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 소야 나 최영의야.” <넘버.3>에서 불사파 두목 송강호의 명언으로 남은 그 대사를 기억하시는지. 집채만한 황소 수십 마리와 드잡이를 하다가 가뿐히 메다꽂았다는 장수 최영의, 아니 최배달의 존재가 미미하게나마 스크린에 드러난 것은 이때가 처음이었다. 일본으로 건너가 세계 모든 격투기를 제압하는 등 무패의 신화를 일궜던, 극진 가라테의 창시자 최배달의 생애가 방학기씨의 동명만화 <바람의 파이터>를 토대로 영화화된다는 소식이 흘러나온 것이 2년 전. 문제는 제작진이 단순히 최배달의 ‘대역’이 아닌 ‘현신’을 찾는다는 데 있었다. 진짜 싸움의 냄새를 알고 있고 표현할 수 있는, 고행에 가까운 수련 과정을 오롯이 따를, 그리하여 실제 무술의 고수들과 겨룰, ‘될 성부른 떡잎’을 찾아내는 일은 결코 녹록지 않았다. 그러나… 서프라이즈! 그 문제의 ‘파이터’로 낙점된 이는 기성 배우도 무술인도 아닌, 가수 비였다.
“네가 무도(武道)를 알아?” 비의 캐스팅 소식이 전해지자, 반대여론이 만만찮게 들끓었다. 그럴 법했다. 그는 무대 위에서 환한 미소와 고운 미성, 그리고 현란한 율동을 선보이던, 밝고 앳된 이미지의 하이틴 스타이기 때문이다. 그런 반감과 의혹을 의식한 탓일까. <바람의 파이터> 제작 발표회 현장에 나타난 비는 우리가 알던 그 사람이 아니었다. 웃음기를 거둔 결연한 표정의 비는 “가수 비는 잊어달라”고 못 박기까지 했다. 이날, 양윤호 감독은 우연히 TV에서 본 비에게 학창 시절 싸움깨나 한 전력이 있다는 얘길 듣고 맘이 동한데다 그가 오디션에서 보여준 ‘눈빛’과 ‘몸짓’에 매료됐다고 설명해주기도 했다. 촬영과 인터뷰를 위해 두어주 뒤에 다시 만난 비는 그때의 긴장과 피로는 씻은 듯했으나, 여전히 단단히 기합이 들어가 있었다. 사진기자의 “웃어달라”는 주문에 “웃어도 돼요”라고 되물으며 편하게 풀어지기 전까지는.
“그냥 넌 노래나 하고 춤이나 춰라, 그러시는 분들도 있어요. 근데 전 준비되지 않으면 아예 시작하질 않거든요. 연기는 이전부터 하고 싶었는데, 뭔가 보여줄 수 있는 역할을 만난 거죠. 남 주기 싫었어요.” 올해 4월 말에 데뷔해 <나쁜 남자> <안녕이란 말대신> <악수> 등을 연달아 히트시키며 스타덤에 오른 비는, 그간 심심찮게 충무로의 손짓을 받았다고 털어놓았다. 대개가 가수 비의 이미지 그 이상도 이하도 요구하지 않는 그런 멜로영화였다고. “한국엔 정통 액션물도 액션스타도 없잖아요. 그래서 이 영화에 끌린 것 같아요. 김두한은 전국구 파이터지만, 최배달은 세계구 파이터잖아요. 한마디로 영웅이죠. 이런 분을 연기한다는 것이, 저 개인에게는 ‘수련’의 의미도 있어요.”
안양예고 시절, 춤에 빠져 연기 수업을 등한시했다는 그는 이제 엄청난 ‘벼락치기’공부를 해야 한다. 연기 수업은 물론, 극진 가라테 훈련과 일본 현지 수련을 거쳐야 한다. “그 고통을 느껴봐야 그분을 알 것 같거든요.” 지옥훈련을 방불케 하는 수련 내용을 상세히 설명하는 비는 겁에 질려도 모자랄 판에 아이처럼 들떠 있었다. 비는 그런 사람이다. 한때 그의 스승 박진영씨는 연습 중독인 그를 걱정해 연습실 출입금지령을 내리기도 했다. 이 친구,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로, 인생을 너무 전투적으로 살고 있는 건 아닐까. 비는 그것이 자신이 인생을 즐기는 방법이라고 말했다. “솔직히 두려워요. 도태될까 봐. 그래서 잠이 안 와요. 그럴 땐 연습해요. 그럼 맘이 편해요… 바다 한가운데 섬이 떠 있고 거기까지 가야 하는데, 계속 파도가 밀려 와요. 수영을 잘하지 않아도 열심히 헤엄쳐 가면, 언젠간 그 섬에 도착하겠죠.” 비는 배우로 검증되지 않은 자신을 미더워하지 않는 시선이 불쾌하지 않다고 했다. 아직 보여준 게 없으니 그럴 수 있다면서. 그리고는 “기다리라”고, “자신있다”고 되뇌었다. 그런 그를 한번 믿어보고 싶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