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타]
<살인의 추억> 두 배우 김상경, 송강호 [2]
2003-04-23
글 : 백은하 ( <매거진t> 편집장)
사진 : 이혜정
어떤 조화로운 부조화의 기억

송강호, 마음속에 늘 의문부호를 찍는

기자들은 송강호가 귀찮다. 한참 이야기를 신나게 하다가도 “아… 이 말은 좀… 건방져 보이니까… 안 쓰시면 좋은데”라고 먼저 바리케이드를 치고, 인터뷰가 끝난 뒤라도 혹시 미심쩍은 말이 있으면 “저… 그때 했던 그 말은 그 뜻이 아니라…”라고 전화를 해서라도 반드시 확인사살까지 끝낸다. 물론 감독들도 송강호가 귀찮을 거다. 준비과정부터 촬영까지 늘 마음속에 의문부호가 떠나지 않은 채 감독들을 들들 볶는다. 게다가 이 치밀함과 꼼꼼함은 촬영장에서 끝나지 않고 편집실까지 이어진다. “편집실에 매일 나가는 건, 뭐, 딱히 할일이 없기 때문이죠. 물론 배우가 편집실에 앉아 있으면 감독이나 편집하는 분이, 뭐 대놓고는 안 그래도, 사실 부담스러운 점이 있겠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편집실에 출근을 하는 이유는… 정말로 할일이 없기 때문에… 웃헤헤헤헤헤!” 그의 이런 편집실 출근사는 <조용한 가족> 때부터 시작되었다. 어떤 날은 “감독보다 더 일찍 출근하는 바람에 닫힌 문 앞에서 꾸벅꾸벅 졸다가 고임표 기사가 깨워서 들어가곤 했다”며 농담처럼 말하지만. 그것이야말로 편집 없는 연극판에서 연기의 기초를 다진 이 배우가 영화라는 새로운 매체에 적응하기 위한 가장 영리한 방법이자 절박한 노력이었으리라.

실제 일어난 연쇄살인사건을 토대로 한 <살인의 추억>을 찍기 전, 봉준호 감독은 사건 관련 자료들을 송강호에게 전달하긴 했다. 하지만 그는 관련된 형사를 만나거나, 실제 사건에 깊이 빠져들진 않았다. “그런 건 감독이 하면 되는 거죠. 배우는 철저히 시나리오에, 텍스트에 충실하게 연기하면 되는 거고. 사실 배우에겐 실제 사건에 대한 공포감, 증오감이 불필요한 것 같아요. 물론 자연인으로서 그 사건을 대할 때는 끓어오르는 분노를 참을 수 없죠. 그렇지만 내가 분노에 미쳐서 연기하는 건 아닌 것 같거든요. 어떻게 하면 이 분노를, 이 슬픔을 전달할 수 있을까. 보는 이들로 하여금 어떻게 하면 분노를 끌어낼수 있는가가 더 중요한 거죠. 저한텐 장애인도, 행려도, 형사 연기도, 실제인물을 만나보느냐가 중요한 건 아닌 것 같아요. 서울역에서 몇달 함께 노숙하면 정말 외관은 비슷해질 거예요. 그런데 중요한 건 그들의 모습을 따라가느냐가 아니라 그들의 본질에 얼마나 가까이 가느냐죠. <복수는 나의 것>이 다른 어떤 영화보다 천배, 백배 잔인하게 느껴지는 건 잔인한 장면의 빈도와 강도 때문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바로 잔인함의 정서에 정확히 가까이 가 있기 때문일 거예요. 박두만 형사에게 생명력이 느껴진다면 그 때문이겠죠.”

<살인의 추억>은 사실 ‘배우 송강호의 모든 것’이라고 말해도 손색이 없을 영화다. “꽃 피는 봄이 오면 내 곁으로…” 단란주점에서 살랑살랑 <제비처럼>을 부를 땐 <초록물고기>의 생짜양아치 판수가, “밥집 영수증을 줘야지, 자전거포 영주증을 주냐…”며 구시렁구시렁 거릴 땐 <넘버.3>의 조필이, 빗속 시위인파를 헤치고 걸어갈 땐 <쉬리>의 이장길 요원이, “여기가 강간의 왕국이냐!”를 외치며 ‘날라 이단 옆차기’를 시도할 땐 <반칙왕>의 임대호가, ‘무모증’ 범인을 잡기 위해 목욕탕에서 흘깃흘깃 눈을 돌릴 땐 의 소심하고 엉뚱한 호창이 오버랩된다. 운명적인 적을 앞에 두고 “밥은 먹고 다니냐…”고 물을 땐 <공동경비구역 JSA>의 큰형님 오경필 중사가, 분노와 허탈감에 뜨거운 눈물을 흘릴 땐 <복수는 나의 것>의 동진이 영화 속에서 살아 숨쉰다. 그렇게 그는 변신하지 않고 축적한다. 하나도 버리지 않고 차곡차곡 쌓는다. ‘로버트 태권브이’ 같은 ‘깜짝합체’나 ‘카멜레온’ 같은 연기변신 대신 켜켜이 쌓은 레이어로, 그 단단한 속살을 품고 몸을 움직인다. 그는 세월과 경력과 함께 마모되지 않고 더욱 위대해질 배우다. 그것이 내년 봄 만주벌판을 달릴 송강호가, <아리랑>의 김산이 무시무시한 이유다.

김상경, 안 먹고 안 자고‥ 점점 미쳐갔다

“웬 만화책이람?” 어느 날 김상경은 봉준호 감독으로부터 ‘만화책’ 한권을 받았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감독이 직접 그린 만화풍의 콘티북을 받았다, 는 것을 뒤늦게 알았다. 그가 그때 “원래 이런 것도 만들어요?”라고 두눈 동그랗게 뜬 채 물어본 이유는 뻔하다. 첫 영화가 홍상수 감독의 <생활의 발견>이었기 때문이다. 시나리오조차 없이 현장에서 즉석에서 상황과 대사를 만드는 홍 감독이다 보니 콘티북이 있었을 턱이 없지.

“처음으로 정상적인 시스템 속에서 작업한 영화” <살인의 추억>에서 김상경은 서울에서 파견온 형사 서태윤 역을 맡았다. ‘서류가 모든 것을 말해준다’는 이성적이고 과학적인 수사관을 갖고 있던 그는 연쇄살인범의 피 그림자가 커질수록 극한의 감정으로 빠져든다. 영화의 클라이맥스에서 그가 보여준 광기와 회한이 어지러이 뒤섞인 눈빛은 진정 온몸의 피가 콸콸 역류하는 자의 그것이었다. 그때 김상경의 감정상태가 바로 그랬다. 지난해 4월 시나리오를 받은 뒤 그는 “눈물나고 화나고 범인을 잡고 싶은 기분”을 느껴 2번 연속으로 읽을 수밖에 없었다. 마음을 가누지 못한 그는 밤을 꼬박 새운 뒤 아침녘 봉 감독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 “무척 화가 났다”고 감상을 피력했다. 서태윤은 당연히 그였다. 떨어진 물이 얼음으로 바뀌는 데 몇분이면 충분한 겨울날 살수차가 뿜는 비를 맞으면서도, 그것도 17일 동안이나 ‘물고문’을 당하면서도 그가 버틸 수 있었던 것은 시나리오를 읽던 당시의 분노가 가슴 한가운데 뜨겁게 자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이 영화에서 “배우로서 눈을 열어준” <생활의 발견>의 방법론을 적용했다. 시나리오를 받은 뒤 1달 동안 반복해 읽었던 그는 정작 크랭크인하던 8월이 될 때까지 3개월 동안은 시나리오에 한번 눈길도 주지 않았다. “어떤 틀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촬영날 아침 시나리오를 쓰기 시작하는 홍 감독의 ‘깊은 뜻’도 깨달았다. “매일 다른 공기, 바람, 햇빛을 느끼려 노력했다. 그 순간 치밀어 오르는 느낌, 기분을 최대한 살리려 했다”는 것. 전작에서 술을 통해 자유로운 몸을 얻은 것처럼, 이번에는 감량을 통해 몸이 먼저 고통을 느끼게 했다. <생활의 발견> 때 94kg까지 치솟았던 그의 몸은 크랭크인 당시 87kg으로 가벼워졌고, 크랭크업 때는 82kg으로 바뀌었다. 다이어트를 위해 안 먹고 안 자면서 그의 몸에 피로가 깃들었고, 예민해진 신경은 눈 주위에 날을 세우기 시작했다. 미치고 지쳐가는 서태윤의 모습은 그렇게 창조됐다. “스크린에서 내 캐릭터를 보는데, 분명 내 몸이지만 내가 모르는 사람이 거기 있을 때 배우하는 게 좋다고 느낀다”는 그의 연기관은 <살인의 추억>에서도 들어맞는다.

그러고 보니 현실의 김상경은 스크린 속 서태윤과 상당히 거리가 있는 듯하다. 실없는 이야기나 속없는 웃음을 자주 흘리는, 이렇게 서글서글한 사람이 그렇게 활활 타오를 때가 있을까 싶다. 그런데 논점이 생기니 달라진다. 열올려 주장하는 대신, 그는 “아, 그게 그렇다니까요”라면서 “하하하…” 웃는다. 희한한 건 그 웃음이 단호하다는 점이다. ‘네가 뭐래도 나는 절대로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테니 이제 그만 하자’는 말이 함축된 느낌이다. 어쩌면 그런 단호함이 단 2편의 영화를 통해 숨어 있던 또 다른 자신을 찾아내게 한 건지 모른다. 감독의 성격은 대조적이지만 무한의 흥미와 자극을 줬다는 점에서 한 가지인 그 2편은, 그래서 그에게 중요하다. 당장 차기작에 관해 고민하지 않는 것도 “정말 와닿는 작품”을 느긋하게 기다리기 때문이다. ‘연기의 발견’과 ‘내면의 추억’을 통해 큰 배우로 거듭나고 있는 김상경은 이제 어떤 ‘영화의 도전’을 받아들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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