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제8회 씨네21 영화평론상 [2]
2003-05-16
글 : 김소희 (전 씨네21 편집장)

<디 아워스> 김종연 작품비평 전문

시간의 팜므파탈, 존재론적 스릴러

니콜 키드먼과 메릴 스트립 그리고 줄리언 무어라는 당대 최고의 여배우들의 사진 세개가 나란히 포스터에 붙어 있는 이 영화에서 가장 난감한 일은 누가 주인공인지를 가려내는 일이다(베를린영화제에서는 세명 모두에게 주연상을 주었다). 이 영화는 누가 주인공인가? 이것은 일견 하찮은 문제로 보인다. 그것은 마치 <반지의 제왕>에서 누가 주인공인가를 묻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영화의 제목이기도 한 ‘세월’ 즉 시간은 반지의 제왕에서 ‘반지’의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은 사실 마이클 커닝햄 혹은 스티븐 달드리의 맥거핀이다.

실은 이 영화는 능청스럽게도 타이틀이 뜨기 전 몇분 동안에 그 영화가 무슨 영화인지 알려야 한다는 관습을 의도적이든 아니든 지키고 있다. 버지니아 울프가 유서를 쓰고 강물에서 자살한다. 영화에서 세 여인의 ‘하루’에 해당하지 않는 부분은 그때까지이며 스티븐 달드리(혹은 마이클 커닝햄)가 정직한 것도 그때까지다. 영화는 자신이 <유주얼 서스펙트>와 같은 ‘후더닛’ 무비라는 것을 드러낸다. 버지니아 울프는 죽었고 누군가 그녀를 죽게 했으니 이제 그 범인을 찾으면 된다. 그러나 스티븐 달드리는 그때부터 범인을 이리저리 피신시키면서 능청을 떤다.

우리는 감독에 의해 이 세 여인이 같은 하루를 진행하고 있다고 설득당한다. 그러나 그 증거는 어디에도 없다. 교차편집해서 이어붙인 이 세 여인의 하루는 실은 ‘시간들’에 의해서가 아니라 <댈러웨이 부인>이라는 책을 통해서 연결된다. 따라서 우리는 이 이야기의 구조에 또 하나의 불안한 여인네 하나가 더 끼게 되었다는 것을 직감한다. 그녀가 제4의 여인이며 버지니아 울프의 피조물인 ‘댈러웨이 부인’이다. 울프는 그녀를 죽일까 말까 고민하다가 살려두지만 자신이 죽고 로라 브라운은 그녀에 대해 읽다가 자살을 기도하지만 대신 아들이 자살한다. 이에 대해 울프 자신이 명쾌하게 설명한다. “누군가가 죽는 것은 다른 사람이 삶에 대해 감사하기 위해”서 혹은 다른 사람이 살기 위해서다. 그렇다면 대신 누가 살았는가? 뉴욕의 클라리사와 댈러웨이 부인이다.

그러나 알아야 할 사실은 하루의 시작에서부터 알 수 있듯이, 울프가 댈러웨이 부인의 첫 문장을 쓰고 브라운이 그 부분을 읽을 때, 뉴욕의 클라리사는 그 부분을 자기 입으로 말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물론 클라리사는 소설 속 댈러웨이 부인의 이름이기도 하며, 그녀 자신의 별명이 ‘댈러웨이 부인’인데다가 소설 속 댈러웨이 부인의 인생이 저당잡힌 남편의 이름은 뉴욕의 클라리사의 인생이 강박된 남자친구의 이름 리처드이다. 익히 잘 알려진 사실대로 소설 <댈러웨이 부인>의 충실한 오마주로서 쓰인 마이클 커닝햄의 <디 아워스>에서도 그녀는 ‘댈러웨이 부인’으로 매 챕터를 장식한다. 흥분할 필요도 없이 제4의 여인 댈러웨이 부인은 실은 뉴욕의 클라리사와 동일인물이며 두명의 죽음을 통해 대신 살아난 것은 다름 아닌 댈러웨이 부인 그녀 자신이다.

영화 <디 아워스>는 두 종류의 시간을 흐르게 한다. 하나는 아침부터 밤으로 이어지는 일상적 시간(Zeit)이고 세 여인의 하루를 의미있게 하나로 묶는 근원적인 시간(Zeitlichkeit)이다. 그러나 여기서 절대로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왜 이 네 여인들의 ‘하루’가 ‘모든 날의 하루’(this day of all days) 즉 ‘실은 영원히 반복될 하루’인지이다. 그것은 마이클 커닝햄과 버지니아 울프가 ‘의식의 흐름’을 사용하면서 분명해지듯 시간을 의식이 움직일 수 있는 하나의 틀 즉 시간성으로 보기 때문이다. 이 안에서 매일 새로운 하루가 와도 그들은 결코 그 하루를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그것이 버지니아 울프가 강물에서 죽은 가장 큰 이유이다. 다시 말해 시간에 의해 살해된 것이다.

그러나 ‘댈러웨이 부인’은 리처드의 죽음으로 이제 그 하루를 벗어나게 될 것이다. 그녀야말로 이 근원적 시간의 미로 속에서 살아남은 두 죽음의 배후이다. 그녀는 실존 아니면 죽음이라는 위태로운 게임의 비정한 법칙에서 시간을 무기로 모두를 죽이고 살아남은 팜므파탈이며 이 후더닛 무비의 주인공이다.

우수상 김종연 인터뷰

말의 힘을 재발견하는 것이 중요하다

1975년생으로 대학에서 정치학을 전공했고 현재 대학원에서 국제협력을 공부하고 있다. 프로필을 알려달라는 요청에 대해 “소개할 것이 없다”고 얼굴을 붉히더니 출신 학교와 학과만 달랑 적은 소개문을 보내왔다. 그러나 모든 종류의 색깔 다른 영화를 보다 잠들고, 극장에 앉아 관찰하며 생각하기를 좋아하는 이 젊은이가 머릿속마저 수줍은 타입 같지는 않다.

주제에 착목한 계기는. <이중간첩>과 <무간도>를 보며 무언가 불편한 느낌이었다. 그게 뭘까 생각하며 약간의 글을 써뒀는데 공모난 것을 보고 정리했다.

영화 취향은 어느 쪽인가. 닥치는 대로 보는 편이다. 대학 2학년 때 하루 4∼5편씩 폭식을 시작했다. 요즘처럼 학사 관리가 엄정하지 않아서 비디오 가게 아저씨와 돈독한 관계를 맺을 수 있었다. (웃음) 요즘에는 영화의 생산과 수용구조, 즉 영화관에 앉아 있을 때 벌어지는 효과에 주안점을 두게 된다. 독특한 경험이나 불편함을 주면 더 집중하게 된다.

특별하게 영향을 받은 비평 패러다임이 있다면. 다소 엉뚱하지만, 프랑스 철학자 자크 엘루의 저서를 자꾸 들여다본다. 이웃의 재발견, 언어의 재발견, 혹은 그런 것을 재발견하지 못하게 만드는 틀을 고발하는 등 메시지가 풍부하다. 영화에 대한 본격적인 훈련과는 거리가 있지만 길 잃을 때 힘이 되고 참고가 된다.

어떤 평론가가 되고 싶은가. 정치학 수업을 받으면서 정치 평론을 연습하는데 영화를 비롯해서 거의 모든 분야에 대한 평론 페이퍼를 작성하게 되었고 이것이 응모를 한 계기다. 정작 영화평론가로서 사회의 독특한 웹(web)에 들어가게 되니 당황스럽다. 말의 재발견 혹은 말의 힘을 재발견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여긴다. 평론가들의 개인적인 내공에 기대기보다는 독자들과 공동의 토론장을 형성할 수 있도록 레퍼런스(reference)가 풍부한 저널 비평을 형성하는 데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다.

김종연 당선소감 +++ 지금도 가끔씩 새벽 공기를 빠르게 자동차가 통과하고 새삼스럽게 드러나는 그 침묵에 멍하게 귀기울이곤 합니다. 그때마다 일어나 메모지에 무엇인가를 써놓거나 기도를 하게 된다면 그것은 차라리 알 수 없는 천체를 향해 제가 보내는 교신 같은 것이었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자의 반 타의 반으로 휴학을 하고 나서 주어진 한달여 동안 평론 제출을 준비할 때도 또 조금은 촉박하게 하얀 공백들을 메워갈 때도 저는 여전히 그런 ‘교신’의 태도였던 것 같습니다. 자동응답기에 녹음된 당선통보를 듣고 잠시 ‘초유의 회신’을 받은 양 달떴지만 그것이 가라앉고 나니 이제 ‘어떤 소리를 내는가’에 집중되어 있던 관심에서 ‘어떻게 이 소리가 들릴 것인가’에 대해 고민해야 할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개인적으로 교신의 시대가 끝난 것입니다. 하지만 끝은 끝나고 시작은 시작되어야 하겠기에 이런 낯선 불확실에 감사하고 있습니다. 교신음향이 난무하는 어떤 노래의 말미를 장식하는 보노보노의 대사처럼요. “이젠 미래가 보이지 않게 된 것 같아. 하지만 난 그런 게 더 좋아.”

장르론요지_2000년대 한국 복고풍 영화

사소한 기억의 정치성

2001년의 <친구> 이후 2000년대 한국 복고풍 영화는 한국사회의 외상적 기억에 해당하는 70, 80년대의 사소하고 세밀한 기억들을 반복 소환하고 있다. <박하사탕>을 마지막으로 과거를 역사로서 부르고 이를 청산하려는 의지를 보였던 90년대 소환과 달리 스스로 새로운 ‘현재’와 ‘생활세계’(life-world)로 지금의 현재와 혼융되려고 하며 장르에서나 소재에서 진화를 거듭하고 있기조차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현재성을 갖춘 복고영화가 관객의 실제적인 ‘현재’와 충돌하지 않는 이유는 ‘과거’와 ‘현재’ 사이의 ‘회고담’과 ‘후일담’이 필연적 관계로 맺어져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이전 프로토콜과는 다른 새로운 암묵적 거래가 관객과 영화 사이에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과거의 기억들을 ‘키치’적인 패션으로 본다는 점에서 근미래 SF의 관람태도와 유사하다.

그러나 SF가 직접성을 회피하고 현재와의 안전한 ‘거리’를 상정하는 이유가 현재에 대한 은유나 환유에 있으며 그런 방식을 구사할 수밖에 없는 데 사회적 폭력이 배후에 있다는 점에서 복고풍 영화들이 정치적으로 읽힐 가능성이 열리게 된다. 그러나 그 정치성은 영화 내 현실태 묘사에서보다 누가 그 과거들을 소환하는가라는 문제에 답하면서 찾을 수 있는, ‘권력적 정치’(politics)가 아니라 ‘의미론적 정치’(the political)가 보여주는 전망과 의미로서의 정치성이다.

2000년대 복고영화에서 강박적으로 과거 일상의 디테일들이 되돌아오게 하는 것은 현재 생활세계의 균열을 메우게 하려는 우리의 집단 id이다. 그것은 날카롭고 근대적인 시선을 통해 과거를 포획하는 방식으로 스스로를 확립하려는(self-founding) 데카르트적 기획으로서의 자기 성찰이나 나르시시즘의 전략을 한축으로 하고 격동의 시대가 가진 정치성을 박탈시키면서도 흔적의 형태로 ‘유효하지 않은 과거의 악당’들을 되살려놓으면서 과거를 경멸하는 태도로 현재의 ‘다양성’이나 ‘이종성’(heterology)을 찬양하려는 기묘한 은폐를 다른 한축으로 구사한다. 그러나 이러한 영화들의 이중 전략은 우리가 사는 현재가 데리다적인 이종성의 사회라기보다는 70, 80년대의 압제적 힘이 다른 방식으로 여전히 존재함을 방증하는 Flach의 이종성의 사회라는 사실을 나타내고 그 정치적 불온성을 노출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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