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처없이 흔들리는 그 눈빛이 제대로라고 느꼈다. 살면서 바닥을 한번 이상은 쳤을 것 같은 굴곡진 눈빛의 박지아가 그래서 내내 궁금했다. 화면과 합쳐서 뭉개지는 얼굴선 사이로 언뜻언뜻 비치는 색스런 눈빛, 슬픈 눈빛, 환영을 보는 저 눈빛, 때로 현실과 맞부딪치면서 의식이 분열될 때 내는 쨍 하는 소리가 그대로 전달되는 눈빛의 박지아는 출렁이는 물이 담긴 투명한 유리잔 같았다. 깨지기 쉬운.
낯선 카메라의 모니터를 받으며, 전화통을 붙잡고 희로애락의 모든 감정을 쏟아내야 하는 쉽지 않은 오디션을 치러내면서도 그녀는 스스로 신기할 정도로 떨지 않았다. 감독이 직접 썼다는 오디션용 지문을, 감정을 염두에 두고 썼기에 문맥도 잘 연결되지 않던 긴 대화 문장을 큰 떨림없이 연기해내는 그녀의 모습을 가장 환영한 것은 김 감독이었다. 박지아말고도 또 한명의 경쟁자가 있었지만(박지아의 말에 의하면 그녀가 훨씬 역의 이미지에 맞는 마스크를 지녔다고 한다) 선뜻 김기덕은 박지아의 손을 들어주었다. 이미지는 강렬하되 연기가 안 되는, 혹은 이미지와 연기 모두 미흡한 여배우를 이번엔 기용하지 않겠다는 감독의 의지였다. 연극판에서 그녀가 배운 연기는 툭하면 그녀를 카메라의 사각 프레임 밖으로 밀어냈지만, 일단 카메라의 움직임을 알게 된 뒤부터 절제된 연기 동선은 금세 그녀의 것이 됐다.
처음 오디션 장에 들어설 때 ‘미친년’ 미영은 단지 배우로서 얻을 게 많은, 그러기에 욕심나는 역할, 단지 그것뿐이었는데 막상 역을 따내고나자 사사건건 쉬운 게 없었다. 도대체 어떤 행동이 정신나간 여자가 할 만한 것인지, 아주 구체적이고 디테일한 부분까지 들어가자 막막해진 그녀였다. 자기 전에 다음날 촬영분을 한번 읽어보고, 물론 촬영 전부터 닳도록 읽어 다 외워버린 시나리오지만, 슛 들어가기 전 마음을 가다듬는 것이 준비의 전부. “왜냐하면 전 그대로 미친년이었기 때문이죠. 연습을 해서 만들어진 자세가 아니라 그냥 상황이 주어지면 그 모습이 나올 것이라고 믿었어요. 그랬더니 그렇게 되던걸요.” 하지만 촬영이 계속되도록 김기덕은 박지아의 연기에 대해 일언반구 입을 열지 않아 은근히 그녀의 애를 태웠다. 맘에 든다는 건지 그렇지 않다는 건지 알 수 없어 그녀가 한마디 묻자 감독은 그저 “나도 몰라. 니가 하고 싶은 대로 해”라고만 답했다. 한편으론 맥도 빠지고 허무했지만 왠지 마음 한구석 막힌 부분이 뻥 뚫린 것 같았다. 이유없이 애를 태웠구나 싶기도 하고, 지금까지 날, 내 연기를 믿어줬구나 하는 기분 좋은 자신감도 붙었다. 그렇게 여기까지 왔다. 일반 관객과 만나는 시사회장에서 미영의 등장에 맞춰 난데없이 터지는 웃음에 당황하기도 했지만, 잘 웃고 가볍게 즐기는 관객의 모습이 여유있어 보여 그녀 스스로도 느긋해졌다.
인터뷰가 있던 날…. 독감 때문에 파리해진 그녀가 싸늘한 스튜디오 한켠에서 촬영을 위해 혼자 옷매무새를 가다듬는다. 이윽고 연신 피사체를 복제하는 플래시 소리가 터지고, “이번엔 활짝 웃어봐요” 하는 사진기자의 말에 결국 고개를 돌려 그녀를 본다. 이번엔 보고 말리라 하는 심정으로. 그녀의 얼굴을 장식한 환한 웃음은 진짜였다. 바닥으로 침잠하지 않고 삶의 언저리를 부유해보지 않은 이는 모르는 ‘진짜’ 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