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읽기]
<돌이킬 수 없는>과 <8마일>
2003-04-03
글 : 짐 호버먼 (칼럼니스트 영화평론가)

<돌이킬 수 없는>

과시하기 좋아하는 스타일의 가스파 노에는 <돌이킬 수 없는>을 엔딩 크레딧과 함께 시작하고는, 열두개의 에피소드들을 시간의 역순으로 늘어놓는다. 첫 에피소드에서 카메라는 침대 위에 나체로 앉아 있는 뚱뚱이(필립 나혼)를 비추고는 밖으로 빠져나가 혼란스런 거리로 내려앉아, 경찰차로 끌려가는 두 사내를 보여준다.

그들은 무슨 일을 저질렀는가? 두 번째 시퀀스는 연행 바로 전에 일어났던 일을 소개한다. ‘클럽 렉텀’(直腸)이라는 우스운 이름의 어두운 섹스 지하감옥을 찾아가는 이 미치광이들을 쫓아가는 것이다. 이들은 ‘르 테니아’(촌충)라는 이름의 사내를 추격 중이다. 하지만 이 지옥 같은 사도마조히즘의 혼란스런 클럽에서, 그들은 또 다른 사람의 두개골을 소화기로 내리쳐 부숴놓고 만다. 다시 이어지는 시간 역순의 세 번째 시퀀스. 마커스(뱅상 카셀)와 피에르(알버트 듀퐁텔)는(이제 우리는 그들의 이름을 안다) 렉텀을 찾기에 바쁜 나머지 이민민 운전사가 모는 택시를 마구 부숴놓는다.

그럼 이들은 대체 왜 이리 바쁜가? 지난 칸영화제에서 미리 잘 고안되고 예측된 스캔들을 낳았던 <돌이킬 수 없는>의 중심 에피소드는 마르커스의 아름다운 여자친구(모니카 벨루치)가 르 테니아라는 녀석에게 지하도에서 잔혹하게 강간당하는 사건이다. 이 의도적인, 그리고 성공적으로 충격적인 악(惡)은 러닝타임 8분 정도지만 이보다 훨씬 더 길게 느껴진다. 고깃덩이를 드디어 찾아낸 노에의 카메라는 바퀴 돌리기를 멈추고 둥지를 틀고 앉아 이 역겨운 스펙터클을 곤죽이 될 때까지 이빨로 씹고씹고 또 씹어댄다. 이것으로써 임무는 완수됐다.

<돌이킬 수 없는>은 계속 시간의 뒤로 좇아가 파티와 베드룸 신들을 보여주고는 2001년의 한 포스터에 시선을 멈추어, 관객에게 ‘잃어버린 낙원’의 이미지를 선사한다. 비슷한 플래시백 구조를 사용했던 인디 히트작 <메멘토>와 달리, <돌이킬수 없는>은 서스펜스에 의존하지 않는다. 머리를 이리저리 굴리게 하는 특유의 일관성을 <메멘토>에 부여했던 내부적인, 기억상실증 같은 논리에는 신경도 안 쓴다. 끝에서 처음까지- 혹은, 의도와 무관하게 웃긴 맨 처음의 끝장면부터 숭고해 보이고자 애쓴 마지막의 첫 장면까지- 노에의 모험활극은 속임수를 곁들인 선정성(exploitaion) 영화다. 그리고는 나혼의 입을 빌려, 새삼 논할 가치도 없는 얄팍한 철학 한줄을 덧붙인다. “시간은 모든 것을 파괴한다.” 아, 물론이다. 그리고 만약 당신이 그 증거를 원한다면, <돌이킬수 없는>과 90분을 보내보라. 당신은 그 아까운 시간을 절대 돌려 받지 못할 것이다. - <빌리 보이스> 2003. 3. 5

“에미넴 필름”이라고 소개된 영화 은, 수백만장을 팔아치운 데뷔앨범에서 “신은 세상을 좆까라고 나를 내려보냈다”는 메시지로 자신의 출현을 널리 알린 바있는 래퍼에 대해 우리가 상상할 만한, 즉 자유주의적 관용에 전선을 긋고 대항하는 대목이, 의외로 별로 없다.

그렇다고 해서, 노련한 베테랑 커티스 핸슨이 연출한 이, 에미넴 음악에서 발견되는 격렬한 섹스, 폭력, 그리고 스타의 아이러니로 특징지워지는 것도 아니다. 기본적으로 은, 그 스타의 어필을 더욱 확장시키려는 솜씨좋고 전체적으로 성공적인 시도였다. 에미넴 자신이 래빗이라는 이름의, 또다른 버전의 자기 자신을 연기하는 이 영화는, 그 속성에서 프린스의 <퍼플레인>과, 어쩌면 <재즈싱어>와도 닮았다. 이 노동계급의 서사시에서 에미넴이 보여주는, 폭력적 성향이 있어 보이고 라임을 맞추는 재능이 뛰어난 걱정스런 낯빛의 래퍼 지망생의 모습이란 그 스타 자신의 평소 모습에서 별달리 확장해나간 게 아니겠지만, 에미넴은 이 모든 것을 자신의 카리스마 넘치는 회의주의로 멋지게 물들여놓는다.

래빗은 쉘터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난폭하고 배타적인 디트로이트의 한 길거리 무대에서 랩 배틀 중 콜록대는 모습과 함께 소개된다. 그러고는 가족이 사는 트레일러로 되돌아간다. 행동이 단정치 못한 그의 엄마(킴 베이싱어)가 아들보다 별로 나이가 많을 것 같지 않은 사내와 신나게 시시덕거리는 모습은 안 그래도 절망적인 그의 수치심을 더욱 고조시킬 따름이다. 래빗은 후진 똥차와 가망없는 직업, 그리고 침대 밑에 웅크리고 있는 어린 여동생이 전부다.

이 영화에서 핸슨은, 해설자라기보다는 관찰자다. 그는 도시적 재난을 한눈에 보여주는 디트로이트 로케이션에서 거친 알갱이 한줌을 쥐어짜내는 데 성공한다. 에미넴의 음악과 마찬가지로 은, 인종을 뛰어넘는 연대전선을 꾸려내면서도, 랩산업의 중심인 아프리칸 아메리칸니스(African Americanness)에 착목한다. 자기 안에서의 뭔가 설명할 수 없는 갈등에 시달리다가 그것을 멋진 한방으로 마침내 연결시켜내는 래빗의 이야기는 놀리는 듯한 느낌이 들 정도로 에미넴의 자기 반영적인 이야기다. 이것은 ‘자기 부정’이라는 감정을 대단히 영리하게 사용한 예이며, 그 어떤 관객층이라도 사로잡을 만한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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