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타]
행복한 순면과 외로운 비닐사이, <성냥팔이 소녀의 재림>의 임은경
2001-05-01
글 : 최수임
사진 : 손홍주 (사진팀 선임기자)

1983년 7월7일, 임은경은 고요 속에 사는 두 남녀의 단지 하나뿐인 딸로 태어났다. 누구나 그녀가 아름다운 스무살을 맞을 것임을 의심하지 않았고 소녀는 예상보다 빨리, 스무살이 되기도 한참 전에 스무살의 가장 빛나는 마스코트가 되었다. 2년 전 천호동의 피자가게. 동네에 피자집이 문을 열던 날, 기념행사로 이병헌 사인회를 한다길래 친구들과 줄을 섰던 임은경은 거기서 “누군가”의 요청에 “몹시 떨며” 이름과 전화번호를 적어주었다. 곧 친구들은 광고에 나온 신비의 소녀가 “너 같다”며 물어왔고, 임은경은 “나였으면 좋겠다. 진짜 나랑 닮았다”고 새침을 떨었다. 처음 세상에 얼굴을 알릴 때부터 그녀는 본의 아니게 낯을 많이 가린 셈이다.

“낯을 많이 가려요”,라고 말하기도 했지만 임은경은 실제로 말하면서 손으로 얼굴을 자꾸 감쌌다. 얼굴을 가린 채 먼저 웃고 잠시 진정한 뒤 그리고 말하기. 그녀와의 인터뷰는 스톱모션 애니메이션 같았다. 말하자면 그녀는 자신이 어떤 사람인가 길게 설명하기보다는 그저 천천히 느끼게 하는 타입이었다. 하얀 강아지와 두 마리 토끼, 그리고 여러 나라에서 만들어진 예쁘고 예쁜 여자아이 인형들. 곁에 두고 아낀다는 그것들과 꼭 닮았을 법한 그녀는, 취미인 인형수집을 하듯이 작은 얼굴 속에 여러 가지 표정을 하나씩 모아가며 살고 있었다.

“라이터 사세요, 라이터 사세요.” 임은경은 요즘 ‘라이터 팔이 소녀’로 영화에 ‘데뷔하고 있다’. 첫 작품인 장선우 감독의 <성냥팔이 소녀의 재림>에서 ‘성냥팔이 소녀의 재림’이라는 게임의 주인공 ‘성소’와 오락실에서 아르바이트하는 여자아이 ‘희미’가 모두 그녀의 배역. 촬영은 부산에서 진행되고 있고, 스탭과 배우가 모두 22채의 아파트를 빌려 ‘합숙’ 생활을 한다. ‘TTL 소녀’처럼 말도 없고 어딘지 신비로운 캐릭터인 게임 속 성소와 자유분방한 “요즘 아이” 희미. 임은경 자신은 어느 쪽에 가까울까? “성소랑 희미랑 딱 중간”이란다. 신승훈과 메탈리카를 동시에 좋아하고, 쑥스러움이 많다면서도 안젤리나 졸리나 시고니 위버처럼 되겠다는 AB형의 소녀. 임은경은 부드럽고 행복한 순면의 느낌과 차갑고 외로운 비닐의 느낌을 이음새를 찾기 힘들 만큼 묘하게 이어 갖고 있었다.

“희미가 아직 오락실에 있다면, 날라리라면, 남자애랑 게임기 위에서 으응응하다가….” 장선우 감독의 시나리오에 단 한줄로 씌어 있는 부분. 기자와 만난 날 찍은 ‘오락실에서 노는 장면’은 임은경이 지금까지 찍은 장면 중 가장 어려운 것이었다. “어떡하지, 어떡하지, 하면서 이틀 전부터 잠을 못 잤어요. 너무 신경이 쓰였거든요.” <성냥팔이 소녀의 재림>은 임은경에게 사실 많이 ‘거친’ 영화다. 술도 못 마시는 그녀가 영화에서는 라이터의 가스를 마시는 연기를 해야 한다. ‘요즘 아이’들이 쓰는 욕 몇개 정도는 아무렇지 않게 할 줄 알아야 하고 몸무게 39Kg이면서 3Kg짜리 기관단총을 들고 실탄을 쏴야 한다. 하지만 그래서 거친 것만은 아니다. 그저 ‘시키는 대로’, ‘무표정’하기만 하면 됐던 TTL 소녀보다 성냥팔이 소녀는 훨씬 사연많은 소녀고, 임은경은 “무표정하면서도 눈에는 성소의 느낌을 담은 연기”를 “알아서” 해야 하는 것이다. 생각하고 또 생각한 끝에 임은경이 알아낸 성냥팔이 소녀의 세 가지 눈빛은 “슬픔, 분노, 사랑”. “시스템에 세뇌당했기 때문에 자기 감정을 표현할 수 없는 슬픔, 사랑하는 사람을 죽인 자에 대한 분노, 그리고 너무나 불쌍하여 사랑해주고 싶은 느낌”을 투명한 눈망울 속에 담아가며 임은경은 요즘 영화배우로서의 첫 날들을 꼬박꼬박 ‘새어’가고 있다. 사진촬영과 인터뷰가 끝나니 그날도 시계는 새벽 3시를 넘어 있었다.

내 인생의 3가지 행운 | 영화를 하게 된 것, 영화하면서 만난 사람들이 다 좋은 사람들인 것, 그리고 토크쇼에 나가 “예쁘게 낳아서 잘 키워줘서 감사합니다”라고 수화로 말해 엄마 아빠를 기쁘게 해드린 것.

나, 이곳에서 인생을 배웠다 | 지금, 이 일을 하면서. 무남독녀 외동딸이고 나이는 어리지만 사회에 나와 있으니까… 엄마 아빠가 나이는 많지는 않지만, 나중에 나이가 들면 내가 엄마 아빠를 돌봐야지 하는 생각이 든다. 인생이란 말, 아직 나한테는 잘 안 어울리지만 그런 기분, 왠지 인생을 배워가는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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