럼 달라진 까닭을 자연스럽게 쌓인 시간의 힘으로 돌린다. “직업이란 게 그렇잖아요. 시간이 지나고 경험이 늘면 노련해지는 거. 특히 배우에겐 시간이 가장 좋은 스승인 것 같아요. 나 자신이 좀더 감성적이고 섬세해지지 않았다면 아무리 애써도 이미지를 바꿀 수 없었을 테니까.”
그런 이병헌에게도 <중독>은 가장 자주 벽에 부딪힌 영화였다. 형수가 될 은수를 남몰래 사랑하던 대진은 “은수가 얼마나 형을 사랑하는지 알고, 형 호진만이 은수를 행복하게 해줄 수 있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선뜻 앞에 나서지 못하던 인물이다. 자칫 감정의 선을 넘으면 관객이 외면할지도 모를 위험한 사랑. 판단은 관객의 몫이라지만 그들을 설득하는 건 자신의 몫이라고 이병헌은 생각했다. 감독과 논쟁하느라 촬영이 늦춰지는 일도 많았다. “인물을 이해하지 않으면 연기를 못하겠어요. 제가 악역을 한다면, 시나리오에 나와 있지 않더라도 그 인물이 그렇게 행동하는 이유를 직접 만들어야 해요. 카메라 앞에서 진실해야 하거든요. 그렇지 않으면 다시 할 수밖에 없고.” 그 고집은 곧게 자란 나뭇가지 같지만, 찬찬히 설명하는 목소리만은 그가 좋아한다는 열대지방 섬처럼 온기가 있다. 이병헌에겐 아직 시간이 건드리지 못한 무언가가 남아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