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ory
성냥공장의 여공 이리스(카티 오우티넨)는 낮에는 일하고 저녁이면 밥상을 차리며 무기력하고 나태한 부모를 먹여살린다. 저녁 설거지가 끝나면 서툰 화장을 하고 댄스홀로 나서보지만, 그녀에게 춤을 청하는 남자는 없다. 어느 날 새 드레스를 사입은 이리스는 한 여피족 남자와 밤을 보낸다. 그와 두 번째 데이트를 성사시키지만, 모욕적인 결별선언만 듣는 이리스. 얼마 뒤 임신한 이리스는 남자에게 편지를 쓰나 낙태 비용으로 쓸 수표를 답장 대신 받자 차에 몸을 던진다. 퇴원 뒤 부모의 집에서 나온 이리스는 쥐약을 산다.
Review
아무도 그녀에게 전화하지 않는다. 아무도 그녀에게 춤을 청하지 않는다. 아무도 그녀의 입술을 꿈꾸지 않는다. 공장 거리 44번지에 사는 소녀 이리스에게는 심신을 녹여줄 성냥 한 개비도 없다. 누구도 눈여겨보지 않는 벽지무늬처럼, 그녀는 있으나마나한 존재다. 관객이 처음 만나는 것은 이리스의 얼굴이 아니라 손이다. 컨베이어벨트 위를 무감동하게 왕복하는 거칠고 불그죽죽한 손. 통나무를 자르고 썰고 황을 묻혀 상자 속에 넣는 기계장치의 운동을 낱낱이 보여주며 마치 ‘성냥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를 설명하는 다큐멘터리라도 되는 양 시작한 영화 <성냥공장 소녀>는, 성냥갑에 상표를 붙이는 소녀의 까칠한 손에 얽힌 사연으로 넘어가면서 ‘사람은 어떻게 파괴되는가’에 관한 ‘다큐멘터리’로 천천히 변해간다.
검게 팬 눈그늘, 푸석한 구릿빛 머리카락. 말만 소녀일 뿐 이리스의 얼굴에는 중년에나 마땅할 피로가 아로새겨져 있다. 식탁에 올릴 빵값을 버는 노동도, 그 빵을 접시에 차려내는 노동도 몽땅 이리스의 몫이다. 담배만 피워대는 엄마와 반주검 상태인 아버지는 한쌍의 거머리처럼 말없이 딸의 피를 빨아댄다. 따귀 한대를 곁들인 “창녀 같으니라구!"가 그들이 딸에게 던지는 영화 속 첫 마디다.
사랑이 혹시나 그녀를 구원할 수 있을까. 이리스는 퇴근길 버스 속에서 허황한 로맨스 소설을 읽고, 밤이면 댄스홀에 나가 손내밀어줄 남자를 기다리지만, 주변의 여자들이 다 플로어로 이끌려 나가도록 성냥공장 소녀의 발치에는 빈 소다수 병만 하나둘 늘어간다. 아키 카우리스마키 감독은 온 세상으로부터 거절당한 소녀가 귀가해 소리가 날세라 외투를 걸고 흐릿한 형광등을 끄고 모포를 어깨 위로 끌어당기는 동작을, 입을 굳게 다문 채 낱낱이 주시한다. 기 드 모파상의 단편소설처럼, <성냥공장 소녀>는 더없이 가혹한 스토리를 더이상 살점을 발라낼 수 없는 깡마른 문체로 적어 내려간다.
드라마는 이리스가 제가 번 돈을 자신을 위해 쓰기로 결심하는 ‘반역’의 순간에 시작된다. 그녀가 산 빨간 드레스는 한 남자의 욕망을 불러일으켜 이리스를 낯선 침실로 이끌지만 남자는 그녀를 매춘부라고 믿는다. 베갯머리에 남겨진 지폐의 의미를 알지 못하는 어리석은 이리스는 남자의 차를 쓰다듬고 창 밑을 서성인다. 단 한번 찾아온 여린 햇살은 익숙했던 겨울을 더 춥게 만드는 법. 외로운 생일을 맞은 소녀는 홀로 맥주를 마시고 막스 형제의 코미디영화를 보러가지만 제일 웃기는 장면에서 그만 야윈 뺨을 눈물로 적시고 만다.
<성냥공장 소녀>는, 짐 자무시를 닮았지만 그보다 정치적이고 페드로 알모도바르와 비교되지만 그보다 무뚝뚝한 핀란드감독 아키 카우리스마키가 만든 ‘프롤레타리아 3부작’(<천국의 그림자>(1986), <아리엘>(1988))의 세 번째 영화다. 스스로의 노동으로부터 완벽하게 소외당하고 행복을 추구할 가능성을 철저히 부정당한 노동자의 비극을 담았지만, <성냥공장 소녀>는 모순 극복의 요령을 제안하는 대신 모순 안쪽으로 들어가 그 마디마디를 한뼘한뼘 해부학자의 손길로 감촉한다. 감독은 특히 말을 불신한다. 몽땅 받아 적어도 공책 두장이 될까말까한 대사 가운데 20분이 지나서야 나오는 첫 대사는 고작 “맥주 하나!”이고, 데이트의 첫 대화는 “내 앞에서 꺼져!”이다. “어차피 기껏 써봤자 6장 중 5장은 편집에서 잘려나가더라. 한편 걸러 한편은 아예 각본도 안 쓰고, 촬영기사가 조명을 설치하는 동안 끼적거린다”는 것이 카우리스마키의 설명이다.
그러나 무성영화가 꼭 지루하지는 않은 것과 똑같은 이유에서 <성냥공장 소녀>는 한시도 관객의 시선을 놓지 않는다. 말을 아낀다 해서 카메라가 설치는 것도 아니다. 대신 카우리스마키는 브레송이 그랬듯 딸 접시의 고기를 서슴없이 찍어먹는 엄마의 손놀림, 책이나 빈병의 인서트숏, 알 듯 모를 듯 지나가는 의미심장한 편집을 통해 알아야 할 모든 것을 알려준다. “로베르 브레송을 액션영화 감독처럼 보이게 할 영화”를 찍으려 했다는 감독의 말처럼 <성냥공장 소녀>는 내핍의 미학으로 완결돼 있다. 이따금 주크박스, 카페 스피커, 바에서 화면 안 음악인 척 시침떼고 울려퍼지는 신파조 유행가의 가사가 허랑하게 내레이션을 대신할 따름이다. “모든 것을 주고 실망할 땐 더욱 힘든 일이지. 이제 더이상 사랑의 꽃을 비추지 마. 너의 차가운 시선과 얼음 같은 웃음이 그걸 죽여버렸으니까. 어떻게 네가 그럴 수 있니?”
관객을 못 믿어 주제를 두번 세번 ‘낭송’하거나, 갈길 뻔한 주변 인물과 하부 플롯으로 내러티브의 풍성함을 가장하는 영화들이 넘치는 시대에, 도무지 교태를 모르고 “누구의 관심도 억지로 끌고 싶지 않다”는 시니컬한 표정의 <성냥공장 소녀>는 대단히 매력적이다. 마지막 문이 그녀 앞에서 닫혔을 때, 이리스는 삶이 그녀를 대우한 방식 그대로 세상에 응수한다. 절망을 납득하기란 어렵다.그것도 무익한 파괴로 치달은 절망을 납득하기란 더 어렵다. 그러나 이리스가 쥐약병에 담아 세상에 던진 “어떻게 네가 그럴 수 있니?”라는 질문을, 우리는 그녀에게 도저히 되돌려줄 수가 없다. 카우리스마키 감독은 하소연이나 연민보다 때로는 절망의 풍경화 자체가 절망을 설복하는 가장 유창한 언어임을 알고 있었다.
김혜리 기자 vermeer@hani.co.kr
걸작보다는 인기있는 "최악의 영화"/ 재개봉작 <레닌그라드 카우보이 미국에 가다>
마치 네컷 만화 같은 호흡과 유머감각으로 카우리스마키의 독자적 작품 세계를 널리 알린 작품. 밴드 멤버로 핀란드의 실존 밴드 ‘슬리피 슬리퍼스’가 직접 등장했으며 영국의 펑크가수 닉키 테스코가 <본 투 비 와일드>를 불러준다. 짐 자무시의 중고차 딜러 연기는 유명한 카메오. 역시 뿌리뽑힌 자의 눈으로 바라본 세상을 그린 짐 자무시의 <천국보다 낯선>에서 미국이 동유럽처럼 보이듯, <레닌그라드…>의 미국과 멕시코도 툰드라 지역처럼 춥고 쓸쓸하다. 상영시간 78분, 12세 관람가. 백두대간은 씨네큐브에서 <성냥공장 소녀>는 1, 3, 5, 7회에 <레닌그라드…>는 2, 4, 6회에 상영할 예정이다. <레닌그라드…> 입장료는 5천원, <성냥공장 소녀>와 동시관람할 수 있는 티켓가격은 1만원으로 책정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