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제5회 여성관객영화상 [2] - 후기
2001-01-03
글 : 유지나 (평론가)
뇌관을 터뜨려라!

2000년 영화세상은 새 천년 벽두의 화두가 새롭게 젠더의 구획을 탐구하는 것임을 명확하게 보여준다. 남성판타지 이미지로 우리에게 시선의 쾌락과 시선의 권력을 가르쳐주었던 영화는 이제 그것이 제대로 된 것이었는가를 성찰하면서 무엇이 필요한가를 탐색해간다. 이런 변화는 수많은 매체가 경쟁하는 속에서도 여전히 극장을 찾는, 좀더 주체적인 시선을 갖게 된 여성 관객, 남성의 마스크를 벗기 시작한 여성 관객의 영화보기와 관계를 맺는다. 제5회 여성관객영화상 설문조사는 그 점을 증명해준다.

젠더 - 한국서 머뭇, 해외서 폭발

재구획되는 영화 이미지의 젠더는 한국영화 언저리에서도 머뭇거리며 침투하려는 흔적을 남긴다. 남성 판타지에 의문을 던지는 의문부호들- 한두 조각의 이미지, 내러티브 욕망, 캐릭터 이미지 등- 이 분명 존재한다.

<봉자>의 김밥마는 중년여자와 10대여성의 관계, <플란다스의 개>에서 인생의 씁쓸함을 공유하는 두 젊은 여성의 의기투합, <단적비연수>에서 되살아난 성숙한 여성으로서의 이미숙 이미지의 아우라, <공동경비구역 JSA>에서 공정한 수사를 진행하려는 이영애의 고뇌가 그런 내비침이다. 그러나 이런 요소들은 영화 전편에 충만하게 파급효과를 내며 영화보기의 쾌를 터뜨리는 뇌관이 되지 못한 채 우물거리다가 옆길로 새나간다. <이프>처럼 완전히 삼천포로 가는 경우도 있다. 그 가운데서 변영주/보임의 세 번째 다큐작업 <숨결>이 눈길을 끄는 것은 뇌관을 터뜨리진 않아도 그것을 품고 가며 속으로 다져가는 용감하고 외로운/의로운 영화작업이기 때문이다.

한국 밖의 영화로 나가면 이런 우물거림은 뇌관이 되어 폭발하기도 한다. 남성 성애의 쾌락을 해체하는 <섹스: 애나벨 청 스토리>, 카메라를 든 엠마뉴엘의 남성 신체 탐구와 자기 성애 탐구를 싸고 도는 <로망스>, 순수한 육체의 성애 판타지로부터 가슴속으로부터 치밀어오르는 사랑의 정서로의 전이, 그 접점을 수치심과 자기 검열없이 세련되고 깨끗하게 거슬러올라가는 <포르노그래픽 어페어>. 신데렐라 콤플렉스를 실천하던 순진한 섹시걸이 당당하고 똑똑한 아줌마로의 성숙을 보여주는 씩씩한 <에린 브로코비치>, 어머니가 된다는 것, 그리고 모성으로서의 어머니가 아니라 여성으로서의 어머니를 상정하는 <루나파파>와 <내 어머니의 모든 것>, 프로이트를 해체하는 탈주의 반영웅으로서의 십대 소녀의 삐뚤어짐이 빛나는 <처음 만나는 자유>…. 올해 한국의 1천여명의 여성관객이 지지하는 이런 외화들은 남성 판타지라는 견고한 틀을 해체하면서 이제 여성관객에게 새로운 영화보기 쾌락을 제공하기 시작한다. 남성관객에게도 헤택은 있다. 남성 판타지 쾌락이 일방향 사기극으로 못 보여준 새로운 점을 발견할 기회를 주니까. 하긴 한 인간의 존재 속에 절대적인 여성이나 절대적인 남성이 어디 있으랴마는. 우리가 모두 양성성을 갖춘 관객이어도 우리를 어느 한쪽의 젠더로만 몰아온 남성 판타지와 마스크효과(남성적 시선으로 보기)가 전범이다.

욕망하라, 그리고 실현하라

그래서 한국 여성관객은 올해 이런 불만과 요구를 피력한다. 여성 캐릭터가 과거보다 다양화됐지만 여전히 한정된 몇 종류에 갇혀 있으며(33%), 특히 비주체적인 존재로 묘사되거나(29%), 성적 대상으로만 부각되는 것(25%)이 영화보기의 장애라고. 그리하여 여성이 보고 싶은 영화란 남성 판타지가 사기쳐온 여성의 욕망을 깨는 솔직한 여성의 욕망이라고(29%). 그런 여성은 남성이 바라는 역할, 남성이 주어온 역할을 하는 이상적 여성이 아니라 자기 삶을 어떤 식으로건 살아내는 이야기를 가진 대안적 여성상이기를 희망한다(29%). 그런 틀 속에서 새로운 남녀관계(18%)와 여여관계(12%)가 삶의 이야기/이미지로 담기는 영화가 우리에게도 필요하다고 밝힌다.

제2의 르네상스라는 평가가 나오는 새 천년 한국영화를 기리는 좋은 말들이 넘쳐난다. 그러나 여성관객의 지지없이 한국영화의 희망을 이야기할 수 없다. 그런 의미에서 작고 소박하게 시작해서 조금씩 키워온 여성관객상은 한국영화평가의 뇌관이며, 그것을 한국영화가 터뜨려주기를 희망하는 것은 당연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